2025년 3월 4일 화요일

2박3일에 걸쳐 대전에서 상주로 가기

부석사, 소수서원, 도산서원, 하회마을. 지난 이틀 동안 들른 곳이다. 긴 우회로를 거쳐 오늘(3월 3일) 저녁에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상주에 도착하였다.

부석사 석등과 무량수전.



아내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앉았다.

영주 소수서원 입구에서.





상상외로 거대했던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금이 내려 준 '도산서원'이란 이름을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직접 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내부에는 '전교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도산서원 앞마당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기묘하게 생긴 둔덕이 있다. 이는 시사단(試士壇)이라고 부른다. 정조때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치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축물인데, 안동댐이 만들어지면 수몰 위기에 처하자 약 10미터 높이의 언덕을 만들어 그 위로 옮겼다고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밟으며 퇴계 이황의 묘소에 들렀다.



이름도, 벼슬도 새겨져 있지 않은 묘비의 한가운데 새겨진 글은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는 퇴계가 쓰던 호의 하나이고, 만은은 늦게 은거했다는 뜻이다. 진성은 본관. 좌측에 새겨진 글은 퇴계가 생전에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기를 참고하라.

성리학, 또는 유학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부르짖는 바는 무엇일까? 어제 영주의 소수서원과 선비촌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시작된 골치아픈 물음은 여행 이틀째 더욱 내 머릿속을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볼거리와 맛있는 음식을 찾아 눈과 입을 자극하는 여행이 아니라 관념을 뒤흔들며 질문을 던지는 여행이 되었다.

나는 유학 또는 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아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한자 공부부터 시작해야 할까? 같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차라리 한자보다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더 나을까?

한국고전번역원 -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유교와 유학

명종의 어필 편액. 이로써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3월 2일에 방문하였다.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이육사 문학관(안타깝게도 오늘은 휴관일...)에서 바라본 풍광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폭의 수묵화로 표현한 겨울 산을 보는 듯하였다.

옥빛으로 빚나며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물. 여기는 하회 옥연 구곡이다. 물 저편으로 보이는 것이 조금 뒤에 오를 부용대이다. 바위 색깔도 예사롭지 않았다. 안동의 '지질학'이 궁금하다.


부용대에 올라 바라본 하회마을. 여행 이틀째의 마지막 코스였다. 여기를 오르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선비란 무엇인가? 학식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은 '양반'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선비 정신을 현대에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면, 신분에 의한 진입 장벽이 분명히 존재했던 과거의 기준을 털어 내야 한다고 믿는다. 양인(양반, 중인, 상민)뿐만 아니라 비록 노비로서 생존을 위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여도 고매한 인격을 갖추고 있으며 시간을 내어 학문에 힘쓰고 있다면 선비라 불러 마땅하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 선비의 완성이었다. 모욕을 참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권력자를 만나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는 것도 그러한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나의 신념과는 잘 맞지 않는다. 옳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노동을 천시하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부과된 의무를 회피하지 않으며(서원은 세금과 병역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된 것으로 알고 있음) 권력 지향적인 자세를 과감히 버릴 때, 그러한 선비 정신이라면 현대에도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