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6일 목요일

KRIBBtonite의 최초 공연, 출장(강원도 홍천),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대전으로 복귀

연구소 설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우리 밴드 KRIBBtonite가 첫 공연을 하였다. KRIBB + tonight(오늘밤)의 뜻도 있지만, 슈퍼맨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신비한 돌 kryptonite를 뜻하기도 한다. 준비 기간은 약 3개월. 각자 연구와 실험에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모여 이런 성취를 이룬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음악의 질을 논하기에 앞서 정말 수고 많았다고 칭찬부터 하고 싶다.

2025년 2월 4일, 역사가 이루어졌다. 정말 마음에 드는 단체 사진. 촬영자를 기억하지 못함이 아쉽다.

베이스를 치는 내 모습. 이를 보고 가수 이용복(1952~)을 떠올리는 분도 있었으나, 나는 존 윅 4편에 나오는 케인(견자단)의 모습과 대조해 보았다. 


멤버 중 한 명은 공연 후 정리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자마자 부랴부랴 회의를 하려 세종시(과기정통부)로 달려갔다. 

네 곡을 연주했던 공연 전체를 찍은 동영상을 입수하게 되어 밤 늦게 여기에 타이틀과 약간의 자막을 입혀 유튜브에 올렸다. OpenShot 비디오 에디터를 쓴 지가 좀 되어서 사용법을 기억해 내느라 시간이 걸렸다.

동영상 편집 중. 스틸 사진을 모아 쿠키 영상 비슷한 것을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여러 이미지 사이의 디졸브를 매끄럽게 설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컬을 담당하는 멤버가 무려 세 명이라는 것도 KRIBBtonite의 강점이다. 음향 장비를 더욱 확충하여 다양한 여건에서 좋은 사운드를 내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이다. 아울러서 재능과 끼를 갖춘 멤버가 더 모이면 좋을 것이다.

다음날, 강원도 홍천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 동계심포지엄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중간에 들른 남한강 휴게소.

홍천에 왔으니 막국수를!


첫 날에는 90분에 걸친 K-BDS(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세션에서 좌장을, 둘째 날(오늘)은 오전에 열린 또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 세션에서 발표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지 15분에 불과한 발표이지만 대규모 사업을 소개하는 자리인데다가 과제 책임자인 나는 세부적인 사항을 아주 상세히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사전에 연습을 많이 했다. 큰 발표장임에도 불구하고 여분의 의자를 가져다 놓아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았고, 사업단에서도 준비에 많은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다. 사업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밴드 단톡방에 놀라운 소식이 올라왔다. 인트라넷 로그인 화면에 동영상 링크가 올라온 것이다. 연구소 공식 채널이 아니라 내 개인 채널이라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덕분에 조회수는 올라가겠지만... KRIBBtonite 로고는 챗GTP를 이용하여 내가 만든 것이다.



질의 응답 시간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100명 정도의 whole-genome sequencing 결과를 갖고 있는데 이를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에 기탁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백롱민 사업단장의 답변을 기억나는대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은 참여자로부터 데이터에 대한 기부를 받는 동의서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연구에서는 참여자로부터 데이터를 연구 목적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사용 승인을 받은 것이지 기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미 만들어진 데이터를 본 사업에 기탁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기존 데이터를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의 틀 안에 넣으려면, 참여자를 다시 수소문하여 다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이를 다소 어려운 말로는 '동의서 구득'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 대상 연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우리나라의 규제 현실에서 빚어지는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몇 가지 방법으로 비식별 처리가 이루어진 인체유래 데이터를 이용하는 연구는 인간 대상 연구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동의서나 심지어 IRB 심의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는 내가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일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식별 정도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데이터에 대한 익명화를 해야 한다. '보건의료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에서는 익명화보다 수준이 낮은 가명처리를 한 경우 이를 특정 목적-통계 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 보존-에 한하여 정보주체(제공자)의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제공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엄격히 말해서 여기에 '연구 데이터'는 포함되지 않는다. 연구데이터를 재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구자가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이를 인체유래물은행에 기증한다는 동의서까지 같이 받는 것이다. 데이터를 등록하는 은행이 별도로 존재하고, 이를 인체유래물은행이 담당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엄보영 사무국장의 사업 전체 설명에서 data philanthropy('데이터 자선 활동' - 기업, 기과느 개인이 보유한 데이터를 공익적 목적으로 공유하거나 활용하는 기부 형태)를 강조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부는 명시적인 의사 표현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는 결국 동의서 구득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나에게는 미국의 모델이 매우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같은 세션에서 발표를 했던 Graeme Bethel 및 일루미나 코리아의 관계자들과 미팅까지 하느라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왜 genome sequencing이 필요한가?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과학자들에게는 연구를 할 수 있는 데이터를 주며, 마지막으로 제약 기업이 신약을 개발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Bethel의 말이었다.

Graeme Nethel의 발표.


오후 세시 반이 다 되어서 홍천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또 눈이 내린다! 영하 18도에 가까운 혹독한 강원도의 밤을 보낸 때문일까,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엔진오일을 교환할 때도 되었으니 주말에는 서비스 센터에 가 봐야 되겠다. 지난주의 여수 여행과 서울 나들이를 비록하여 공연,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강원도 출장까지... 나나 자동차나 모두 수고가 많았다. LibreCAD에서 진공관 앰프 상판 도면을 완성하는 것도 이번 주말의 숙제가 되겠다.



2025년 2월 2일 일요일

8 km 달리기의 후유증 - 쏟아지는 졸음

  • 사흘 전(1/30) - 39:20 / 6.04 km / 6'30" 
  • 이틀 전(1/31) - 12:35 / 1.87 km / 6'41" <- 불편한 신발을 잘못 선택해서 빨리 종료함 
  • 어제(2/1) - 53:19 / 8.01 km / 6'39"

한 번에 8 km를 달린 것은 1월 26일 여수 여행 중이 최초였고 어제는 두 번째였다. 달리기를 시작한 작년 8월부터 어제까지의 총 마일리지는 401.69 km였다.

어제 달린 갑천변 코스.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는 뿌듯함은 좋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만 했다. 오늘이 휴일이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리의 뻐근함 또는 묵직함은 다음날 오전이면 다 풀린다. 즉 이 정도의 달리기가 근골격계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피로감을 느낀다면 문제가 있다.

현재의 체력으로는 격일 8 km 달리기는 무리가 있다. 한 달에 꼭 100 km 이상을 달리려고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자. 

  • 2024년 8월(51.66 km), 9월(40.11 km), 10월(68.95 km), 11월(75.22 km), 12월(66.26 km)
  • 2025년 1월(91.12 km) - 총 16회, 회당 5.695 km

올해 1월의 기록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이보다 조금 더 달린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40분 이상을 달리되 2~3회에 한 번 정도는 8 km(대략 53~54분)를 채우면 될 것으로 본다. 

공주(公州)의 재발견

인기 프로그램 「전현무계획2」에 소개되었던 어떤 식당을 가기 위해 공주에 들렀다. 원조집이 아닌 다른 업체를 통해 이미 이 음식을 먹어본 일이 있던 아들의 말로는 대전-충남권에서만 잘 알려진 것으로서 다른 동네에서는 '괴식(怪食)' 취급을 받는다고 하였다.

과연 한 시간이나 대기하면서 먹을 가치가 있었을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줄을 서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또 먹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맥주 안주로는 적당해 보였다. 차라리 공주 특산물인 밤을 이용한 디저트류가 더 나았다. '여수(돌산도):갓 = 공주:알밤'이라는 비례식을 떠올려 보았다.


유별난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주변을 검색하여 '#17커피'라는 카페에 들렀다.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 앞 회전교차로에 접한 곳으로,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이 좋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향한 다음 목적지는 공산성. 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로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놓인 비석군을 살펴보았다. 공주는 이미 여러 차례 와 보았기에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공덕비(선정비 또는 송덕비라고도 부름)를 놓기 위해 주민들은 괜한 수고를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공주에는  정3품의 목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공주를 거쳐가는 모든 관찰사가 이곳 백성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훌륭한 관리였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관찰사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에는 공덕비를 과연 세우지 않고 지나갔을까? 혹은 어떤 관찰사가 머물다 가더라도 그저 관행이라는 이유로 비석을 세운 것일까? 혹시 아직도 관료 사회에 남아있는 '간부 모시는 날'(2025년 1월 조선일보 기사 링크)과 같은 폐습은 아니었을까?


여러 공덕비 중 이 사진의 가운데 것이 가장 특이하면서 조형미가 돋보인다.

조금 검색을 해 보니 2015년 장성신문에 실린 「공덕비 유감」이란 기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지만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부임하자마자 자기 밑의 아전들을 시켜 공덕비를 세울 돈을 모으게 했다. 이는 공덕비 건립이 조선시대 고을 수령의 공개적인 비자금 창구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각출했고 이를 비채(碑債) 또는 입비전(立碑錢)이라 부르며 성금의 일부만 공덕비 건립에 쓰고 나머지는 사또가 개인적으로 챙기는 돈 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력에 아첨하는 이방이나 아전들이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정조가 1789년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는 엄명까지 내린 것을 보면 공덕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공덕비에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나의 얄팍한 한자 실력으로도 그 뜻을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는 문구가 적힌 비석이 많았다.


어떤 비석에서는 다음 사진과 같이 永('길 영')을 다소 색다르게 새겨 놓았다. 마치 亠(돼지해머리 두) 부수 아래에 물 수자를 쓴 것 같이 보인다. 永은 내 이름에 쓰이는 한자라서 못알아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공산성 성곽을 올라 시계방향으로 2.66 km에 이르는 둘레를 걷기로 하였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있어서 힘겨워하던 아내도 전체 둘레를 다 돌고 나서는 무척 뿌듯해 하였다. 내가 달리기를 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워밍업이 되기 전까지는 힘들지만,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난 뒤 밀려드는 개운함과 성취감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서루를 비록하여 금강과 면한 곳은 돌로 쌓은 성벽이 있지만 이는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이고, 그 뒤편에는 토성 형태를 하고 있다. 중간쯤 돌았을 때 눈이 많이 와서 출입을 금한다는 작은 표지판이 놓인 것을 발견하였으나 포근한 날씨로 눈이 많이 녹은 터라 우리 부부를 비롯한 많은 탐방객이 이를 무시하고 성벽을 따라 돌았다.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를 배경으로.



누에 씨(알)을 보관하기 위한 잠좀냉장고. 19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연지와 만하루.


동문에 해당하는 영동루. 원래 현판이 없었으나 공주시에서 이름을 공모하였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도중 국방색의 긴 가방을 등에 멘 청년과 그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 둘을 만났다. 가방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활이라고 하였다. 

"양궁인가요, 국궁인가요?"

"국궁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공주 관광단지 안에 관풍정이란 국궁장이 있다고 한다. 전국 380여 국궁장의 종가 역할을 하는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이 떠오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성곽을 따라 걷는 것에 집중하느라 영은사(사찰)을 제외하고는 공산성 내부에 있는 많은 건축물과 유구를 둘러보지는 못하였다. 공산성 안에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서기 475년 동안 공주(당시 웅진)로 백제의 도읍지를 옮겨 사비 천도 전까지 약 7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날 동안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웅진 시대 왕궁터를 비정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며, 공산성 내부는 왕궁을 두기에는 매우 협소하다. 지속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언젠가는 그 답이 나오리라.

유난히 길었던 2025년 설 연휴 동안의 나들이는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2025년 2월 1일 토요일

실수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다

서울 출신이지만 대전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진 나에게 서울은 출장이나 관광 목적으로 들르는 곳이 되었다. 유난히 길었던 이번 설 연휴 마지막 날(어제), 국립중앙과학관에 차를 세워 놓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박물관 개장 시간부터 매우 많은 차량이 입구로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은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특별전인 「푸른 세상을 빛다 고려 상형청자」를 둘러보았다. 원래 유료 전시지만 설날을 맞아 무료로 입장을 허용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낸 뒤 4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가끔 들르던 쟈니 덤플링에서 점심을 먹고 앤트러사이트(Anthracite)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 카페 1층에는 반려견을 끌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다른 카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2층에 올라와 보니 이태원을 지나는 멋장이들은 여기에 다 모이는 것 같다. 앤트러사이트는 무연탄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카페(로스팅샵이라고 해야 하나?) 이름으로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로스팅한 커피가 마치 무연탄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오래된 건물을 적절하게 리모델링하여 결코 과하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태원에 처음 왔을 때는 지금은 없어진 빌리엔젤을 자주 들렀었다. 2018년에 이태원 빌리 엔젤의 추억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리움. 고미술이 좋아진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일까? 나는 물고기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분청사기를 특히 좋아하지만, 귀얄기법을 쓴 것도 좋아한다.







우리 딸아이와 같은 도자공예 전공자를 한숨짓게 했을 커다란 항아리.



다시 400번 버스를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405번을 타고 말았다. 버스가 크게 회전을 하더니 잠수교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오, 이런... 일단 반포한강공원·세빛섬 정류장에 내렸다. 이곳에 인공섬이 세 개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언제 또 여기에 오겠는가 싶어서 세빛둥둥섬에 있는 카페에 들러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셨다.



이곳을 벗어나서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려니 마땅한 대중교통 이용 경로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기로 했다.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것은 서울 출신인 우리 부부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날씨가 몹시 춥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수교를 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역시  '서울'이란 선택받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는 것이겠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 모두가 여기에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아, 그렇지도 않구나. 어차피 수도권에는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살고 있지 않은가. 두 아이 중 하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절반은 성공한 것인가, 혹은 수도권 인구 집중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인가? 서울 출신 남녀가 만나 대전에 살면서 자녀 둘 중 하나를 서울로 보냈으니 인구 분산에 더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자녀 중 하나는 미국에 있으니.

서울이 부러운 것은 문화적 혜택 때문이다. 편리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누릴 수 있다. 의료 혜택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대전으로 돌아온 나는 갑천변을 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잠수교를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약간을 달려서 1월 달리기를 마감하였다. 조금만 달리면 90 km를 채우는 것으로 1월을 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뛰었으니 오늘은 가볍게 3 km만 채우고 싶었지만 아침에 빨아 놓은 운동화를 대신하여 고른 신발이 너무 불편하여 채 2 km도 달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달리기 반년째를 맞아서 가장 많은 거리를 달린 달이 되었다. 하루 걸러 하루씩 매번 6 km를 달린 셈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달에 100 km를 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페이스 단축은 달성하기 어려운 꿈이다!


2025년 1월 27일 월요일

미늘은 자연의 모방품인지도 모른다

낚싯바늘에서 '미늘'에 해당하는 구조를 영어로는 barb라고 한다. 철조망을 영어로 barbed wire fence라고 부른다. 파멜라 앤더슨 주연의 1996년 영화 '바브 와이어'가 생각이 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일은 없다.

어제 여수시 웅천동 바닷가를 달리면서 이순신 마리나 근처의 주차장을 지나게 되었다. 맨땅에 만든 주차장 가장자리의 잡초 군락을 두어 차례 건너뛰어 지나면서 총 8 km를 달린 뒤에 숙소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무릎 아래부터 바짓단 끝까지 무엇인가 하나 가득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운동화 끈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뜯어내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래 사진의 것은 바지 전체에서 뜯어낸 것의 아마 1/4 쯤일 것이다.



구글의 이미지 검색 기능을 이용하여 어떤 식물의 씨앗(종자?)인지를 찾아 보았다. 이것은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국화과의 야생식물로 도깨비바늘 종류 식의 열매인 것으로 추정된다. 도깨비바늘의 어린 잎은 나물로 먹거나 약용으로 사용한다. 확대해 본 열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포크 모양이다. 뾰족한 바늘 모양의 것('관모(冠毛, pappus)'라 함)은 원래 3~5개 정도 있다고 하는데, 아마 옷에 붙은 것을 떼어내다가 두 개만 남은 것 같다. 이 자료에 의하면 도깨비바늘에도 여러 종이 있다. 

관모의 또다른 극단에는 민들레 씨앗의 솜털 구조물이 있다. 따갑고 성가신 도깨비바늘 열매, 반대로 낭만적 감정을 자아내는 민들레 씨앗... 둘 다 식물의 생존을 위해 진화한 구조물인 셈이다.

도깨비바늘의 열매는 포크를 닮았다. 사진에는 두 날만 남았지만 실제로는 더 많다. 전체 길이는 약 1.5 cm 정도.


미끈하고 뾰족한 바늘로 찌르기만 해서는 동물의 털이나 사람의 의복에 붙기 곤란하다. 손으로 만져보니 반대 방향으로 아주 가느다란 가시와 같은 것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블로그에 업로드하기 위해 처리를 거치면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낚싯바늘에서 '미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늘은 낚싯바늘, 화살촉, 작살촉 등에서 널리 쓰인다. 낚싯바늘과 화살촉은 거의 비슷한 시기인 약 8천년 전에 발명되었다고 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이것이 박히면 잘 빠지지 않으므로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석기 시대에 미늘을 발명함으로써 큰 혁신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느 머리 좋은 선사시대인이 오랜 고민 끝에 생각해 냈을지도 모르지만, 도깨비바늘과 같은 자연물을 모방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당시에 돋보기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 구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모방하기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인류 최초 낚싯바늘이 불러온 혁신(2021년 12월 21일) - 결합식낚시(이음낚시)에 대한 설명은 여기를 참조해도 좋다.

나의 도메인명인 GenoGlobe가 표방하는 정신이 바로 '생명으로부터 배움(Learning from Lives)'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챗GPT에게 물어보니 이는 다소 모호한 영어 표현이라서 이보다는 "Learning from living beings" 또는 "Learning from living creatures"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생명체와 삶 전부를 아우르는 다소 중의적인 표현을 의도했으니 그냥 두어도 될 것 같다.








여수 밤바다에서 8 km를 달리다

여수시 웅천동의 밤바다를 헤집고 달려서 8 km를 채웠다. 한번에 달린 거리로는 최장 기록이다. 페이스는 부끄러워서 말할 수준이 아니다.


모처럼 길게 주어진 설 연휴를 맞아서 가족과 함께 여수 여행길에 올랐다. 작년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아이는 함께하지 못하여 아쉽다. 아마 올해 추석 무렵이나 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천공항은 연휴를 즐기러 출국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라고 한다. 우리 가족은 국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소박한 심정으로 국내 여행을 택하였다.

차를 몰고 여수로 가는 길에 어디를 들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진안 마이산을 택하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왔던 적이 있었다. 말 귀를 닮은 두 개의 산을 제외하면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방문객이 제법 많았고, 입구의 식당도 성업 중이었다. 네이버에서 리뷰를 검색하여 찾아간 식당도 나쁘지 않았다. 비빔밥과 불에 구운 등갈비의 조화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는 길에는 사양제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얼음이 얼어서 오리배는 한데 묶여 있었다. 마치 70~80년대의 유원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마이산은 남쪽과 북쪽 양 방향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고속도로를 벗어나기 전 진안 휴게소에서 마이산의 봉우리가 보여서 IC만 벗어나면 금방 다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마이산 탑사를 가기 위해 남쪽 방면에서 접근하려면 꽤 먼 길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탑사로 가능 약 2 km 남짓의 고즈넉한 길이 마음에 들었다. 북측 지역은 더 가파르다고 하였다.

이갑룡 처사(1860-1957)은 어떤 마음으로 탑을 쌓았을까? 탑사는 현재 태고종 소속 사찰이지만, 이갑룡 처사 자신은 불교를 표방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태고종에 사찰 등록을 한 것은 그의 손자 이왕선에 의한 것이라 한다.









비탈을 넘는 약간의 수고를 들이면 은수사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도 또 오겠노라는 생각을 담고 두 시간을 더 달려 여수 웅천동에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호텔 방에서 간편식으로 저녁을 먹은 뒤 달리기를 하러 바깥에 나갔다.


마리나 주변으로 평탄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달리기에는 정말 좋은 여건이었다. 몇 번을 오가며 달려서 8 km를 채웠다. 중간에 갑자기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페이스가 흐트려져서 6분대를 간산히 유지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행 이틀째인 오늘은 오동도와 돌산도를 둘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