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독서 기록 - 공부의 철학(지바 마사야)

2018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여수에 출장을 왔다. 둘째 날의 모든 학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 밀린 독후감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열었다. 참고로 나는 2 주 간격으로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5~6 권 정도 빌린다. 정해진 기한 안에 전부 읽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간혹 재미가 너무 없어서 끝까지 읽지 못하는 책도 있고, 간혹 시간이 부족하여 대출기간을 일주일 늘이기도 한다.

오늘 독후감을 적으려는 책은 젊은 일본인 철학자(1978년생)인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이다. 부제는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이다. 옮긴이는 박제이.


마치 90년대 아이돌을 연상시키듯 염색한 긴 머리를 한 그는 그러나 어엿한 대학 준교수(associate professor)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깊은 공부(radical learning)란, 세상과의 동조에 서툴러지는 것을 의미한다. 도입부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타자'를 소개하고, 유한과 무한의 대립, 언어의 불투명성에 대하여 논한다. 언어의 불투명성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조작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모든 공부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래디칼 러닝이란 곧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 언어유희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러니와 유머, 그리고 난센스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환경에 순응하는 코드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이러니, 코드에서 어긋나려고 하는 것이 유머이다. '이래야 한다(당위)'를 '이러한 코드다'라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을 '메타적 입장에 머문다'고 한다. 아이러니와 유머가 과잉 상태가 되면 극한 형태인 난센스가 된다.

아이러니는 원래 그리스어 eironeia에서 온 것이다. 이 말에 철학적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소크라테스이다. 이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아이러니(링크)>를 읽어보자.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자신의 현 상황을 메타적으로 관찰하여 자기 아이러니와 자기 유머의 발상으로 현 상황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고찰한다. 단 무비판적으로 무엇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결단주의는 피해야 한다. 아이러니의 비판성을 살려두면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이번에 같이 읽은 책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한다고 물으신다면(원제 How to be alive - a guide to the kind of happiness that helps the world; 콜린 배럿 지음)>에서 정형화된 삶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어떤 종류의 책을 골라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실전적인 면을 설명하였다. 되도록 여러 종류의 입문서를 비교하고, 교과서나 기본서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한다. 전체를 다 읽으려고 애쓰지 말고, '골라 읽기'도 독서의 한 방법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의 타임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에버노트와 같은 앱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책 제목만 보아서는 역시 일본인 작가인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쓴 <지성만이 무기다>(독서 기록)와 같은 독서 및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현대 (프랑스) 철학 입문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의 <철학 읽는 힘>(독서 기록)도 다시 기억해 두자.

지바 마사야의 저작으로 이보다 앞서 2017년 국내에 소개된 <너무 움직이지 마라>도 읽어보도록 하자.

2018년 6월 24일 일요일

수치화와 평가가 전부는 아니다

풍족한 간식, 그리고 평가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교육장의 모습이다. 교육도 일종의 서비스이므로 피교육자, 즉 고객에게 더 나은 인상을 줄 수 있는 노력을 제공자가 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당연히 평가서에는 좋은 점수를 쓸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금요일 직장에서 열렸던 연구역량강화 교육에 참여했었다. 요즘은 이런 교육을 제공하는 전문 기관이 생겨서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집합 교육에 참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현장에 와서 실시하는 집합 교육에 참여하기도 한다. 교육장에 들어가니 냉장식품이 든 스티로폼 상자가 여럿 보였다. 보통 물이나 커피, 쥬스와 과자 정도가 있는 정도인데 웬 냉장식품? 진행자가 상자를 열고 꺼내는 것은 일회용 용기에 담긴 생과일 쥬스와 아주 조그맣게 자른 티라미수 케익 등이었다. 오~ 이런! 이렇게 준비가 철저하다니! 나에게 감동이 밀려왔을까? 그건 아니었다. 물론 맛있게 먹기는 하였다. 하지만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회용 포장재는 다 어떻게 하고?

이렇게 길들여진 나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회의장이나 교육장에 가면 간식거리로 무엇을 주는지 기대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때문이다. 과도한 칼로리가 건강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물론이요, 간식을 담는 일회용 포장재의 환경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모바일 간식(혹은 음료)'에 대한 생각은 다음에 정리하여 글로 남기고자 한다.

그 다음은 평가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계량하지 못하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피터 드러커의 유명한 말이다. 강의 평가서를 받는다는 것은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지표로 삼기 위함이다. 매우 좋은 목적이다. 그러나 계량(평가)를 하려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올 봄에 며칠 동안 열리는 집합 교육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마지막 날 수료식을 마치고 강의 평가서를 작성해야 했다. 평가서 양식에는 약 10 사람의 강사 이름이 적혀있고 이에 대한 만족도를 여러 항목에 대해서 수치화하여 적어야 했는데, 강사 이름만으로 그 강의가 어떤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내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대충 평가서를 적어야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아예 평가서를 펼쳐놓고 강의를 듣기 시작하였다. 강의를 들으면서 즉시 평가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오히려 강의에 집중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의(교육)란 지식을 전달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평가서를 펼쳐놓고 강의를 들으니 마치 내가 강사의 강의 능력을 평가하는 면접장에 앉은 면접관이 된 느낌이었다. 교재는 잘 짜여졌나? 전달력과 강의 태도는 우수한가? 이런데 집중을 하면서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는 내용은 한 귀로 흘려듣게 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독자에서 문학 평론가의 입장인 척 하려니 오히려 책이 주는 정보와 감동에 집중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 평가서에 체크를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일년에 한 번 정도 학회 참석을 위해 국외 출장을 간다. 정부 연구비의 지원으로 다녀오는 것이니 출장 보고서를 남겨야 한다. 대충 작성하는 사람도 있고, 동행인 표시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작성한 보고서에 이름만 얹으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좀 더 꼼꼼한 편인 나는 충실한 보고서를 만들고자 강연 내용을 열심히 메모를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일이 너무 과도해서 정작 영화나 책을 보듯이 편안히 음미를 하지 못한다. 이 일은 '평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기록 행위 자체는 강의 평가서를 만드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전부 수치화하여 순위를 매길 수도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정서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가전제품 수리를 위해 서비스 센터를 다녀온 뒤 전화로 서비스 만족도에 대한 조사를 하고, 연말이 되면 공공기관의 인프라 부서는 고객만족도 평가를 한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정책을 펼치기 전에 여러 가지 형태의 설문 조사를 하는 일도 잦다. 대부분 설문지의 문항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있기 일쑤이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의 의도가 작용한다. 모 일간지에서 정례화한 대학순위평가라는 것도, 그 일간지의 인지도·사회적 영향력·발간 부수와 구독률(종이 신문을 별로 보지 않는 요즘은 의미가 없는 지수이지만)·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광고 수주를 높이기 위한 철저한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이 평가에서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한 대학의 노력은 좀 더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학교 본연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계량화와 평가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다 이렇게 처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자정(子正)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늦은 시간, 차를 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식당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식당에는 LED 광고판이 붙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영업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영업시간: 오전 12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아마도 영업주는 낮 12시에 문을 열어서 밤 11시에 닫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 12시는 24시 시간 체계에서 0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광판에 표시된 문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 가게는 밤 12시(자정)에 문을 열어서 하루 종일 영업을 하다가 23 시간째인 밤 11시에 닫습니다'는 말이 된다.

하루를 12시간 단위인 오전과 오후로 나눌 때, 나머지 시각은 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단위의 경계가 되는 12시는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문제가 된다.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에서 한 주의 시작이 무슨 요일인가를 다루면서 이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링크). 이에 의하면 하루에 두 번 있는 12시는 오전이나 오후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낮 12시, 밤 12시'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오전과 오후의 경계가 아니라 하루의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오늘 밤 12시'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오후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난 시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이 시각은 내일(의 시작) 아닌가? '자정'이라는 표현도 '날'과 결합하면 종종 혼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 과제의 온라인 제출 마감은 6월 20일 자정까지입니다.
그러면 6월 20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6월 20일 24시(=21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상식적으로는 6월 20일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난 밤 12시를 의미할 것이지만, 6월 20일 0시가 아니냐는 반론도 나올법 하다. 대법원 판례에서는 24시, 즉 하루가 끝나는 시점을 자정으로 해석한 것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동을 막기 위해 뉴스 등에서는 자정(=오전 12시), 오후 12시(낮 12시)이라는 표현 대신 철저히 24시 체계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자정이라는 낱말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정이라는 낱말이 만들어지고 쓰이던 시절에는 하루가 바뀌는 경계과 자정은 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대단한 결심을 했어. 오늘 자정을 기하여 실행에 옮긴다!
자정을 0시로 정의한다면 이 말은 넌센스가 된다. 이미 0시는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 자정은 하루가 끝나는 밤 12시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딴지를 걸자면 오늘 밤 12시는 이미 내일의 시작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한국 대 멕시코의 경기가 6월 24일 0시에 열렸다. 이를 예고하는 뉴스를 직접 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제(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비록 자연스런 표현이기는 해도 말이다.
오늘 밤 12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우리의 언어 현실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표현이다. 하지만 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내일(24일) 새벽 0시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이 글은 24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작성하고 있다. 이미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는 다 끝난 과거의 사건이 되었는데, 뉴스 앵커는 이 시점에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렸었죠'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오늘 새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자동차 보험을 새로 들었을 때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오늘(6월 24일) 계약을 체결했다면 밤 12시부터이다. 계약서에는 6월 24일 24시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결국은 같은 시간이지만 6월 25일 0시부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휴대폰 시계에서 자정에 날짜가 바뀌는 것을 보라. PM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나면 정확히 다음날 AM 12:00 (혹은 00:00)으로 표시되지 않는가? 시계의 표현 방식을 12시에서 24시 체계로 바꾼다 한들 24:00이 표시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현실 생활에서는 한밤중이라는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지만, 하루의 경계를 이 사이에 심어서 둘로 나누는 것이 불가피하니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어쨌든 자료 조사와 내가 가진 상식을 종합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쓸 것을 제안한다.

  • 12시에는 '오전' '오후'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고 대신 '낮 12시', '밤 12시'라고 한다.
  • '자정'에는 가급적 '날'과 관련된 표현을 붙이지 않는다. 대신 몇일 0시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 오늘 밤 12시는 사실은 내일이다 :)


2018년 6월 20일 수요일

로드 엔드 베어링(rod end bearing)은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인터넷이나 뒤적거리는 일반인의 지식 수준이 오죽하겠는가. 진공관 앰프용 트랜스포머 권선기를 만들면서 회전축을 지지하기 위한 적당한 물건을 찾다가 지난 5월 하순에 로드 엔드 베어링을 알리익스프레스에 주문하여 오늘 받았다. 고정된 축이 자유롭게 회전하는 그런 베어링을 꿈꾸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응? 뭐가 이렇게 뻑뻑하지? 내가 상상하는 용도가 아니었나? 다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이 베어링은 축의 회전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일정 각도 이내에서 축이 자유롭게 꺾일 수 있게 하면서 축을 단단히 지지하는 물건이었다. 유튜브에서 캡쳐한 다음 사진을 보자(원본 링크). 이것은 비행기의 보조익을 움직이는 봉 끝에 쓰인 사례이다.


그냥 흔한 몇백 원 짜리 미니어쳐 베어링이나 살 것을... 

그림 출처: 베어링샵. 제품명은 미니어쳐베어링 일반형 내경 6~9mm이다.


2.14 달러 낭비했다. 이렇게 배워가는 것 아니겠는가. 

2018년 6월 17일 일요일

독서 기록 - <예술가로 살만합니다> 외 다섯 권


예술가로 살만합니다

  • "우리 동네 예술가들과 작업 이야기"
  • 이상진 글·그림
예술을 생업으로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장래의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딸아이를 보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학교에 들어간다 해도 졸업 후에 원하는 일을 하면서 과연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지은이 이상진은 드로잉 작가와 그림선생님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살고 일하는 연남동 주변의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 그들의 솔직한 모습을 그림과 글로 담았다. 수제화 공방, 1인 미용실, 음악 스튜디오, 도자기 공방 등 그 범위도 매우 다양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꿈을 꾸는 자에게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체로) 길이 열린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괄호 안의 글에 담긴 의미가 무겁지만 말이다. 특정 지역이 이슈화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샵을 내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지만,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서 처음에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 점점 올라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결국은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해당 지역의 모습이 점차 삭막해져가는 일이 되도록 벌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링크는 바로 다음의 책 <무용지물 경제학>의 주장과 연관지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임대료가 아니라 권리금이다

무용지물 경제학

  • "정통경제학의 신화를 깨뜨리는 발칙한 안내서"
  •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 조홍식 옮김
수요와 공급의 법칙, '보이지 않는 손', 경쟁과 효율의 추구, 모든 경제 주체들이 이기적인 동기로 움직인다는 것, 심리학과 경제학이 뒤범벅이 된 요즘의 이론... 현대 경제학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현실을 이해하자는 취지를 한참 벗어나서 이제는 '이러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계를 움직이려 한다. 법칙을 더욱 손질하고 난해하게 만듦으로써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저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1.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바보다.
  2. 완전경쟁에 가까울수록 세계는 더욱 비효율적으로 변한다.
  3. 교환가지가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라 비화폐적이고 호혜적인 행동이 발전을 이끈다.
342쪽부터 나오는 로빈스 크루쏘우와 프라이데이의 국민생산 모델(toy model)은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기회가 된다면 브뤼노 방뜰루(Bruno Vebtrlou)가 제시했던 원본 글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유엔을 말하다

  • 장 지글러(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지음 | 이현웅 옮김
이번에 읽은 여섯 권이 책 중에 불편한 현실을 가장 잘 일깨워준 책이다. 장 지글러는 학자이자 활동가로서 <왜 세계의 절만은 굶주리는가>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유엔 이전 존재했던 국제연맹이 무력하게 사라졌듯이 유엔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과 기아, 빈곤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적 조직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물론 현재의 유엔이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엔이 형성된 과정, 운영 방식, 미국의 영향력과 공작, 상임이사국이 행사하는 거부권의 문제점 등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하였다.

특히 5장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관심있게 읽었다. 
다자 외교에 견주어볼 때, 키신저는 제국주의적 이론과 전략을 육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제국주의 이론의 바탕에는 이러한 가정이 있다. 제국의 정신적인 힘,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 법적 의지, 사회 조직은 안정을 보장한다. 제국만이 국가, 국민, 대륙 사이의 평화를 지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히 말한다면 미국이 신으로부터 민주주의와 문명을 전파할 임무를 부여받았을 거라는 이런 메싱적 이데올로기는 아직까지도 낡은 것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키신저는 이 책에서 왜 미국이 핵폭탄을 자유롭게, 그리고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정당한 권한을 가진 세계 유일의 국가인지 설명한다... 국제법, 인권, 국제인도법의 기준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는 전범이다. 나아가 그의 세대에서도 가장 악한 전범 중 한 사람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키신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들의 주동자였고, 당시에 그 대륙에서 성립된 폭력적인 독재 체제들의 가장 충실하고 능력 있는 보호자였다. 
156쪽부터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과정과 그 배경을 다루고 있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

  • "권태호 묻고 유종일 답하다"
  •  유종일(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이사장)과 권태호(한겨레 논설위원)의 대담집
촛불시민혁명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급기야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철학과 정당성·도덕성이 없는 정권이 한 국가의 역사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후퇴시켰고, 이를 청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이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압축 성장만의 신화를 좇던 과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약에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1. 투자라는 이름의 마약 - 자본과잉 시대의 투자 방향 전환
  2. 환율 마약 - 수출주도 아닌 소득주도 성장
  3. '빨리빨리 마약'과 혁신성장 - 여유가 있어야 '유레카'가 나온다
  4. '찍기'라는 마약 - '선택과 집중'을 넘어 '백화제방, 백가쟁명'으로
새 정권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하여 비정규직 철폐·최저임금인상 등을 주요 정책으로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고용지표와 같은 현실적인 경제 수치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이에 대하여 자유주의적 경제론자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고, 경제 지표를 측정하여 이를 평가하는 데에는 현 대통령의 임기 내에는 어려울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약자를 배려하며 경제적 체질 개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위험한 요리사 메리

  • "마녀라 불린 요리사 '장티푸스 메리' 이야기
  •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 곽명단 옮김
아일랜드 이민자였던 메리 맬런(Mary Mallon, 1869~1938)은 강건한 신체에 자존심이 높고 지적 욕구도 높은 가정 요리사였다. 그런데 그녀가 일했던 집에서 연쇄적으로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하였다. 세균이 감염병이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보건 위생에 대해서 제도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던 시기였지만 아직 항생물질은 발견되기 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메리는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장티푸스 균을 퍼뜨리는 보균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유일한 건강 보균자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 추적 끝에 붙잡혀서 격리시설에 수용되어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황색 저널리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실명이 공개된 채로 자극적인 그림(요리하면서 내쉬는 숨에 해골이 그려짐)과 함께 장티푸스를 퍼뜨리는 마녀처럼 취급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 것이다. 고용된 가사 노동자로서의 평범한 삶이 완전히 파괴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그녀가 보건 당국에 조금만 더 협조적이었다면 조금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리는 자기 삶은 직접 제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남의 개입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공적이 권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녀가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요리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보균자로서 아무리 개인 위생에 조심을 한다 하여도 요리사라는 직업을 이어 나갈 수는 없다. 당시 사회는 이러한 개인에게 다른 직업을 갖도록 재교육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강제 수용 중인 그녀에게 장티푸스 균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생제가 없던 시절 수술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 효과도 확신할 수 없었으며, 메리 자신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저자가 지은 <검은 감자(아일랜드 대기근 이야기)>도 읽고 싶어졌다.

별난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 코드

  •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배우는 경제학"
  • 청스 지음 | 임보미 옮김

2018년 6월 16일 토요일

6월의 일상


자전거 타이어용 펌프로도 자동차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다. 공기압은 로드 자전거용 타이어에 비하면 훨씬 낮지만 워낙 많은 양의 공기를 넣어야 하기에 2-3 주에 한 번씩 이렇게 바람을 넣다 보면 등허리가 뻐근하다. 타이어는 아직 교체 주기가 되지는 않았으나 천천히 공기가 빠지는 증세를 앓고 있다. 카센터에서 비눗물을 칠해가며 점검을 몇 차례 하였지만 공기가 새는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니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공기를 채울 수밖에... 매번 차에 오르기 전에 타이어의 상태를 확인하는 버릇이 든 것은 좋은 일이다.


알라딘에서 구입한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의 음반. '형제들(Fratres)'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구입한 패르트의 음반이다. 이번에 구입한 음반에 수록된 곡은 Tabula Rasa, Collage über Bach, 그리고 Symphony No. 3이다. Tabula Rasa는 '깨끗한 석판(위키)'을 의미한다.  깨끗한 석판 또는 빈 서판은 철학 이론으로도 매우 잘 알려진 용어이다.

패르트의 음악은 간결하고 느리며 서정적이다. 명상을 위한 음악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패르트의 음악에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그의 신앙적 바탕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현대음악이라고 하면 마치 복잡한 수학 공식처럼 난해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박테리아 유전체에서 재조합(recombination)의 흔적을 찾기

내가 생각하는 진화라는 것은 결국 유전체 서열의 변화가 표현형으로 나타나고,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개체의 빈도가 집단 내에서 늘어나는 현상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적합도(fitness)가 낮아진 개체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박테리아의 진화라고 하면 단일 염기서열 수준에서 일어나는 염기치환변이 또는 indel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동유전자 서열을 여러 종에서 모은 다음 다중서열정렬을 해 보면 기준 종에서 먼 것일수록 염기서열의 차이가 더 크게 나타난다. 이러한 염기(서열)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DNA polymerase의 실수, radiation으로 손상된 염기의 불완전한 수복, DNA의 double-strand break가 일어난 뒤 일어나는 error-prone repair 등 다양한 메커니즘이 있지만 교과서를 쓰고자 함이 아니니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다.

실제로는 이보다 과격한(?) 유전체 변이가 더욱 빈번하게 벌어진다. Insertion sequence의 삽입이라든가 prophage의 침입 등이 그러하다. Horizontal gene transfer도 많은 연구자들의 흥미를 끄는 주제이다.

그런데 (homologous) recombination에 의해서 외부의 유전자(일부, 전부 혹은 클러스터)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하게 된다. Recombination, 즉 재조합이란 기원이 다른 DNA 조각이 서로 교차하여 새로운 혼성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ds DNA 가닥이 끊어져서 서로 근본이 다른 것끼리 연결되는 것이다. 재조합이 일어나는 정도는 미생물 종마다 매우 다르다. 결핵균처럼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 '조용히' 서식하는 것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적지만, 자연적인 transformation이 가능한 세균으로서 자유롭게 바글거리며 사는 세균은 그 빈도가 매우 높다.

Recombination은 계통발생학 분석을 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수십 종의 미생물 유전체 서열로부터 multiple sequence alignment를 공들여 얻은 뒤 phylogenetic tree를 그리는 것이 요즘 genomics를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일인데, 유전체 상의 특정 block이 재조합에 의해서 '훌러덩' 유입된 것이라면 족보를 그리는 일이 아주 까다로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조합의 검출하는 일 역시 매우 어렵다.

Homologous recombination을 검출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은 Xavier Didelot의 ClonalFrame이 그 시초가 아닐까 한다(Inference of bacterial microevolution using multilocus sequence data. Genetics 2008, PMC 링크). 이것은 원래 mltilocus sequence 데이터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녹색은 mutation, 빨강색은 recombination. 
이후 수백 개의 genome sequence를 다룰 수 있는 도구가 등장하면서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졌고, 요즘 유행인 베이지언 기법을 이용한 것도 등장하게 되었다. 임상에서 분리한 Streptococcus pneumoniae의 대규모 유전체 분석을 통하여 recombination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남을 밝힌 선구적인 논문이 이미 2011년에 Science에 게재된 바 있다.

Rapid pneumococcal evolution in response to clinical interventions. Science 2011 331:430 PubMed 링크

치료 중인 환자에게서 분리된 감염균은 살아남기 위하여 온갖 전략을 구사한다. 그 중의 하나는 항원으로 작용하는 capsule의 스위칭을 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recombination이 크게 기여한다는 것이다. 물론 recombination을 검출하고 멋지게 그림을 그려주는 도구는 이 논문 이후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안다. 당시에는 SNP의 density를 이용하여 recombination이 일어난 곳을 추정하였었지만 지금은 훨씬 세련된 통계학적 추론을 이용하는 도구도 있다. 아래 그림의 오른편에 보인 heatmap에서 빨강 블록으로 표시된 것이 바로 재조합이 일어난 곳이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648787/figure/F1/
요즘 내가 테스트하는 것은 Sanger Institute에서 개발한 Gubbins이다(링크). 2014년 Nucleic Acids Research에 'Rapid phylogenetic analysis of large samples of recombinant bacterial whole genome sequencing using Gubbins(링크)'라는 논문으로 발표가 되기도 하였었다.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데이터셋은 바로 위에서 소개한 Science 2011년도 논문의 것을 사용하였다(PMEN1 dataset 링크).

Gubbins를 실행하려면 FASTA 형식의 whole genome alignment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게 뚝딱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먼저 고려할 것은 raw sequencing read에서 시작할 것인가, 혹은 assembled sequence에서 시작할 것인가이다. 처음에는 Roary(assembly 필요)가 만들어내는 core gene alignment를 활용할 생각을 했었으나, 이것은 유전자들을 concatenation한 것이다. 따라서 gubbins 분석이 끝난 뒤 재조합이 일어난 부위의 유전자를 찾으려면 별도의 파일(core_alignment_header.embl)을 참조해야 한다. 이것은 상당히 성가신 일이다. Reference의 좌표에 맞추어서 각 alignment를 배열하고 그 사이에 gap('---')을 넣은 파일이 필요한데 말이다.

Harvest suite의 parsnp를 사용하면 유전체 서열에서 유래한 alignment가 나오지만 이것 역시 concatenated sequence이다. Gubbins가 딱 필요로하는 형태의 FASTA alignment 파일을 만들 방법이 없는지 구글링을 반복하다가 Snippy라는 도구를 찾았다. 이것은 raw sequencing read뿐만 아니라 contig도 사용할 수 있으며, .aln(core SNP alignment)과 .full.aln(whole genome SNP alignment including invariant sites)를 생성해 주므로 후자를 gubbins에 투입하면 된다. 하지만 막상 설치를 하니 에러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첫번째 에러에 대해서는 개발자 사이트에 이미 보고가 되어 있었고(error with gbk #154) 임시방편으로 버전을 낮추어 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했더니 vcflib의 위치와 관련한 에러가 또 발생하여 freebayes-parallel 스크립트의 40번째 줄을 고치는 수고까지 해서 겨우 성공적으로 실행을 하였다. Snippy 설치 이력에 대한 정보는 별도의 글로 상세하게 작성해 보고자 한다.

2018년 6월 14일 목요일

ANI 분석에 의한 잘못된 종명 바로잡기 - NCBI

NCBI에 유전체 서열을 등록할 때에는 여러 가지의 quality control process가 진행된다. Contig의 수가 너무 많거나 그 길이가 지나치게 짧지는 않은가? 200 bp 미만의 contig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Vector나 adaptor, 혹은 일루미나 시퀀싱 장비를 구동할 때 control로 들어가는 phiX174 서열은 섞여있지 않은가? Species 명칭은 올바른가?

이런 사전 점검 프로세스를 거쳤다 해도 균주의 species 명칭을 잘못 붙인 것에 대한 점검은 오로지 제출자의 몫이었다. 천랩의 EzBioCloud에서는 다른 어느 유전체 서열 데이터베이스보다도 빠르게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은 상태였다. 즉 특정 종의 type strain에 대한 유전체 서열이 이미 공개된 상태라면, 등록된 다른 미생물 유전체의 서열을 이것과 대조하여 ANI(average nucleotide identity)에 기반한 종 동정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용자 Bacillus amyloliquefaciens라는 이름을 붙여서 유전체 서열을 등록했고 NCBI에서도 이 정보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EzBioCloud의 genome 항목에서는 자체 동정 결과에 의하여 Bacillus velezensis라고 명명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시퀀싱이 된 type strain이 점차 증가하면서 NCBI에서도 'submitted organism name'이 맞는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수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새벽에 NCBI에서 받은 이메일에는 과거에 내가 Bacillus endophyticus의 스트레인이라고 등록한 유전자를 Bacillus filamentosus로 변경할 예정이니 이것이 옳지 않다는 합리적인 증거를 2주 이내에 제시하지 않으면 WGS는 물론 BioSample과 BioProject도 업데이트가 될 것이라 하였다.

실제로 이런 과정이 적용된 WGS 엔트리 하나를 살펴보자. 이는 안내 메일에 소개된 것이다.

https://www.ncbi.nlm.nih.gov/nuccore/JWAI00000000.1/


늘 접하던 ###Genome-Assembly-Data### 블록 위에 ###Taxonomic-Updated-Statistics###라는 블록이 새로 생겼다. 원래 Bifidobacterium longum이라는 이름으로 제출이 되었던 유전체 정보 기록이지만, ANI 분석에 의하여 Alloscardovia omnicolens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RefSeq이 아니라 GenBank 엔트리임에 유의하자. 

이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3만개가 훌쩍 넘는 유전체 정보를 전부 점검하여 일괄적으로 변경을 하는 것인지, 점진적으로 점검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제출한 유전체 서열과 cutoff 기준을 만족시키는 sequenced type strain이 아직 없다면, submitted name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메일에서 소개한 관련 논문 두 가지도 인용해 본다.

Meeting report: GenBank microbial genomic taxonomy workshop (12-12 May, 2015). Stand Genomic Sci (2016 ) PMC

Using average nucleotide identity to improve taxonomic assignments in prokaryotic genomes at the NCBI. Int J Syst Evol Microbiol (2018) PubMed

그림 1. ANI process workflow for processing of pre-submission genomes.
출처: 두번째 논문(Int J Syst Evol Microbiol)

2018년 6월 11일 월요일

LinkedIn을 탈퇴하다

나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가입이 되고, 메일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지메일에서는 현명하게도 광고성 메일은 '프로모션' 항목에, 인맥 관련 메일은 '소셜' 항목으로 자동 분류해 주어서 번거로움을 덜어주고는 있다.

링크트인(LinkedIn)에서는 수시로 이메일 메시지가 날아온다. 누가 새로운 1촌이 되었으며, 누가 연락을 보냈으며, 새로운 직장으로 갈 수 있는 어떤 기회가 생겼으며... 마치 내가 인터넷 상의 정보의 바다에서 전세계의 사람들(주로 직장 혹은 비즈니스와 관련이 있는)과 연결이 되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실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네트워킹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는 카카오톡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2011년 네이버에서 쓰던 내 블로그(지금은 백업 후 전부 삭제)에 몇 가지 소셜 서비스가 성격에 맞지 않아서 탈퇴한다고 글을 썼더니, 뜬금없이 이런 댓글이 붙었다.
제 생각으로 님은 사회부적응자 외톨이시군요... 좀 안스럽네요...
카카오톡을 쓰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글도 종종 보인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의 삐딱한 시선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휴대폰을 하릴없이 들여다보면서 다른 사람이 어떤 글과 사진을 올렸는지, 내가 올린 것에 사람들이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모니터링하는 것도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고민하고 공부하고 나누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열린 개인공간(블로그 처럼)에 꾸준히 기록을 할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기억을 돕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기쁨이리라.

주말에 이틀 정도 고민을 한 뒤 링크트인을 탈퇴하였다. 나의 일촌(몇 명 되지 않는다) 혹은 일촌 후보들에게 '정해영님이 LinkedIn을 탈퇴하였습니다'라는 소식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회원이 합류하여 일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메일을 날릴 뿐이다. 필요하다면,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직접 인맥을 찾겠다.

2018년 6월 10일 일요일

여권 사진을 찍으며

9월에 다녀올 국외출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권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였다. 이제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다시 만드는 것은 신규 발급과 같이 취급하는 것 같다. 여권 재발급은 유효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수록 정보의 정정 및 변경, 여권 분실, 훼손, 사증란 부족 등의 이유료 여권을 다시 발급받는 것을 뜻한다.

여권 발급에 필요한 구비서류는 여권발급신청서, 6개월 이내 촬영한 여권용 사진 1매, 신분증이다(외교부 여권안내 홈페이지 링크).

휴대폰으로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는다 해도 증명에 필요한 개인 사진은 사진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관에서 내 사진을 찍은 것이 언제였을까? 꼭 10년 전 여권을 다시 만들 때, 그리고 2011년 승진을 하면서 출입증을 재발급 받을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여권 사진을 찍기 위하여 근처의 사진관을 찾았다. 세 컷 정도를 촬영한 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한 다음 그자리에서 보정을 완료하여 총 8 장의 사진을 넘겨받았다. DSLR로 찍은 내 얼굴을 컴퓨터 모니터로 상세하게 펼쳐보니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것이 약간 슬펐고, 생각보다 촬영 후 보정 작업을 많이 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약간 뻗쳐나간 머리카락,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 어깨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촬영 전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정리할 필요도 별로 없다고나 할까. 촬영을 할 때 가장 나에게 주문한 것은 고개의 각도와 표정 정도였다. 나머지는 보정으로 해결 가능하니까 말이다.

'고개의 각도'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항공기에서 흔히 쓰는 용어인 롤링(rolling), 요잉(yawing), 그리고 피칭(pitching)으로 나누어 보면 된다. 얼굴을 정면에서 후면으로 관통하는 선을 x 축, 얼굴을 촤우로 관통하는 선을 y 축, 그리고 이에 대해 수직으로 위치한(즉 목뼈의 방향) 선을 z축이라 하자.
  • 왼쪽으로 갸우뚱하게 해 보세요(x축에 대한 회전) - 롤링
  • 오른쪽으로 돌려보세요(z 축에 대한 회전) - 요잉
  • 고개를 좀 들어보세요(y축에 대한 회전) - 피칭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링크)

자기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진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거울로 자기의 모습을 보아도 어느쪽으로 머리가 기울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단, 피칭의 정도는 다른 사람이 옆에서 봐 주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근골격계 질환이 있거나 늘 바르지 못한 자세로 있는 것이 습관화된 상태라면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축에 대해서 머리가 돌아가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세 컷의 사진 중에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하나 고른 다음 실제 보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였다. 사진사는 보정하는 과정을 옆에서 그대로 지켜보게 하였었다.
'나중에 오세요' 혹은 '잠시 차 한잔 하시면서 기다리세요' 하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게 하는 것은 작업자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을까?
사진을 촬영하면서 고객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보라고 주문하는 것과, 사진 촬영을 한 뒤에 수정하는 것 중 사진사는 어느 것을 더 선호할까?
주름이나 잡티를 제거해 주는 정도는 모르겠지만, 증명을 목적으로 하는 사진에서 윤곽을 수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사진은 정말로 현실의 기록인가? 우리는 사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현실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의도하지 않았었지만 정성들여 준비한 뒤에 찍은 2018년 6월 나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출력트랜스를 만들 자재를 준비하다

R 코어와 에나멜선, 그리고 보빈이 전부 갖추어졌다. 에나멜선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승리케이블에 주문하여 택배로 받았고, 보빈은 30 ml 주사기(그린젝트-30)의 실린더를 길이 32 mm로 자른 것이다. 작업할 때 공작물을 고정하여 두 손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 얼마나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실톱으로 주사기 실린더를 자르는 간단한 가공에서도 왼손으로는 작업물을 지지하고 오른손만으로 톱질을 하려면 상당히 어렵다. 이제는 공작용 소형 바이스를 하나 장만할 때가 되었다.


정작 트랜스포머 코일을 감을 때 필수적인 도구인 권선기는 아직 만들지 못하였다. 권선기에 들어갈 카운터(아래 사진)는 이미 구입하여 놓았지만 베어링이나 커플링 등 구동부의 핵심 부품이 아직 배송 전이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서 보인 디지털 카운터는 자기장에 반응하는 홀(Hall sensor)를 이용한 것이다. 회전하는 물체에 자석을 붙여서 한번 회전할 때마다 센서 근처를 지나가게 하면 수치가 하나씩 올라가는 것이다. 단, 역회전인지 정회전인지는 알지 못한다. 완전 수동식 코일 권선기는 잘못 감은 것을 반대로 돌려서 풀어내면 이에 따라서 회전수도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이 카운터를 사용하면 앞으로 감으나 뒤로 풀어내나 똑같이 카운트 수치가 올라가므로 조심해야 한다. 

다음 주 중에는 필요한 부품을 전부 구해서 늦어도 주말에는 보빈에 에나멜선을 감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미세먼지에 쫓겨서 급히 되돌아온 주말 전주 나들이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때에는 두 번을 방문하여 영화의 거리와 객사길 언저리만 돌아다니다 돌아왔었다. 한옥마을의 북적이는 분위기를 다시 즐기고 싶어서 어제 토요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다시 전주를 찾았다. 치명자산 임시주차장과 한옥마을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그렇게 많이 탔었는데 기사분이 전주관광지도("한국 전통문화의 중심 전주여행지도")를 나누어주며 안내 방송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전주여행지도에서는 테마별로 총 다섯 곳의 권역을 소개하였다.

  • 덕진권역: 역사와 문학이 담긴 생태문화 명소
  • 아중호수권역: 해질 무렵 야간경관이 아름다운 곳
  • 서부권역(신도심): 젊음의 낭만이 시작되는 거리 명소
  • 한옥마을권역: 처마 밑으로 전해오는 전통의 향기
  • 전주부성(원도심)권역: 조선시대, 근대 전주옛길, 객사길(객리단길)을 찾는 곳

동전주 IC로 빠져나오는 길목에 위치한 아중호수가 늘 눈길을 끌었었는데 이 지도를 보니 저녁무렵에 한번 들러서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졌다.

마침 시간이 맞아서 경기전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링크). 변함없이 방문객으로 북적이는 전동성당에서는 결혼식을 막 마친 부부가 성당 앞 계단에서 하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늘 즐겨찾는 JB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객사쪽으로 가 보려고 밖으로 나섰는데 바람이 심하고 공기는 너무나 뿌옇게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다음의 화면 캡쳐는 오늘(일요일)의 상황인데 어제는 이보다 조금 더 나빴었다. 아마 153~156 정도였을 것이다. 대전, 군산, 논산, 김제, 공주 등 주변 지역을 다 검색해 보았지만 전주가 가장 대기 질이 나빴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빗방울도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여 서둘러 대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고속도로로 접어들어서 이동하기 시작하니 뿌옇던 주변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고 먹고 즐길 거리가 많아도 이렇게 대기의 질이 나쁘면 소용이 없다. 한국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먼지는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이고, 우리의 노력으로 과연 이를 줄일 수 있는 것일까? 선택의 여지가 이렇게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2018년 6월 6일 수요일

원핵생물의 분류학을 위한 유전체 데이터의 최소 기준 제안

오늘은 올 초에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하나 소개해보려 한다.

Proposed minimal standards for the use of genome data for the taxonomy of prokaryotes. Int J Syst Evol Microbiol 2000; 68:461-466 PubMed PDF 파일

흔히 IJSEM이라고도 줄여서 부르는 학술잡지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and Evolutionary Microbiology"는 미생물의 분류학을 다루는 전문지이다. 새로운 분류군을 보고하고 분류학의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단순히 미생물이라고 하면 무척 다양한 생물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서 광합성을 하는 단일세포 생물인 클로렐라도 넓은 의미의 미생물에 속한다. 그러나 IJSEM은 세균(bacteria)과 효모(yeast)만을 다룬다. 이 글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미생물은 핵이 없는 원핵생물(prokaryote), 즉 박테리아(세균)를 뜻한다. 엄밀히 말하면 고세균(archaea)도 원핵생물의 한 부류이지만 말이다.

신종으로 공인이 되려면 이에 대한 표준 균주(type strain)를 공인 균주 은행 최소 두 곳에 이를 기탁하여 균주 번호를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전북 정읍 소재 생물자원센터(KCTC, Korean Collection for Type Cultures 링크)가 있다. 균주 번호 끝에 윗첨자 T(혹은 괄호를 둘러친 T)가 있다면 이것은 그 종의 표준 균주임을 뜻한다.

박테리아는 형태적으로 비교적 단순하여 그 모습을 보고 분류를 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형태적 특성 외에도 분석적 방법(지질 분석, 전체 세포 단백질 분석)과 유전적 방법(G+C 비율, DNA sequence...)을 총동원하게 된다.

두 생명체가 같은 종에 속하는지를 판별하는 문제 역시 박테리아에서는 쉽지 않다. 다른 생물에서는 서로 교배를 해서 생식 가능한 자손을 낳을 수 있으면 동일 종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유전물질을 서로 1:1로 교환하는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없다(파트너에게 유전물질의 일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과정은 있다). 그러나 두 개체 혹은 두 집단이 동일 종에 속하는지를 판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기준은 DNA-DNA hybridization(DDH)을 하여 70%를 넘는 similarity가 나오면 동일 종으로 판별한다는 것이다. IJSEM에 새로운 미생물 종을 보고하려면 여러 특성을 조사하는 것 외에 알려진 다른 종의 표준 균주에 대하여 DDH가 70% 이하로 나와야 한다. 문제는 이 실험 기법이 숙련되기가 어렵고 재현성도 높지 않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실험을 해 본 적도 없고, 이 실험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한 적도 없다. 신종 미생물 등록 실적에서 세계 1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균관대 윤정훈 교수가 근처에서 근무할 때 구경이라도 한번 할 것을 그랬다.

상황이 이러하니 과거에 부정확한 DDH 실험 결과를 가지고서 신종으로 보고했던 미생물이 나중에는 이미 알려진 종과 같은 것이라는 논문(A is a later heterotypic synonym of B...)이 종종 발표되는 것이다. 이제는 NGS를 통해서 genome sequencing을 누구나 싼 값에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까다로운 DDH 실험을 할 필요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DNA 간의 유사도는 결국 염기서열 배열 정보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유전체 DNA를 읽어서(이 과정은 철저히 표준화가 되었고 오차나 재현성의 문제가 거의 없다) 서로 비교하면 DDH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16S rRNA gene sequence도 균주 동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표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이 98.7% 보다 같거나 높으면 두 균주가 동일한 종인지 혹은 아닌지를 알기 어려워서 DDH 실험을 해야만 했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 소개하는 논문에서는 이러한 유전체 데이터를 원핵생물의 분류학에서 쓰고자 할 때 준수해야 할 최소 기준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직 IJSEM의 논문 투고 요령에는 신종 보고 논문을 투고할 때 반드시 유전체 시퀀싱을 완료하여 공개하라는 요구사항은 없지만 시퀀싱에 드는 비용이 점점 낮아지는 추세이므로 이것이 포함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 미생물 유전체 해독 서비스를 주업무로 하는 천랩에는 이에 대한 문의와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연구자들이 과거에는 하지 않던 일을 새로 해야 하니 부담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고, 남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확한 미생물 신종 보고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유전체 해독을 하면서 해당 종의 표준 균주 유전체 정보가 부족하여 애를 먹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가 이 논문의 취지를 받아들인다면 천랩으로서는 더욱 사업이 확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논문의 저자 중 천랩의 중요 관계자가 있다는 것은 애교로 봐 주자.

두 미생물 유전체의 similarity 혹은 distance를 산출하는 프로그램은 꽤 많은 종류가 있다. 이를 통틀어서 OGRI(overall genome related index)라고 하며, 오늘 소개하는 논문의 표 1에 OGRI 계산 도구를 소개하였다. 가장 널리 쓰이는 수치인 ANI(average nucleotide identity)는 95~96%일 때 DDH 70%에 해당한다. ANI의 이론은 단순하지만 실제 구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유전체를 일정 길이로 잘라서 쓸 것인가 혹은 유전자 영역만 추출하여 쓸 것인가? Sequence alignment에는 blast를 쓸 것인가 또는 mummer를 쓸 것인가?

OGRI는 종 수준의 판별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subspecies와 genus(혹은 그 상위 레벨)의 판별에 대해서는 아직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림 1. Workflow of genome based classification at the species level. To recognize new genera, phylogenomic treeing should be used.
출처: http://ijs.microbiologyresearch.org/content/journal/ijsem/10.1099/ijsem.0.002516#tab2


그러면 논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minimal standard"가 무엇인지 나열해 보자.

  1. DNA sequencing platform: 무슨 장비를 사용하였는가?
  2. Quality of raw NGS data and assembled genome sequences: Genome size, the number of contigs and N50, sequencing depth of coverage
  3. Authenticity of the genome assembly: genome assembly에서 발견된 16S rRNA gene sequence를 실제 보고된 유사종의 그것과 맞추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려진 종과 너무 유사하여 16S rRNA 서열이 너무나 비슷하다면, gyrB, rpoB, recA와 같은 단백질 코딩 유전자 서열을 사용하라.
  4. Contamination in the genome assembly

4번의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범주는 약간 다르지만 샘플 표지를 잘못하였거나 균주 자체를 잘못 동정한 상태로 만들어진 유전체 어셈블리를 GenBank에 올리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일루미나의 시퀀싱 키트에 포함된 phiX174 콘트롤 DNA가 시퀀싱되어서 최종 결과물에 남는 일도 요즘 종종 발견된다. 원래 정상적인 겨우 이 서열 정보는 최종 결과에는 남아서는 안된다.

미생물 분류학은 자유로움보다는 엄격한 기준 준수를 요구하는 독특한 학문 분야이다. 공인되지 않은 종 이름은 사용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생물계에서는 '오늘부터 나는 너하고 다른 species이니 그리 알아라'하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연세계를 대상으로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형태를 구분하여 무리를 짓고 편을 나누는 것이다. NGS라는 새로운 기술이 보급되어 미생물 분류학도 이렇게 변화해 나가고 있다.

2018년 6월 2일 토요일

독서 기록 - <말이 칼이 될때> 외 세 권


말이 칼이 될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 홍성수 지음
좋고 싫음에 대한 생각을 갖고 이를 표현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를 발화(發話)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어떠한 선동과 폭력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는 강력하게 제지해야만 한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연구용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혐오표현을 차별적 괴롭힘·편견 조장·모욕·증오선동의 네 가지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표현의 모든 면을 현실 세계에서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혐오표현의 가장 큰 목적은 선동이므로, 이를 막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저자는 '대항표현'을 제시하였다.

바나나 제국의 몰락(Never out of season)

  • "풍요로운 식탁은 어떻게 미래 식량을 위협하는가"
  • 롭 던 지음 | 노승영 옮김
제철 과일의 개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다. 여름에나 맛보던 농산물을 일년 내내 마트에서 접하는 것을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농산물이 멀리 몇천킬로미터 혹은 그 이상을 이동하여 우리의 식탁에 올라온다. 소비자의 기호, 자동화된 대규모 농업, 그리고 규격화된 유통 현실에 맞추어 생물종 본래의 다양성은 전부 자취를 감추고 한 가지 품종만 재배하고 소비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이는 무슨 문제를 야기하는가? 서양 열강에 의해 현지의 농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소비할 작물을 강제로 재배하게 만든 과거 식민지시대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저개발 국가의 정치·경제적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일 품종 위주의 재배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병충해가 발생할 경우 그 작물은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농산물로써 책의 표지를 장식한 바나나가 그러하다. 19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감자역병 역시 한 가지 작물에 의존하는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이러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원산지에 남아있는 다양한 품종을 지키고, 현지에서 전해내려오는 전통지식을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탐험가가 배를 타고 머나먼 대륙(A)에 갔더니 진기한 식물(B)이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이를 자기 나라고 가지고 왔는데 정말 쓸모가 많은 식물임을 알았다. 그래서 재배법을 개발하고 대량으로 수확하는데 성공하여 전세계에 이를 팔기 시작했다. B의 원산지는 A이다.'
 이 진술에는 불편한 사실 몇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A 지역의 원주민들이 B라는 식물의 쓸모를 알아내고 이를 세계적으로 보급한데 기여한 바가 없다는, 즉 그 탐험가가 속한 제국주의시대 강대국이 이에 더 많은 공을 세운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서 원산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위 글에서는 마치 '원산지=자생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생물의 다양성 및 보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원산지는 이렇게 다시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 원산지란, '현지의 주민에 의해서 유용한 어떤 동식물이 처음으로 작물화(혹은 가축화, 즉 domestication)이 된 곳'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 좋은 품종이 되도록 개량을 하고 병충해를 극복하는 방법이 전통 지식으로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원산지에는 하나의 종에 대하여 다양한 품종이 존재하고, 새로운 병충해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저항성을 갖는 품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옥수수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멕시코에는 58종류나 되는 다양한 옥수수 품종이 존재한다고 한다.

재배에 대한 전통 지식이 거의 없는 작물은 고무나무이다. 합성고무가 아무리 발달해도 타이어의 옆면에는 천연고무가 들어가며, 그 사용량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고무나무 재배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만약 치명적인 병충해가 발생하면 관련 산업이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식물육종학자로서 전세계를 다니면서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한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야기가 이 책의 8장과 9장에 소개되었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종자를 먹을 수는 없다. 굶주린 시민들로부터 종자를 빼앗기지 않으려 지키다가 굶어죽은 동료들의 이야기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아아, 무지한 트로핌 리센코는 권력을 등에 업고서 얼마나 많은 인민을 굶주려 죽게 하고 또 소련의 농업을 거의 바닥 수준까지 몰락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식탁에서 즐기는 농산물 하나하나에는 이 종의 작물화를 위해 노력한 조상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의 기호에 따라서 세상의 생태 지도가 바뀔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되겠다. 나의 전공 분야 및 평소에 관심을 갖던 분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책이라서 독후감이 길어졌다.

공대생이 아니어도 쓸데있는 공학 이야기

  • 한화택 지음
내가 종사하는 분야를 흔히들 생명공학(biotechnology)라고 일컫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현대사회의 공학(engineering)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실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 설계라는 개념, 정량적 사고, 측정과 평가 등등 그 기본 구조와 구현 방법 모든 면이 그러하다. 일반인을 위한 서적으로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을 지은 한화택 교수는 국민대학교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고 한다. 

특허공학(Patent engineering)

  • "A guide go building a valuable patent portfolio and controlling the marketplace" - 가치 있는 특허 포트폴리오 구축 및 시장 지배를 위한 가이드
  • Donald S. Rimai 지음 | 정재철 옮김
이 책의 9쪽에 실린 현대 특허전략의 목적을 인용하겠다.

  1. 특허는 당신이 경쟁자가 수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경쟁사가 하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2. 당신은 경쟁자가 당신의 제품과 유력하게 경쟁하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3.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기능에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나 기존 제품의 개선, 비용 절감, 안전성 향상 또는 사용 편의성 향상 등의 기능이 포함될 수 있다.
  4.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을 다루는 지식재산을 소유함으로써 경쟁 업체가 당신과 효과적으로 경쟁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다.
  5. 우수한 특허 포트폴리오는 귀사의 부가 가치 제품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1번 항목과 똑같은 이야기를 몇년 전에 지인을 통해 들었을 때 나는 이를 대단히 속물적이고 야비하며 저속한 명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내가 그렇게 세상의 때에 물들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이러하니까 말이다.

문제 전체를 소유하라는 문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번역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5쪽에 이런 글이 있다.
제록스사는 스티브 잡스가 현재 제록스사의 전설적인 팔로 알토 연구센터에서 체리 피킹을 할 수 있게 하는 대가로 애플사로부터 대량의 주식지분을 쌓아 두었다.
여기에서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는 말이 이 문맥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구입하여 필요한 때마다 수시로 참고하고 싶은 책이었다.

2018년 6월 1일 금요일

대전시향 공연 관람으로 마무리한 5월

낮에는 한여름이나 다를 바가 없이 뜨겁다. 아직은 그렇게 습하지 않아서 불쾌감은 덜하지만 벌써 6월에 접어들었으니 머지않아 장마가 시작되고 무더위가 닥칠 것이다. 나들이하기 좋았던 계절 5월이 이렇게 지나갔다.

5월의 마지막날은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대전시향 공연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공연명은 "난해함을 넘어서다(링크)".  앙상블홀에서는 무용가 홍신자 씨의 공연도 열리고 있어서 로비는 제법 혼잡하였다. 오랜만에 음반도 하나 구입하였다. KBS 클래식 FM 방송에서 도이치방송교향악단의 초청연주회가 열린다는 안내방송을 들었는데 연주 목록에 있는 프로코피에프의 곡이 잠깐 배경으로 깔렸다. 문득 음반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내 음반매장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곡을 찾아 보았는데 마침 나탄 밀스타인의 앨범이 하나 있었다. 음반 정보는 여기에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2번, 그리고 바이올린 소나타가 수록되어 있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집에 와서 음반을 재생하였다. 아, 예전에 테이프로 들었던 슐로모 민츠의 연주가 기억이 났다(음반 정보 링크).


지휘는 상임지휘자인 제임스 저드가 아니고 수석 객원지휘자인 마티아스 바메르트가 맡았다. 공연의 후반부를 달구었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정말 좋았다. 워낙 좋아하는 곡이라서 그러하다. 바이올린 협연은 콜야 블라허였다. 열정적인 1악장이 끝난 뒤 박수가 쏟아진 것은 아쉽지만.

도이치방송교향악단은 오늘 대전에서 공연을 한다. 이틀 연속하여 공연을 보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복지 차원으로 관람권을 제공하는 공연만 볼 것이 아니라, 직접 당당한 유료 관객으로서 공연장을 더 많이 찾아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를 못한다. 여윳돈 2만원이 있다면 음반을 살 것인가, 유뷰트 레드 서비스 요금으로 쓸 것인가, 혹은 공연장을 찾을 것인가? 소유할 물건을 사는 것과 경험을 사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가끔은 경험을 사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