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웹 호스팅 업그레이드

내가 등록하여 사용하는 도메인의 대문에 해당하는 웹사이트(http://genoglobe.com/ 또는 http://www.genoglobe.com/)를 접속하니 다음과 같이 어색하기 짝이없는 문구가 떡하니 나타났다.


자유로운 접대는 그것의 유용한 생활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영문을 기계적으로 번역하여 한글로 전환한 것이 명백하다. 아무리 외국에서 운영되는 호스팅 업체라 해도 한번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에게 감수를 받았다면 이런 엉뚱한 문구가 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로운 접대'가 무슨 말일까? 접대? 접대에 해당하는 영어가 뭐였더라.. 구글 검색창에 이를 넣어보았다. 아, 그렇구나! free hosting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료 호스팅'이라고 하면 단박에 알아들었을텐데. 만약 호스팅 업체를 접대 업체라고 하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나는 Hostinger를 사용하여 몇 개의 도메인과 웹사이트를 관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의 홈페이지는 이 업체의 무료 호스팅 서비스를 사용해 왔었다. 왜냐하면 직접 이리로 들어오는 트래픽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금이 가장 싼 서비스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다시 설정을 매만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했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 구글 블로거를 이 도메인 하위의 호스트인 것처럼 연결을 어떻게 했었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분명히 어디엔가 그 방법을 기록해 놓았겠지만 찾기가 어렵다. 기계적으로 요금만 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설정을 하여 운영했는지를 다시 찾아서 문서로 잘 정리를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4년치의 요금을 미리 지불하고 나서 설정 상황을 살펴보았다. 도메인 등록 대행사인 가비아에 접속하니 DNS가 가비아의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를 호스팅어로 바꾸고, 호스팅어로 접속하여 parking 상태를 해지한 다음 DNS Zone Editor에서 CNAME(Alias)에서 blog라는 호스트가 ghs.google.com을 가리키도록 바꾸었다. 이제 http://genoglobe.com/ 또는 http://www.genoglobe.com/을 접속하면 원래의 웹문서가 잘 뜬다.

왜 웹사이트 주소의 끝에 슬래쉬('/', trailing slash)를 붙였는가? 웹브라우저의 주소창에는 이를 맨 뒤의 슬래쉬 없이 주소를 적어넣어도 별 문제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넣는 것이 옳다. 왜 그런지는 다음 문서에서 알아보자.

URL 끝에 '/'는 왜 붙이는 걸까?

2018년 11월 29일 목요일

백만 년 만의 consed 28.0

인터넷 익스플로러/크롬/파이어폭스의 시대에 모뎀으로 01410번 접속을 하는 '이야기' 프로그램을 논하는 것만 같다. 맨날 NGS data만 주무르다가 이 얼마만의 Sanger chromatogram이란 말인가? 늘 사용하는 CLC Genomics Workbench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었으나 본능적으로 익숙하게 사용하던 phred-phrap-consed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4 개의 고세균 콜로니로부터 PCR을 이용하여 16S rRNA gene sequence를 증폭하여 양방향에서 읽은 데이터이다. Read는 총 8 개! 수백만, 수천만개의 일루미나 read를 다루다가 이렇게 단출한 데이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용한 프라이머는 21F와 1492R이다. 서버를 업데이트하면서 실행파일과 부속 스크립트가 여기저기에 흩어진 상태라서 이를 다시 정비하고 phredPhra을 돌렸다. Assembly를 열기 위해 사용한 consed의 버전은 28.0이었다.


정말로 추억이 돋아나는 화면이 아닌가! Trace view 창을 열고, 염기를 편집하고, concensus 위에 tag을 붙이는 동작이 여전히 손끝에 착착 붙는다. 맨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장식장 속에 오랫동안 방치한 수동식 카메라를 꺼내서 손으로 돌려 초점을 맞추고 셔터 릴리즈 버튼을 누른 뒤 레버를 감는 느낌이랄까?

Phred, phrap 및 consed 공식 웹사이트의 프로그램 입수 방법 문서(링크)를 찾아가니 현재 consed의 최신 버전은 2015년 4월 배포된 29.0인데 나는 이를 아직까지 받지 않은 상태였다. 다운로드 링크를 클릭하여 일단 받아 놓았다. 공지문에 의하면 버그가 수정된 maintenance release라고 한다.

앞으로 consed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업데이트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NGS의 시대가 되면서 ab1 file의 낭만적인 trace line를 직접 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Consed의 개발자인 David Gordon은 University of Washington의 Phil Green lab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2015년부터 Eichler lab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다(웹사이트). PI인 Eichler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bioinformatic specialist, 멋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같으면 리더보다 나이가 많은 실무자는 보통 버티기 어려운 분위기가 아니던가?

David Gordon at Eichler lab. 출처: https://eichlerlab.gs.washington.edu/dgordon.html
나이가 들면 실무에서 당연히 멀어져야 하고, 다른 젊은 사람을 부려서 일을 하는 관리자 또는 상급자의 길로 접어들어야만 비로소 성공한 사람 대접을 받는 우리나라의 정서가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 밑에서 일한다'는 대단히 불편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실무자는 그렇다면 전부 꿈이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모두가 리더가 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겉으로 보여지는 지위와 영향력이라는 지표에 집착하지 말자. 일을 즐기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43번 오극관(43 power pentode) 싱글 앰프 프로젝트 - [11] 전원트랜스 2차부 겹쳐서 사용하기

MT3608을 사용한 DC-DC 부스트 컨버터를 통해서 직류 12 V에서 24 V를 얻고자 하였으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며칠 사용하다가 갑자기 컨버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12 V SMPS의 동작이 차단되면서 앰프에서 소리가 나질 않는다. 컨버터 모듈이 망가지면서 내부에서 단락이 일어나 +극과 -극이 도통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만약 단락에 대비한 안전 장치가 없는 SMPS를 사용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내가 만들었던 전원장치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정말 상상하기 싫다.

초단관과 43번 오극관을 위한 히터 전원을 어떻게 동시에 마련할 것인가? 초단관으로 12A*7 계열을 사용한다면 주전원으로 사용하는 12 V에서 전원을 따오면 된다. 그러나 6N2P를 쓰고 싶다면? 그리고 43번 오극관 히터에서 필요로하는 25 V는? 24 V SMPS가 별도로 있지만 진공관 싱글 앰프에 SMPS를 24 V와 12 V용으로 두 개나 연결하는 것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 11월 내내 이렇게 쓰고 있으면서도 불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우습다.

놀고 있는 전원 트랜스를 이용해 보자! 나에게는 0-9-12-15-18 V가 나오는 1.2 A 용량의 전원 트랜스가 있다. 0-12 V 탭에는 배전압 정류회로를 달아 직류 24 V를 만들고, 12-18 V탭은 그대로 6N2P의 히터에 연결한다. 악어클립으로 물어서 임시로 배선을 하여 소리를 들어 보았다.


약간의 험이 들려서 초단관의 히터 전원회로에 100R 저항 두 개를 연결하여 가상의 중점을 만들어 신호 및 주전원이 그라운드에 연결하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실용상 큰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험이 줄었다. 모든 진공관용 히터 전원을 SMPS, 즉 직류로 연결했을 때에는 정말로 배경 잡음이 없었다. 연결 상태는 다음과 같다. 아래에 나열한 세 개의 회로도 전체에서 6N1P는 6N2P를 잘못 쓴 것이다.

자, 그런데 생각을 해 보니 12-18 V 사이에 15 V 탭이 있다. 그러면 이것을 접지에 연결하면 된다고 한다. 직렬로 연결한 저항 두 개를 이용한 가상 중점 접지는 중간 탭이 없을 때의 방법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직 실험을 실시하지 않았다.


위와 같이 연결하는 저항도 줄일 수 있고 회로도 더 단순해진다. 그런데 43번 오극관의 히터는 DC이니 접지를 하지 않아도 될까? 만약 접지를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배전압 정류부를 통과하여 나오는 전원의 0 V를 15 V 탭과 연결하면 말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회로는 어떨까? 6 V 공급을 위한 회로(하단)의 탭 위치를 3 V만큼 그대로 밀어서 올린 것이다.

Will it work? Or will it be safe? Yes, it works!

개별 단위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붉은 색으로 표시한 영역이 겹치게 된다. 이렇게 연결을 하면 어딘가에서 '펑'하면서 불꽃이 튈지, 잡음이 더 심해질지, 아니면 정말 기대한 바와 같이 잡음이 더 줄어들지 정말 궁금하다.

2018년 11월 29일에 작성한 글

위에서 소개한 회로도 세 개는 전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2018년 12월 13일에 작성한 글

2차쪽의 아무 탭이나 접지를 해도 험이 줄어든다. 이론적으로는 중앙부의 탭을 접지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실용적으로는 아무 탭이나 연결해도 상관이 없다?

2018년 11월 27일 화요일

독서 기록 -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Digital vs. Human)

어제는 서울에 위치한 어느 병원에 일 년에 한 번 들르는 날이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접수를 마친 다음 대기실에 마련된 커피 믹스를 타 먹으려고 냉온수기를 작동시켰다. 사무실이나 공공 시설에서 흔히 보이는, 즉 커다란 물탱크가 뒤집혀서 꽂혀있고 냉수와 온수 배출구가 따로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병원의 현대적인 분위기에 잘 맞도록 별도의 물탱크가 없이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예쁘장한 장치였다. 날씨는 이미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고, 냉온수가 바로 곁에 따뜻한 물을 부어서 먹는 커피믹스와 녹차 종류가 마련되어 있어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버튼을 눌렀다. 버튼 위에는 ‘한 번만 눌러주세요’하는 친절한 문구를 별도로 붙여 놓기까지 하였다. 원터치식이므로 물을 뽑기 위해 계속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이 한 번만 누르라는 뜻이였다.

‘그래, 알았다. 내 한 번만 누르지...’

종이컵에는 정확히 한 컵 분량의 물이 담겼다. 그러나 커피믹스 가루는 전혀 물에 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찬물이 나온 것이다. 물이 배출되는 관은 하나였고 터치식으로 냉온수를 선택하는 장치였다. 당연히 기본 작동은 찬물 쪽이었다. 화상을 막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만 눌러주세요’라는 안내문구와는 별도로 ‘더운물을 이용하시려면 꼭 왼쪽 버튼을 터치해 주세요’라는 안내문구까지 있었더라면! 가정용 냉온수기라면 손색이 없는 장치였다. 큰 설치면적을 차지하지 않을뿐더러 소수의 사람들이 제한된 곳에서 사용하므로 한두번 실수를 경험한 뒤에는 또다시 찬물을 커피믹스에 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버릴 수도 없는 형편이라 최대한 젓개로 잘 휘저어서 두어 모금에 삼켜야 했다.

무엇이든 알아서 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에 중독되어 순간의 판단 착오를 하고 만 것이다. 만약 이보다 저렴한 냉온수기였다면 찬물과 뜨거운물이 나오는 출구가 따로 있는 매우 직관적인 구조였을 것이고, 나와 같은 실수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끔 겪는 다른 일이 떠올랐다. 종종 연구과제나 용역 등을 심사하기 위한 자리에 불려가고는 한다. 두꺼운 평가용 자료를 참조하면서 발표를 듣고, 평가서에 점수를 매기는 일이다. 평가 항목 중에는 객관적으로 수치화가 가능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기업의 신용 등급, 논문 출판 실적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심사위원이 직접 계산을 하지는 않는다. 추최하는 곳에서는 친절하게도 미리 계산을 하여 심사위원에게 주어지는 평가서에 이미 이러한 수치를 적어 놓는다. 심사위원은 다른 까다로운(?) 항목에 대해서만 점수를 매기고 합산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단순한 계산 작업에는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도록 미리 준비를 해 주는 것이다.

후자의 사례에서는 수치화된 항목의 점수를 미리 매겨 놓는 데에 인공지능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다만 평가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주최측에서 시간 절약과 편의를 위해 미리 작업을 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심사위원들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 물론 이 항목들은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으므로 평가 당일 심사위원들이 하든 사전에 주최즉에서 하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단순한(실제로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나는 그것을 최종 승인만 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내가 위계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 줄을 지어 결재판을 들고 오는 직원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고급 만년필로 멋지게 결재 사인을 하는 부류의 사람 – 그런 심오한 역할 착각 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절약한 시간만큼 나는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둘 다 생각일 뿐이다. 더욱 지위가 높고 가치 있는 일을 다룰 수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들기만 할 뿐, 실제 그런 책임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냉온수기의 버튼을 누름으로써 나는 내 만족감을 스스로 박탈당하고 말았다. 최소한 찬 물에 녹지도 않은 커피를 버리지는 않았으니 자원을 낭비하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수는 있겠으나 투입된 자원 대비 효용을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일을 하다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직접 생각을 하고 판단하는 일을 누가 대신 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기차 안에서 읽은 책은 지나친 디지털화가 가져다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미래 사회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국내에 번역되면서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원제는 [Digital vs. Human]이다. 물리적 세상과 디지털 영역 사이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일어나는 인간성 상실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속도, 효율, 편의를 좆는 디지털 혁신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국의 미래학자인 리처드 왓슨이고 방진이가 옮겼다.



이 책은 부끄럽게도 실직 상태의 부부가 PC방에서 온라인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임에 몰두하면서 정작 자기들의 아기는 집에서 굶긴 상태로 방치한 뉴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건이 극히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일탈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디지털 세상이 오면서 그동안 당연시되던 가치가 뒤틀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심각한 사례인 것이다.


  • 수고를 들여 공부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짧게 쓰인 정보의 단편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하지 않으면서 휴대폰 속의 작은 화면을 통해서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이부자리 속에 누워서도 이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 장엄한 광경을 몰입하여 감상하지 못하고 그저 휴대폰 카메라만을 들이댄다. 진지해야 할 자리(예: 자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의 'Arbeit Macht Frei'라고 쓰인 현판 아래 등)에서 남에게 보이기기 위한 셀피를 찍는다.
  • 읽지도 않은, 혹은 결고 읽지도 않을 정보를 공유(리트윗)한다.
  • 대면 접촉을 회피하게 된다.
  • 정보의 투명한 공개를 지향하는 것처럼 말하는 유명 SNS의 억만장자 회장은 정작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 주변의 부동산 수천만 달러어치를 사들인다.
  • 집단 지성을 추구하면서 개인 차원에서 해야 할 연대 및 참여 등을 등한시한다.
  • 필요한 일과 가능한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
  • 디지털 세상에서도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
  • 익명성 뒤에 숨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해서 사회적 책임이 옅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해도 집에 돌아오면 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는 24 시간 괴롭힘을 당한다. 상대를 대면하고 있지 않으면 그에게 입히는 피해에 대해서 무감각해진다. 이는 무인기를 원격조종하여 폭격을 실시한 군인(기술자?)들에게서 흔히 보고되도 있다.


기술이 필요성을 채워주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서 경제가 돌아가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부가 축적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말이다. '컴퓨터가 있으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질병에 시달리고 미신과 무지·정치적 억압에 짓눌리며 전쟁과 빈곤에 의해 평균 40살도 되기 전에 생명을 다하던 중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 기술 발전은 피할 수 없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세상은 분명 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다가는 인류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음을 항상 고민해야 한다. 수고를 들여서 생각을 하고, 자동 프로세스에 판단을 맡기지 않고, 약간의 편의를 위해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커다란 정치적 음모를 뒤에 숨기고 있는 빅 브라더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발전과 편의제공이라는 좋은 명분 뒤에 도사리고 있는 기업들의 수익 창출 전략에 대해서 바로 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존엄성 중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독서 기록 - '진화' 와 세 권

이번에 고른 책은 분량이 상당해서 다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참고문헌을 제외하면 '스트레스'는 622쪽, '진화'는 518쪽. 전문서적과 일반교양서적 사이의 중간쯤 위치하는 책이라서 좀 더 세심하게 읽었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책장을 넘긴 것은 아닌지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이 두 권의 책은 구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가 몰랐던 항암제의 숨겨진 진실

  • 후나세 슌스케 지음/김하경 옮김

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

  • 부제: 여성과 이방인의 정체성으로 본 프랑스
  • 곽미성 지음
미셸 옹프레는 '미식의 이성'에서 영화와 음악과 요리가 "공통적으로 속임수가 불가능한 시간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고 썼다... 특히 요리는 이미 재료 자체가 '일정 세월을 살아 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시간성을 한 겹 더 입븐다...이런 맥락에서 옹프레는 영화, 음악, 요리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모두 '시간의 조각가'와 같다고 말한다(239쪽).
기회가 된다면 프랑스 영화감동 알랭 레네의 작품을 봐야 되겠다.

스트레스

  • 부제: 스트레스: 당신을 병들게하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 책 소개
  • 로버트 새폴스키 지음/이재담, 이지윤 옮김
(신체적) 스트레스란 원래 갑자기 닥친 위험 상황, 예를 들어 들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영양이 사자떼를 발견하고 쫓기기 시작하면서 생존하기 위해 신체에 급격한 준비 태세를 갖추게 하는 반응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과 같이 고도로 사회화된 생활을 영위하는 동물에게는 행복한 감정과 건강 수명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빈발한다.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통제 능력(최소한 이 나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할 예측 가능성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통제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은 스트레스 대처 능력이 높음이 알려져 있다.

욕구 불만을 해소할 방도를 찾고 이를 정기적으로 실행하되, 이 해소법이 주위 사람들에게 해로운 것이어서는 안된다. 흔히 '관리자의 스트레스'가 남다른 것이라고 과대평가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관리자는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궤양을 일으키는 사람은 자신이 궤양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고 일반적으로 여기고 있는데('헬조선'이라는 표현에도 나타나 있듯이), 무차별한 댓글 문화, 일상적인 뒷담화(뒤에서 험담하기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음), 고도화된 정치적 의견 표출 방안(촛불집회나 태극기 집회 전부 지향하는 바는 정반대이지만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나름대로의 최적화된 방법을 동원하다) 등이 존재하기에 그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쪽(p.622)의 문구를 인용해 본다.
우리는 첫 장의 시작 부분의 목록에 나오는 우리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교통 혼잡, 돈 걱정, 과로, 인간관계의 불안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들 중에 얼룩말이나 사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것은 없다. 특권을 누리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런 스트레스를 만들어 낼 정도로 특이하게 똑똑하고, 이들로 하여금, 너무 자주,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들 정도로 특이하게 바보 같다. 분명 우리는 그러한 스트레스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을 만큼 특이하게 현명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모든 심리적 스트레스가 내면적인 것이고, 마음 가짐을 바꿈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이언스 북스 시리즈 중 하나로 번역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스트레스가 세포와 조직 및 개체 수준에서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그 대처 방안을 설명한 책이다. 2004년에 나온 것을 번역한 책이니만큼 그 이후에 이루어진 의학적 발전을 수록한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진화

  • 부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생명의 언어
  • 칼 짐머 지음/이창희 옮김

이번에도 대출한 책 전부를 다 읽은 것은 아니다. 재야 진화심리학자이자 번역가인 이덕하의 '페미니스트가 매우 불편해할 진화심리학'은 반 정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만 읽고 말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수식이 조금 나오면서 흥미가 떨어진 것이다. 이덕하의 자기소개서는 여기를 참고하라.

이번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성의없는 독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전주의 새발견, '뜻밖의' 전주향교와 국가무형유산원

전주 한옥마을과 영화의 거리를 그렇게 다니면서도 이 두 곳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였다. 한옥마을 한쪽에 향교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왜 진작에 들러보지를 않았을까? 늘 들르는 현대옥에서 국밥을 먹고 부른 배를 꺼뜨리고자 감과 모과가 탐스럽게 열린 좁다란 골목으로 접어들어 거닐다가 다른 한옥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고풍스러운 건물의 입구를 발견하였다.

오늘의 글에서 소개할 대부분의 사진은 세로 구도가 되었다. 휴대폰으로 사람이 포함된 사진을 찍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휴대폰을 가로 구도로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전주향교였다. 우리 부부가 들어간 문은 정문이 아닌 곁문에 해당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문의 이름은 '입덕문(入德門)'이었다. 입덕? 무척 좋은 뜻이지만 요즘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른 뜻으로 쓰이기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향교는 국립교육기관(관학), 서원은 사립학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돌이켜보니 문화유산답사를 다니면서 서원은 몇 번 다녔지만 향교는 거의 방문한 적이 없었다. 향교 바로 옆의 전주동헌은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를 발견하고 입이 떡 벌어졌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약 380년의 은행나무는 땅바닥과 주변 건물 지붕에 노란 낙엽을 수북하게 뿌려 놓았다. 한옥마을 한 구석에 이렇게 고즈넉한 정경이 숨어 있다니!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벌레를 타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건전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바람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햇살을 받으며 명륜당 툇마루에 잠시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였다.


다음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향하였다. 향교의 건물 배치를 단순화시키면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대성전)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학공간(명륜당)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이 앞에, 강학공간이 뒤에 있는 배치를 전묘후학이라 하면 성균관이 이러한 배치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문화콘텐츠닷컴). 전주향교도 마찬가지의 구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와 서원은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른다. 대성전에 모신 유학의 성인은 당연히 공자이다.


대성전 앞에도 아름드리 암수 은행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었다.


전주향교의 정문에 해당하는 만화루는 다락집 형식이다. 출입을 통제하지 않아서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정문을 거쳐서 밖으로 나오니 전에도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던 완판본 문화관이 나타난다. 완판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중심지인 전주에서 목판으로 찍어낸 책을 의미한다. '완'은 전주의 옛이름 완산주를 의미한다. 마침 "(목판으로 읽는)뜻밖의 심청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통 판각 강좌를 수료한 완판본 연구회 회원들이 완판본 심청전의 주요 구절에 작가의 해석을 덧붙인 목판서화 작품을 전시하는 행사이다(전라일보 기사 링크). 이것 역시 뜻밖의 발견이었다. '뜻밖의'를 전시회 제목 그대로 옮기지 못함이 안타깝다.



완판본 문화관을 나오면 전주천이 펼쳐진다. 오른편을 바라보면 남천교가 보인다. 2017년 새로 만들어진 다리인 오목교를 건너서 국립무형유산원으로 향하였다. 치명자산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한옥마을로 향할 때마다 길 건너편으로 늘 보이던 큰 건물, 국립무형유산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계획을 하고 찾은 것이 아니라서 토요일 오후 4시에 열리는 공연까지는 보지 못하였으나, 상설전시관의 동영상을 관람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무형문화유산의 범주를 설명한 전시물을 중심으로 하여 둥글게 배치된 모니터 화면에서 무형문화예술의 생성 과정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영상은 정말 아름다웠고 완성도 역시 높았다. 


NIHC(국립무형유산원)는 National Intangible Heritage Center를 의미한다. 국립보건원(NIH) + C가 아니다.
전주를 찾을 때매다 늘 들르는 JB카페(전동성당 건너편)가 하필 오늘까지 내부 공사 중이라서 다른 카페를 찾아야 했다. 아내와 함께 전주에 갈 때마다 책을 한 권씩 들고 가서 커피 한 잔과 함께 한참을 머물다 오던 JB 카페. 카페 매니저로부터 또 오셨느냐고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으나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으니 발길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바로 옆의 스타벅스에는 빈 자리가 없었고, 근처의 어떤 카페는 한복대여점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거기에서 멀지 않은 다른 카페를 들어갔더니 여행에 지친 젊은이들이 전부 널브러져 있어서 영 분위기가 어색하여 다른 곳을 찾았다. 아마도 새벽 일찍 먼 곳에서 전주를 찾아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 부부를 '뜻밖의' 목적지로 이끄는데 일조한 골목길. 바로 저 골목길로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에서 가끔은 일탈이 필요하다. 아내가 늘 지적하듯이 나는 지나치게 직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다른 가치있는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2018년 11월 14일 수요일

정부과제 기획위원, 신상 정보를 내 놓아라?

어제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2010-2016년 바이오분야 기획위원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동의 여부를 조사한다는 것이다. 제공하는 개인정보의 항목은 성명과 기획 당시 소속기관명이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연구재단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10조 제1항 및 같은 법 시행령 제6조 제1항에 따라 2010년 이후 국책연구사업 바이오 분야 기획위원 정보의 공개를 청구 받았습니다. 명단 공개를 위해, 해당 기획위원께 개인정보 제3자 제공에 대한 동의를 받고자 하오니, 아래의 동의 문항에 응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 생략] 한국연구재단에서는 매년 정부 R&D 약 20조원에서 5조 가량의 막대한 예산을 연구과제 지원에 집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의 과제 기획 및 선정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제 기획 및 선정 위원들의 공개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해당 정보가 공개되고 있습니다만 기획위원, 선정 평가 위원 및 선정 과제 책임자 정보가 통합되어 공개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통합된 자료가 공개된다면 한국연구재단의 과제 선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최근 8년간 바이오분야 국책과제 기획 및 심사위원 명단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받아 해당 과제의 기획 및 심사위원 선정이 공정하게 진행되었는지 파악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관련 기관에 개선 방안을 건의하는데 이용하고자 합니다.
메일을 받고보니 기분이 조금 나빠지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어느 대학 교수님(위 인용문에서 '본인'으로 표현)께서 과제 선정 과정이 공정하지 못한 것 같으니 기획 위원의 이름과 당시 소속기관을 공개하라고 청구를 한 것이다. 조사를 해 달라고 청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관여한 기획위원의 명단을 제공하면 본인께서 문제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판정하겠다는 뜻이다. BRIC의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조금만 검색을 하면 누가 이런 정보를 청구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정부 수탁 과제는 우선 '기획'이라는 과정에서 시작을 한다. 계획과 기획은 다르다. 계획은 하기로 결정된 일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인지 밑그림과 실행방안을 그려나가는 것이고, '기획'은 아직 하기로 결정되지 않은 일을 하고자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타당성을 제시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작업은 기획의 몫이다. 즉 기획이 잘 되었어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일은 엄청나게 많다. 어떤 분야의 연구가 필요한지 사전 제안서를 받고, 정부 부처에서는 이를 근거로 심의와 조정을 거쳐서 사업을 확정한다. 그러면 과제제안요구서(Request for proposal, RFP)와 함께 과제 공고를 낸다. 이를 보고 여러 응모자가 과제 신청서를 제출하여 심사를 통과하면 연구비가 나오고, 연구를 진행하고, 평가를 받는다. 과제의 선정과 진도관리 평가 등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업의 경우 연구재단이 맡는다.

여기에서는 공정성을 위해 '심판과 선수 분리 법칙'이 적용된다. 즉 과제에 응모하고 싶은 사람은 기획단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안서는 개인이 수시로 제출할 수도 있지만 큰 규모의 일은 탑-다운 방식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과제를 따고 싶은 사람은 일이 성사되게 하려고 여러 가지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합법적인 로비인가, 혹은 부정한 행위인가? 참 어려운 문제다. 공정성 시비가 벌어지는 것도 바로 과제를 따고 싶은 사람이 이러한 진행 방식에 영향력을 미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기는 사람은 과제를 수주하는 과제책임자이다. 주변 연구자, 학계, 기업(기업이 참여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야 선정이 잘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공무원 등과의 친분을 쌓아서 일이 잘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절대 사전 제안서 제출 단계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결국 어떤 분야의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제안서를 내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이를 막아 놓았다. 그러니 편법 비슷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때로는 학회에다가 기획을 맡겨서 특정 사업에 긍정적인(쉽게 말해서 이 사업이 중요하니 꼭 해야만 하고 얼마의 예산이 앞으로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내기를 주문하기도 한다. 보고서는 당연히 호의적인 결론으로 간다.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충분한 기획 비용을 대고 기획 보고서를 만들도록 요청하는 것이 가장 공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서 이해 관계가 없다면 전문성 또한 부족할 수도 있다. '학자로서 이 분야를 연구하므로 내가 잘 안다'라는 것이 그 분야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것일 수 있는가? 그 분야의 과제를 수주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 당연히 그 분야를 잘 알 수밖에 없고(그러니 기획을 가장 잘 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과제를 딸 수 있다면 이익을 보는 것이다.

내가 무슨 사업의 기획위원이었더라? 책장에 꽂힌 2010년 9월 발간 교육과학기술부(부처 이름은 참으로 자주 바뀐다) "국가유전체연구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미생물유전체 파트를 내가 작성했고, 보고서 저자 중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작성은 하고 작성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것이 요즘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다부처유전체사업'을 시작하게 만든 근거 자료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연구재단에 기획위원의 정보 공개를 요청했던 그 교수님도 이 과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이 과제를 수주하지도 않았고, 어떤 혜택도 받은 바가 없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어느 사업단에서 발주한 기획(아마 학회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었을 것이다)에도 참여한 바 있지만 나는 과제를 수주하지 않았..(아니 못했)다. 우리 연구소가 그 사업을 많이 수주하였으니, 과제 기획 당시 같은 기관에 있었던 네놈도 그 기획보고서를 너희 기관에 유리하게 작성하였을 것 아니냐? 뭐 이런 잣대를 들어댈 것인가? 맘대로 생각하라고 해라.

기획보고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업이 만들어질 때 부처 안에서 돌아다니고 공포되는 서류이다. 사업의 필요성, 국내외 관련 분야 현황, 예산 규모, 실행 계획, 활용 방안, 진짜 공고가 나갈 RFP.. 만약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려면, 이 문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어이쿠, 기분이 상해서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이제는 문자메시지로 동의 여부를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참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하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맘대로 하세요! 정보 공개에 동의하였다.

2018년 11월 13일 화요일

Microbial Resource Announcements에 논문 내기

미국 미생물학회(American Society for Microbiolgy, ASM)에서 출간하는 Genome Announcements라는 온라인 저널이 있었다. 원래 미생물학(정확히 말하면 세균학)의 유명한 학술지인 Journal of Bacteriology(JB - 안타깝게도 한국인이 죽자사자 매달리는 impact factor는 현재 그렇게 높지 않다)의 한 섹션으로 존재하다가 별도의 온라인 저널로 분리되어 운영되었고, 올해 여름에 Microbiology Resource Announcements라는 저널로 명칭이 바뀌었다.

유전체 시퀀싱이 아주 드물게 일어나던 시절에는 그 결과를 좋은 저널에 싣는 것이 지금보다는 용이했었다. 중요한 모델 생명체가 바로 연구 대상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관심도 많았고, 다른 비교 대상을 찾아내어 일부러 comparative genomic analysis를 하거나 발견 또는 예측된 사실을 실험으로 검증할 필요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왠만한 생명체는 유전체 해독이 이미 완료된 상태라서 아마도 화성에 가서 새로운 미생물을 찾아내어 시퀀싱하지 않는 이상 수준 높은 학술지에 싣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간혹 미생물을 이용한 연구 결과가  Nature나 Science에 종종 실리는 것을 보면 아직 희망을 접기에는 이른 것 같다.

그러다가 next-generation sequencing이 급격히 발전하여 누구나 유전체 시퀀싱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쏟아지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GenBank에 유전체 정보를 올리는 것은 자유지만, 여기에 올리는 정보에는 왜 이러한 생물체를 택하여 연구를 했고 어떤 방법으로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시퀀싱을 해서 조립을 했는지 기술하기가 어렵다. BioProject나 BioSample가 이런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그래서 공개된 유전체 서열 정보의 인용 가능한 최소한의 학술 정보 역할을 하고자 announcement류의 섹션 혹은 전문 저널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 투고를 하면 리뷰를 거치지 않고 편집인이 즉각 출판 여부를 결정하였다. 대신 500단어 이내라는 분량의 제한이 있고 지금도 이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미생물의 유전체를 시퀀싱하여 적절히 조립하여 GenBank에 올린 뒤 accession number를 받아서 500 단어짜리 announcements를 만들어서 투고하면 JB 논문 한 편을 낸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연구 성과의 평가에 도움을 많이들 받았다. 나 역시 수혜를 입은 사람 중 하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을 이용하여 승진이나 이직에 도움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화된 연구 성과에 목을 매는 것은 한국이나 중국 마찬가지다. JB 내에서 특정 섹션에 너무 많은 투고와 출판이 이루어지다보니 저널측에서는 이를 별도의 학술지인 Genome Announcements로 분리하게 되었다. 당연히 JB의 일부로서 누리던 SCI 등재, IF 수치 등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꾸준히 논문을 내고 있다. 유전체 시퀀싱은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모든 시퀀싱 결과에 값진 학술적 가치를 부여하여 좋은 수준의 peer review journal에 출판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에서 지원한 연구비, 즉 세금을 이용하여 생성된 연구 결과가 계속 연구자의 컴퓨터 안에서 잠자게 놔 둘 것이 아니라 빨리 공개하여 다른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여름부터 Genome Announcements는 Microbiology Resource Announcements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제는 공표하는 연구 내용이 유전체 정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생물학과 관련된 모든 자원으로 그 한계가 넓어진 것이다. 하지만 원고 작성 요령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단, review process가 추가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늘 하던 것과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올해들어서 지금까지 총 네 편을 투고하였는데, 의외로 까다롭게 리뷰를 하는 것이었다. Sequence read의 트리밍 조건은 무엇인지, genome assembly를 하는 데 어떤 파라미터를 설정했는지, %Q30 수치는 어떠했는지 등 Genome Announcements 시절에는 그저 default parameter의 조건으로 했다고만 기술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갔던 문구를 하나하나 붙들고 더 상세히 적으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예전에는 요청하지 않던 raw sequencing read의 SRA accession number를 넣으라는 주문도 빠지지 않는다. 오늘 다운로드한 instructions to authors PDF 문서의 8쪽 왼쪽 컬럼을 보면 genome sequence의 availability를 쓰는 예문만 소개하고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유전체 서열 정보의 accession number뿐만 아니라 BioProject/BioSample/SRA 정보를 적당히 섞은 모범적인 예문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Q30이라! raw data 중에서 phred score가 30 이상인 염기의 총 수 혹은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걸 굳이 논문에 넣어야 하나?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유전체 시퀀싱 관련 논문을 쓰면서도 이 결과를 요구하는 저널은 없었다. fastaQC의 html report나 CLC Genomics Workbench의 NGS Core Tools -> Create Sequencing QC Report에도 이런 정보는 주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fastQC가 zip 파일로 묶어서 제공하는 결과 파일 중 하나(fastqc_data.txt)를 열어보니 '>>Per sequence quality scores' 섹션에 Q 값에 대한 염기의 총 카운트가 나온다. Q30부터 시작하여 합산을 한 뒤 전체 염기로 나누어야 %Q30 수치를 계산할 수 있다.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시퀀싱 업체에서 제공한 QC 리포트를 들추어서 원하는 수치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요구하는 것을 다 모아서 원고를 수정하니 500 단어 제한을 훌쩍 넘어간다.

리뷰어가 요청하는 상세 정보가 논문의 성격과 분량 측면에서 타당한지 편집국에서 판단하여 어느 정도의 기준선을 제안하면 좋을 터인데 아직은 그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어찌되었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 내가 낸 논문이 오늘자 저널 웹사이트의 Latest Articles 바로 위에 나와서 기념삼아 스크린샷을 찍었다.




2018년 11월 11일 일요일

43번 오극관(43 power pentode) 싱글 앰프 프로젝트 - [10] 초단부 구성

지난 일주일 동안은 과제 보고서 작성에 집중하느라 새 글을 얼마 쓰지 못하였다. 금요일에급한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반도체인 OP amp 회로를 이용하여 43번 오극관을 충실히 드라이브하여 왔는데, 기왕이면 모든 것을 진공관에게 맡기면 어떻겠는가? 전원부에 SMPS와 DC-DC 컨버터를 사용한 것은 새로운 시도라고 해 두자.

마침 12AU7이 쓰인 프리 겸 헤드폰 앰프가 망가져서 여분의 진공관을 갖게 되었다. 인터넷과 제이앨범의 자료를 근거로 플레이트 전압 150 볼트 부근에서 작동하는 회로를 구상하여 제작에 돌입하였다. 필요한 부품은 일주일쯤 전에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손으로 그린 회로도를 아래에 소개한다. 43번 오극관의 스크린 그리드에 연결되는 고압 직류에(그라운드 기준 155 V의 전압을 470R 저항으로 한 번 낮춘 것 수준이라 그렇게 높지는 않다) 47K 저항을 연결한 뒤 12AU7의 플레이트에 접속하였다. 12AU7의 캐소드에 바이패스 캐패시터를 달지는 않았다. 진공관의 특성 곡선을 기초로 계산을 하거나 측정을 하지는 않았다.

12AU7 + 43 single ended amplifier schematic.
페놀 만능기판에 실톱으로 직경 19 mm 정도의 구멍을 뚫어 9핀 소켓을 고정하였다. 방열을 위해 진공관을 섀시 외부로 노출시키는 경우 기판의 동박 패턴, 즉 아랫쪽으로 진공관을 향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 기판을 섀시 안쪽면과 최대한 가깝게 고정할 수 있다. 물론 접촉을 하면 안되지만. 그런데 이렇게 회로를 꾸미면 기판 윗쪽에서 소켓과 나머지 부품을 연결하는 일이 좀 어색해진다.


43번 5극관 전력증폭회로 입력부의 커플링 캐패시터와 그리드 리크 저항은 원래 별도의 기판에 붙여 놓았는데, 이번에 만든 초단증폭회로용 기판에 전부 수용하였다. 12AU7의 히터 는 4번과 5번 핀에 12 V 직류를 공급하여 점화하였다.

워낙 간단한 회로라서 실수는 하지 않았다. 소리를 들어보니 약간의 험이 들렸다. 12 V 및 24 V 직류 어댑터의 음극을 서로 연결하니 험이 사라졌다.



알루미늄 판 조각을 이용하여 전면 패널로 삼았다. 이전보다 훨씬 깔끔해 보인다. 소리도 매우 마음에 든다. OP amp를 사용한 드라이브 회로와 비교하면 약간 더 정갈한 것 같기도 하고...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모른다.


어제 저녁에 완성을 하고 계속하여 음악을 들어보고 있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개선을 할 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섀시를 꾸며서 부품들을 수납할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전기 설비 공사에 쓰이는 '풀박스'라는 금속제 상자가 있다. 단면은 정사각형이면서 높이는 용도에 따라서 다르다. 직사각형 모양이 아니라서 앰프의 섀시로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R-core 출력트랜스(사진에서 보였듯이 받침틀 위에 한 쌍을 다 올려둔 것)의 케이스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가로x세로x높이가 100 mm인 것이 이 용도로는 딱 적당할 것이다.


'고전관'을 이용한 매우 즐거운 제작 경험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2018년 11월 4일 일요일

대청호와 신탄진 장 구경

멀리 가지 않아도 가슴이 시원하도록 탁 트인 곳에서 가을 단풍을 즐길만한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대청호다. 대전 시민에게 계룡산과 더불어서 탁월한 경관을 제공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비록 댐이나 방조제가 갖는 부정적 의미에 대해서도 이제 관심을 가져야 할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리 부부의 얼굴 사이에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자리잡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결코 낭만적이지는 않은 문구가 적혀있다. 내용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호수 건너편인 북쪽 약간 높은 곳을 바라보면 팔각정 휴게소가 있다. 그쪽은 지대가 높아서 아마 호수를 바라보는 경치는 더 아름다우리라. 시선을 약간 왼쪽으로 옮기면 가파른 산비탈에 절집이 하나 보인다. 이름은 현암사. 기회가 되면 한번 가 보고 싶다. 계단이 많아서 평소에 등산으로 다져진 체질이 아닌 우리 부부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리라.

마침 나들이를 나섰던 어제는 신탄진 장날이었다. 큰 도롯가에서 파는 단감을 사려다가 아예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로 하였다. 유성장(4일/9일)은 꽤 여러 차례 다녀 보았지만 신탄진장(3일/8일)은 처음이었다. 김치가 다 떨어져서 깍두기 거리를 사기로 했다. 장이 서는 골목은 유성장보다는 약간 넓어서 다니기는 수월하였다. 작정을 하고 장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서 발품을 팔면서 어디에서 무엇을 파는지를 파악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유성장은 워낙 많이 다니다보니 골목 입구에서 얼마를 들어가면 모시 송편을 팔고 어느 골목을 돌면 돼지 껍데기 무침과 닭강정이 있는지를 아는 정도는 된다.

잔치국수와 김밥을 곁들여서 약간 늦은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무, 쪽파, 생강, 오이, 양파, 양념닭발, 고춧가루, 그리고 홍시를 샀다. 닭발과 돼지껍데기 무침은 집에서 먹은 적이 없는데 딸아이는 그 맛을 알아서 너무나 좋아한다.

광역시에서 열리는 정겨운 장터는 사람들의 사는 내음이 흠씬 풍겨나는 곳이다. 검정 플라스틱 봉지의 사용을 조금만 더 줄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독서 기록 - [전환의 시대] 외 네 권


전환의 시대

  • 박노자 지음
선생님이 학생에게 존댓말을 하는 사회, 입시가 사라지고 명문대학도 사라져서 모두가 무상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는 사회, 군대가 모병제가 되는 사회, 아프면 무상으로 치료받고 집이 필요하면 공공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하는 사회, '여자 같은 남자'라는 말이 남성에게 최고의 칭찬이 되는 사회, 그리고 주말에 바람 쐬라 평양에 다녀오는 사회.

놀 줄 아는 그들의 반격

  • "꾸준한 딴짓으로 기회를 만드는 세대"
  • 오바라 가즈히로 지음|장은주 옮김

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 조윤호 지음

생명의 설계도 게놈 편집의 세계

  • "게놈 편집은 우리와 생명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 NHK 게놈 편집 취재반 지음|이형석 옮김
게으른 생물학자는 논문 대신 이 책을 읽음으로써 CRISPR-Cas9 시스템 개발의 역사와 현황 및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스워브(Swerve) ★★★

  • "나를 계속 넓히며 일하는 사람들의 6가지 비밀"
  • 닉 러브그로브 지음|이지연 옮김
전문가들에게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건 제 분야가 아닌데요'하면서 한 발 물러서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 자신도 그런 경향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마치 공돌리기를 하듯 소관부처가 아니니 책임을 지기 싫다는 뜻도 되겠다. 평생 직업도, 평생 직장도 없는 시대에 한 우물만 파다가는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기 일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은 어떻게 하느냐고? 단순 계산으로도 평생 예닐곱 차례의 전문가가 될 기회가 충분히 있다. 폭넓은 경험과 도전을 하라.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43번 오극관(43 power pentode) 싱글 앰프 프로젝트 - [9] 전원 트랜스 추방

진공관 앰프를 만든다고 해서 반도체 부품을 일절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진공관 앰프의 특성 혹은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 즉 출력관과 출력 트랜스 - 나머지는 현대적인 부품으로 구성을 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공관 앰프 특유의 소리는 초단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진공관으로 프리를 구성하고 반도체로 출력단을 만드는 앰프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Lenard Audio Institute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링크).
The heart of a valve amplifier is the output valves and output transformer.   Only the output valves and output transformer contribute to the unique sound character that makes it distinctly different from a solid-state amp.
그래서 나는 이를 믿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출력단과 출력 트랜스라는 것.

갖고 있던 전원 트랜스를 이용하여 B+ 전원과 히터 전원까지 감당을 하려니 트랜스를 두 개나 써야 하고 덩달아 배전압 정류회로까지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초단/드라이브단에 OP amp 회로를 쓰기로 결정하고 나니 기왕 이렇게 된 것, DC-DC 스텝 업 부스터 모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그림과 같은 엽기적인 구성의 앰프가 되고 말았다. SMPS 기반의 어댑터와 부스터가 만들어내는 높은 주파수의 노이즈가 범벅인 상태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청 주파수 범위가 아니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MT3608을 사용한 부스트 모듈은 바로 어제 국내에서 구입하였다. 주문에서 배송 완료까지 24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가격은 하나에 1,100원이었다. 이번 전원부 개조작업의 핵심 역할을 한 고전압 부스트 모듈을 eBay에서 구입하였는데 주문에서 배송까지 무려 45일 가까이 걸렸다. 이렇게까지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까지 취미 제작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LF353 OP amp를 이용한 증폭회로는 원래 +/- 15 V 정도(최대 18 V)의 양전원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번거로운 일이므로 단전원 어댑터를 이용하되 저항과 캐패시터로 이를 반으로 나누어서 간이 양전원을 공급하고 있다.

OP amp를 이용한 전압증폭회로에서는 저항의 비율을 이용하여 수백배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전원전압을 넘어갈 수는 없다. 제이앨범 매니저의 설계에 의하면 43 오극관 싱글 회로를 적정 출력으로 구동하려면 40 V 가까운 범위를 스윙해야 하는데, 내가 마련한 OP amp 회로에서는 출력이 약간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서 제이앨범의 힌트에 따라서 오디오용 트랜스포머를 사용해 본 것이다. 신호의 크기를 가감없이 전달하려면 600 Ω : 600 Ω 트랜스포머를 쓰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조금이라도 증폭을 하기 위해서 IPT-14라는 것을 뒤집어서 사용하였다. 원리적으로 주파수 특성, 특히 저음부의 전달에서 손실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귀로 듣기에는 아주 만족스럽다. 출력단을 위한 12 V 어댑터로 OP amp 드라이브단까지 전원을 공급하고, 권선비가 더 높은 트랜스포머를 쓰면 더욱 간단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내의 웹사이트에서 IPT(input transformer)와 OPT(output transformer)라는 것을 찾으면 두어 가지 종류의 것이 나온다(예: IC114). 그런데 그 용도를 도대체 모르겠다. 전자회로 실습용으로 만드는 전자새 키트 혹은 라디오 키트 말고는 이 부품들이 쓰이는 곳이 보이질 않는다. 권선비와 임피던스비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좀 더 조사를 해 볼 예정이다.

어찌되었든 오늘은 그림에서 소개한 다이어그램대로 구성을 마쳤고, 무난한 성능을 보였다. 25 V를 만드는 부스터 모듈이 다소 뜨겁기는 한데 55도를 넘을 것 같지는 않다. 며칠동안 테스트를 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 확인한 다음 적절한 섀시를 꾸며보도록 하자.



11월 4일에 추가한 글

MT3068 모듈을 잘못 건드려서 두 개를 망가뜨렸다. 12 V 어댑터의 자체 보호 기능이 있어서 망가진 모듈이 단락 상태가 되었지만 자동으로 전원이 차단되어서 더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만든 SMPS를 사용했다면? 아무런 보호 기능이 없어서 어디선가 연기가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반도체 소자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파괴되면 도통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별도의 24 V 1.5 A어댑터를 사용하여 프리앰프와 진공관의 히터를 연결해 두었다.

용량이 큰 24 V 어댑터가 있다면 히터와 프리앰프에는 직접 전원 공급을 하고, 부스터를 이용하여 고전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모니터용 24 V 어댑터를 구해서 이러한 구상대로 연결을 해 보았지만 '웅-'하는 심한 잡음이 발생하였다. 이미 갖고 있던 전원 트랜스와 정류회로를 조합하여 직류를 만들어 보았지만 이것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용량 캐패시터를 아무리 덧대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앰프 전체를 하나의 어댑터로 구동하려면 프리앰프의 출력은 IPT로 아이솔레이션해야 된다. 왜냐하면 OP amp에 공급되는 양전원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전원을 분할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급전압의 1/2에 해당하는 곳을 그라운드로 삼아서 움직이게 된다. 고전압을 만들어내는 부스터는 입력전압쪽과 분리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진공관 전력증폭회로의 그라운드는 전원의 음극 및 OP amp로 공급되는 직류의 그라운드(신호의 그라운드가 아니라)와 연결된 상태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OP amp 출력의 그라운드를 메인 회로에 연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IPT를 중간에 넣으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

12 V 5 A 어댑터와 부스터로 155 V를 만들고 히터(24 V)는 다른 어댑터로 점화하는 것이 현재까지의 최선이다. 전체 구성도는 다음 그림과 같이 바뀌었다.

프리앰프보드를 너무 만지작거리다가 그라운드 신호선의 납땜이 떨어져서 스피커가 부서질듯 '두두두두...'하고 울리는 소음을 접하기도 했다. 출력단자에 거의 전원전압 그대로가 검출되어서 처음에는 OP amp가 망가진 줄로만 알았다. 자작 취미를 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모든 일은 모두 다 경험하는 것 같다.

11월 28일에 추가한 글

MT3608 모듈은 한번에 4개를 구입해 놓았었는데 바로 어제까지 전부 망가지고 말았다. 납땜을 하면서 칩에 손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마지막 것은 볼트로 결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낳았다. 25V 0.6V를 출력으로 뽑는 것이 그렇게 무리였을까? 분명 specification에서 지정한 수치 이내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칩과 코일에서는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의 열이 나지만 특별히 방열판을 달거나(달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른 용도로 이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