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흔적이 거의(혹은 전혀) 없는 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책장을 넘긴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책갈피를 넘기면서 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기술해 나가고 있는데, 도무지 최근 1-2년 내에 나온 책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책의 앞부분으로 가서 속표지쪽으로 되돌아 가 보았다. 원제는 Radical Evolution이고 2005년에 나온 책을 <지식의숲>에서 번역하여 2007년에 발간한 것이었다. 10년 전에 국내에 발간된 서적을 지금 도서관에서 구입했다는 것은 발간되었다가 기억속에서 잊혀지는 수많은 책 중에서 지금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책'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증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기술적인 내용을 다루는 건조한 문체에 워낙 길들여져 있어서 그런지 도입부와 주변 상황을 다소 길게 묘사하는 저자(조엘 가로)의 글이 익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소설책에 더 맞는 문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보니 곧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진화란 아주 소박하게 표현하자면 무작위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적 변이체 중에서 주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 말하자면 그러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경쟁에서 이기고 같은 특성을 갖는 자손을 남들보다 더 많이 남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 것이 집단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이윽고 새로운 종을 창출한다는 이론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가 사라지는 것도 진화의 한 과정이다.
그러면 무엇이 '급진적 진화'인가? 미국의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서 지원하는 온갖 엉뚱하고 기발한(결국은 군인의 전투력 향상을 위한) 기술처럼, 생물학적 진화처럼 수십만년이 걸려도 만들어지기 어려운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 체내에 저장된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여 먹지 않고도 5일 동안 싸우는 병사, 외골격 형태의 장비를 장착하고서 수백 킬로그람의 짐을 나르는 병사... 이러한 기술들을 소위 GRIN(Genetic, Robotic. Information, Nano) 기술이라 부른다. 책이 나온지 이제 12년 정도가 지났으니 현재 기준으로 이러한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리 생물학적 진화가 지속된다고 하여도 시속 300 km로 달리는 치타나 5 미터 높이로 뛰어오르는 벼룩이 언젠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인간이 갖는 급진적 진화는 기술에 의한 것이므로 그 한계는 상상력을 넘어선다. 물론 그 자녀에게 이 능력이 '유전'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기술이 필요하고 유용함을 인지시키고, 더불어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면 이를 상속시킬 수 있다. 즉 다음 세대로 분명히 전달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기하급수적 변화의 커브를 타고 있는 요즈음, 이것이 인간의 본질까지도 변화시킬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시나리오(천국, 지옥, 그리고 주도)를 전개하였다.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미래의 모습에 대하여 엄밀하고 논리적이면서 상상상적인 이야기로, 예측 그 자체가 아니며,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인간이 혁신에 적응하는 방식에 대한 라이언과 그로스의 1943년 보고서를 소개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192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생산성 높은 옥수수의 보급이 어떻게 수세대에 걸쳐서 사회를 바꾸어놓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자가 된 농부가 있는 반면, 더 많은 땅과 트랙터를 바련하기 위해 융자를 하는 것을 거부한, 즉 변화를 거부한 소규모 농장들이 망하면서 일부 주에서는 인구가 줄기도 하였다. 첫번째 부류는 강박적으로 새로운 것과 모험을 추구하는 혁신자(innovator)로서 전체 인구의 약 2.5%이다, 다음은 대중보다 약간 앞서 나가면서 사회 조직에 훨씬 밀접하게 연결된 조기 수용자(early adaptor)이다. 이는 인구의 약 1/7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조기 다수(early majority)이다. 인구의 가장 많은 수인 약 1/3을 차지하는 이들은 결코 앞서 나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다음은 오래된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그들의 숨통을 조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선택하는 후기 다수(late majority)로서 역시 인구의 약 1/3을 차지한다. 마지막으로는 어떤 변화에도 굴하지 않는 최후수용자(lagger)가 있다. 이러한 분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GRIN 테크놀러지를 적극 수용하는 사람을 강화인(enhanced), 거부하는 사람은 자연인(natural), 그리고 그저 나머지로 인류 집단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천국 시나리오
Music synthesizer의 개발자라고만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레이 커즈와일이 이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공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여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질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리는 시나리오이다. 즉 인류는 특이점(singularity)를 곧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특이점이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언급하는 '가르강튀아'(gargantua, 블랙홀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던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모든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이 출현하는 시점(위키피디아 - 기술적 특이점)을 말한다. 커즈와일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 when humans transcend biology)>를 꼭 읽어봐야 되겠다.
지옥 시나리오
컴퓨터 과학자 빌 조이를 만나는 것으로 이 챕터를 시작하고 있다. 빌 조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업자이고 BSD Unix 개발의 핵심 개발자였으며, vi 에디터의 개발자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찌보면 매일 벌어지는 나의 일상 업무에서 늘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커즈와일을 만나고 나서 2000년 Wired에 기고한 Why the future doesn't need us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한글 번역본은 녹색평론 55호 2000년 11-12월호를 참조하라. 조엘 가로는 빌 조이와 인터뷰를 하면서 강화인, 자연인, 나머지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정의하였다(288쪽)
- 강화인은 GRIN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더 빠르게 사고하고, 더 오래 살고, 모든 것을 기억하며, 어느 것에도 접속될 수 있고, 발달된 근육을 갖고, 그 상태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며, 살이 찔 걱정이 없으며, 질병을 걱정하고, 언제까지나 섹시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변형을 위해서라면 어떤 가라도 기꺼이 치르려 한다. 강화인이란 자신의 마음과 기억과 대사와 성격 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원래 상태의 인간으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 자연인은 그와 같은 기회에 접근 가능하지만 마치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현대의 쾌락을 거부하듯, 채식주의자들이 고기를 피하듯, 그와 같은 기회들을 거부한 사람들을 말한다. 심미적, 도덕적, 정치적 이유 등으로 그들은 그와 같은 기술의 결과, 특히 의도치 않았던 결과에 뒷걸음질 친다. 자연인들은 강화인이 될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원래 상태의 인간이다.
- 나머지는 경제적 혹은 지리적 이유로 강화 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화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증오한다. 즉 '나머지'는 강화인이 될 기회를 갖지 목한 원래 상태의 인간이다.
주도(prevail) 시나리오
미래는 미리 결정되어있지 않으며 인류는 스스로의 운명과 싸워나가야 한다. 변화의 커브에 대한 저항이 세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우리가 주도 시나리오에 접어들었다는 지표의 하나가 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어쩌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정책을 둘러싼 곳에서만 국한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뒤늦게나마 이런 책을 접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요즘 연구하고 있는 항생제 내성 세균 유전체 역시 인류가 천국 시나리오에 따라 숨가쁘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히려 감염균을 진화시켜서 마치 거꾸로 든 칼처럼 다시 인류를 위협하는 지옥 시나리오를 따라 행동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핵전쟁이나 연구실에서 터져나온 안전 문제가 아니라 바로 AI에 의한 일자리의 감소일지도 모른다. 조엘 가로의 12년전 미래 예측이 100% 맞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제시한 비관과 낙관 사이의 균형잡힌 시각이 큰 앞날을 설계하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책으로부터 인상적인 구절을 몇 가지 인용하고자 한다.
(259쪽: 진 로덴베리의 오리지널 <스타트랙> 시리즈의 일급 지령(Prime Directive), 즉 우주 연방의 최고법) 감각을 가진 모든 종의 권리로서 각 종의 정상적인 문화적 진화에 맞추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면 따라서 스타 함대에 소속된 자 중 누구도 외계 생명과 그들의 문화의 건강한 발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개입에는 우월한 지식, 힘, 기술을 그와 같은 우월한 수준을 현명하게 다룰 능력이 없는 사회에 도입하는 것도 포함된다. 스타 함대 소속원은 설사 자신의 생명이나 우주선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급 지령을 어겨서는 안 된다. 오직 이미 위반된 규칙을 바로잡기 위해서나 그와 같은 문명이 사로고 오염된 경우에 한하여 예외를 둔다. 이 지령은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가장 높은 도덕적 책임을 수반한다.
(453쪽: 생명보수주의자(bioconservative) 레온 카스키의 말) 그는 심지어 고통과 노화와 죽음의 경험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풍요로운 삶은 늙지 않는 몸과 고민 없는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삶의 유한함을 염두에 두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오직 우리가 태어나고, 나이 들고,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쇠퇴하고, 죽어가는, 또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친밀한 인간관계로 가득할 삶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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