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기간 동안 읽으려고 고른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마이클 바스카 저/최윤영 옮김의 <큐레이션>이다. 큐레이션이라고 하면 보통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고르고 전시하는 일을 말한다. 큐레이션은 원래 '보살피다' 혹은 '돌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ur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큐레이션은 모든 분야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선별, 조합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재창조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허핑턴포스트코리아 HUFF BOOKS). 지나친 선택의 자유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요즘 - 오죽하면 '선택 장애'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 가짓수는 적더라도 잘 선별된 아이템만을 접하면 우리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이를 다른 방면으로 적용하자면 인터넷 공간에 올릴 사진과 글을 정성스럽게 다듬는 행위도 큐레이션인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큐레이션의 핵심 활동은 선택과 배치이다.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가서도 우리는 항상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어떤 것은 용량별 단가를 같이 표시하여 선택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관련된 물건 여럿을 함께 묶은 기획 상품(예를 들어 면도기, 교체용 면도날, 그리고 면도용 크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판단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에게는 면도기가 그런 존재이다. 훨씬 더 많은 선택 앞에 직면한 여성과 주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PB 상품을 제외하면 메이저 면도기 제조사는 질레트, 도루코, 쉬크 세 곳뿐이지만 마트의 진열대 앞에서 나는 늘 좌절하고 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교체용 면도날은 의외로 비싸다.
- 교체용 면도날은 한 회사에서도 여러 모델이 나오고, 포장 단위도 천차만별이다.
- 면도날의 호환성도 제각각이다.
- 면도날만 여러개 사려고 하다가 면도기 본체까지 끼워진 제품이 상대적으로 더 싸다는 현실을 발견한다.
- 면도기 본체는 그다지 내구성이 높지 않다. 따라서 교체용 날만 추가로 사러 왔다가 4번 현실을 발견하고 동시에 본체가 많이 낡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면도기+면도날 제품을 사야 할 것만 같은 고민에 빠진다.
- 3번 현실을 생각하면 쓰던 면도기 모델(혹은 제조사)에 집착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회사 제품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시장 점유율이 가장 낮은 쉬크 제품을 애용해 왔다. 울트라 - 프로텍터 - 쿼트로 - 하이드로 등 출시 순서대로 꾸준히 사용을 해 왔고, 종종 도루코의 것을 쓰기도 하였다. 질레트는 한번도 쓴 일이 없다. 마지막까지 쓰던 쉬크 하이드로의 면도날이 너무 무뎌져서 잘 들지 않는 상태가 되었지만, 새 면도날(면도기?)을 고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총 네 곳의 상점(마트 두 번, 동네 수퍼마켓 두 번)을 들른 끝에 오늘 겨우 도루코의 PACE XLII('세계최초' 6중날, 날은 2 개 포함) + PACE 7 II 면두날 2 개(이건 7중날이다!) 묶음 제품을 골랐다. 처음에는 사용하던 쉬크 하이드로에 맞는 교체용 날 묶음을 살 생각이었으나 면도기 본체의 실리콘 손잡이 부분에 슬슬 검정색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본체 또한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도루코였나? 면도기 브랜드 중에서 PB 제품을 제외하면 가격이 제일 저렴하고 또 국산품 애용의 측면도 있었다. 이걸 다 쓰면 아마도 다시 쉬크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습식 면도기를 오래 쓰려면 눕힌 상태로 보관하라고 한다. 칫솔통에 그냥 세워서 꽂아두면 본체 자루의 끝부분에 물이 맺히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이어서 곰팡이가 생긴다. 이런 이유로 벼려진 면도기 본체가 여럿 된다. 차라리 실리콘과 금속, 플라스틱 등의 복합재료를 쓰지 말고 그냥 금속으로만 만들면 세적하기도 쉬울텐데... 그러나 이는 제조사가 원치 않을 것이다. 교체용 면도날뿐만 아니라 본체도 이따금 새로 사지 않을 수 없는 '적당한' 만큼의 내구성을 갖는 것이 미덕일 것이다.
예전에는 위 그림과 같은 안전면도기(이미지 링크)가 공중목욕탕 샤워기 앞에 쇠사슬로 매달려 걸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지간히 숙련되지 않으면 얼굴을 베어 피를 보기 일쑤인 면도기를 여럿이 돌아가면서 쓰다니! 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한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있었던 것을. 초등학교(70년대 당시 용어로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여러 학생이 유리 주사기 하나로 돌아가면서 예방접종을 맞지 않았던가?
여기서 잠깐! 당시에 주사바늘을 소독이나 했었나? 지금 웹을 검색해 보면 알콜램프를 이용하여 주삿바늘을 소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주사'라는 명칭이 나왔다는...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불주사'는 특유의 불룩한 흉터를 남기던 BCG만을 가리키는 것 같았는데? 해마다 여름이 되면 공포의 대상이었던 장티푸스-콜레라-뇌염 예방주사를 맞을 때 항상 소독용 알콜램프가 따라왔었나?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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