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2일 목요일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삼엽충

이번에도 아들은 독특한 생일 선물을 보내 주었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를 보니 책이 분명한데 다른 것이 같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삼엽충('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그리고 진짜 삼엽충의 화석 2점. 이 책의 원제는 <Trilobite: Eyewitness to evoution>이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방어 자세를 취한 Austerops sp.(왼쪽)와 Flexicalymene ouzregui. 오른쪽 것(아쉽게도 라벨지에 인쇄된 학명 철자가 틀렸음)은 오르도비스기의 지표 화석이라고 한다. 판매처는 루페우스 코리아.

저자인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1946-2025)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수석 고생물학자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었으며, 과학의 대중화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 지난 3월 <가디언>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였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른 책을 읽느라 아들이 보내준 <삼엽충>은 지난 화요일 부산 BEXCO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KTX에 밀려서 대전-부산을 오가는 고속버스가 없어진 지금(도태 또는 멸종?), 전세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였다. 오늘 행사 참석을 위해 부산을 또 다녀 왔으니 이것 또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문학적이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푸른 눈동자(A Pair of Blue Eyes)>의 주인공이 영국 콘월(Cornwall) 지역의 해안가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위태롭게 매달렸다가 시야에 들어온 점판암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매달린 채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릴 때 주변세계의 익숙한 것들이 서서히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이트의 눈에 암석에서 약간 튀어나와 있는 박힌 화석 하나가 보였다. 눈이 달린 생물이었다. 죽어서 돌로 변했음에도 그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엽충이라고 하는 초기 갑각류의 일종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나이트와 이 하등생물은 죽음의 장소에서 마주친 듯했다. 마치 지금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손이 닿는 곳에 한때 살아 있었고 구해야 할 몸을 지니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29쪽).

하디는 이 지역에서 젊은 시절 건축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리처드 포티는 이 소설에 나오는 해안 지형을 답사하면서 소설의 이 구절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열 네살 때 삼엽충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들이 여자친구를 찾던 시기에 남웨일스 지방의 세인트데이비스 반도 절벽에서.

화석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서 치약과 함께 솔로 문질러 닦았더니 조각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세척하면 안된다!

포티는 이렇게 삼엽충에 매료되어 3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가 처음 박물관 직원이 되어 고생물학과에 배정되었을 때, '삼엽충에 관한 연구를 하는'이라고 적힌 직무설명서를 받아 들고 '즐기면서 돈을 번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77쪽). 그리고 평생을 삼엽충을 보러 다녔다. 새로운 삼엽충의 종을 찾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새로운 생물의 종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삼엽충이 얼마다 다양하고 정교한 생명체였으며, 어떻게 번성하고 사라졌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삼엽충의 눈은 정밀하고도 독특하다. 이러한 멋진 특성을 이어받은 현생생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꿈과 같은 상상이지만 만약 삼엽충의 DNA를 지금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삼엽충 진화가 단속적으로 이루짐을 선구적으로 발견한 루돌프 카우프만(1909-1941?, 위키백과)의 비극적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저미게 한다(198~203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2018년 흑백 영화 <콜드 워>를 몇 번이나 연상했는지 모른다. 1991년 우표 경매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편지와 엽서 묶음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슬픈 인생 결말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PubMed에서 리처드 포티의 논문을 찾아 보았다(검색 결과). 놀랍게도 매우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 Natl. Acad. Sci. USA)에 삼지창 모양의 구조를 머리에 달고 있는 새로운 삼엽충 Walliserops trifurcatus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었다. 이 내용은 302쪽에 나온다.

Trilobite tridents demonstrate sexual combat at 400 Mya. Gishlick AD, Fortey RA. Proc Natl Acad Sci U S A. 2023 Jan 24;120(4):e2119970120. doi: 10.1073/pnas.2119970120. Epub 2023 Jan 17. PMID: 36649420 (원문 링크) 보도자료 국내 기사

이 별난 삼엽충의 삼지창은 성적 경쟁을 위한 무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공작 수컷의 화려하고 거대한 장식 깃이나 사슴 수컷의 뿔을 연상해 보라. 출처: 그림 1(링크).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지금(인공지능의 파급력은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도대체 삼엽충이라니? 그리고 고생물학이라니?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은 10장 <눈이 있는자, 보라!>를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적으로 삼엽충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애써도 삼엽충학이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동원되는 시나리오를 짜낼 수가 없다. 이렇게 외롭고 무해하며 연구비를 따기 어려운 분야이지만. 그러다가 갑자가 어떤 연결이 이루어지면서 최첨단에 영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핵물리학이나 생리학(요즘 말로 이야기하자면 '바이오')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삼엽충 분야는 역사 전체를 살펴볼 여유가 있다.

탐구에 끝이란 없으며, 우리는 다음 절벽 뒤나 다음 셰일 조각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내 삼지창 삼엽충은 하나의 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키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했다.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더 메마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되리라고 예견한다... 앞으로 지식의 그물에 어떤 연결이 이루어질지 헤아리기는 더 어렵다. 그것은 다른 10겨 개 과학 분야의 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결이 계속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하며, 그것은 앞서 그런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303쪽).

고생물학은 장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한다. 한때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절멸한 생물을 탐구하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고, 환경·기후·지질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일례로 우리는도시화된 곳에 밀집해 살면서 지리적 여건과 심지어 기후까지도 기술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BEXCO에서 있었던 학술 행사에서 L박사는 합성생물학의 밝은 미래를 소개하였다. 발표가 끝난 뒤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생명체가 이런 공학적 원리에 저항하지 않던가요? (K대) L교수님 발표를 들으면 정말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러 군데 유전자를 한꺼번에 조작하면 수십 세대만 지나도 그 형질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이에 대해 L박사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챗GPT에 의하면 고생물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대한 시간의 거울에 비춰보게 하는 지적 자극'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포티의 글 중 Nature 2016년 9월 15일자에 발표한 신간 서평이 매우 인상깊었다('Dendrology: The community of trees', PubMed). Nature는 구독하지 않으면 전문을 접근할 수 없어서 내 맘대로 이 글의 번역을 여기에 올리지는 못한다. 짧게 소개하자면 이는 독일의 삼림 관리인 Peter Wohlleben의 책 <The Hidden Life of Trees: What They Feel, How They Communicate — Discoveries from a Secret World>에 대한 서평이다. 저자는 숲을 매우 정교하게 얽인 다층적 네트워크로 묘사하였음을 포티는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충분히 흥미로운 접근이지만, 이는 마무를 껴안으려 더 깊은 실재와 연결된다고 믿는 행위와 멀지 않다고 하였다. 즉, 나무는 엔트(Ents)가 아니라고 하였다. 엔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 생명체라고 한다. 포티의 글을 완벽하게 음미하려면 토마스 하디에 이어서 J. R. R. 톨킨의 책도 읽어 봐야 될 것 같다. 국내에도 소개된 포티의 또다른 저서 <나무에서 숲을 보다(원제: The Wood for the Trees)>도 구해서 읽어봄직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16년, 즉 포티가 Nature에 서평을 쓴 바로 그 해이다.

파손 방지를 위해 앞으로는 화석을 솔로 문질러 세척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되겠다. 

삼엽충 외골격의 상세 구조. 출처: British Geological Suervey(링크).


삼엽충 모양의 마우스 디자인. 출처: ATEC-DAB UTDallas 블로그에 게시된 Ashley D. Goodenough의 작품(링크).


무수한 화석으로 남은 삼엽충 앞에서 우리는 보다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달이나 다른 행성으로 자원을 찾으러 떠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AI가 발달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뜻하지 않은 아들의 선물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챗GPT에게 부탁하여 그린 그림.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드디어 달을 파먹기 시작할 것이다. 삼엽충 모양의 우주선에 달에서 채취한 광물자원을 싣고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삼엽충은 언젠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지도 모르는 우리 인류의 문명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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