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단체에서 만드는 계간지에 실을 원고(에세이) 청탁을 받았다. 원고청탁서와 이미 발간된 글 사례를 보니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는 형식의 글을 써야 될 것 같았다. 아주 짧은 회고록이라고 해야 하나... 벌써 그런 부류의 글을 써야 할 나이는 아닌데, 막상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손가락 끝에서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였다. 부탁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글을 쏟아 놓은 다음 이를 어떻게 줄여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다.
저자의 활동과 관련된 사진도 몇 장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행사 등에서 참여하면서 공식적인 용도로 쓸 수 있게 나 자신을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연구 초년생 시절에 만든 장비 사진 같은 것이 없는지 집에 보관되어 있던 사진 더미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의외로 흑백 사진이 많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가끔 흑백 사진을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 취미는 2천년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장식장 안을 채운 몇 대의 카메라와 렌즈는 작동 상태를 알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암실에서 확대기에 필름을 걸고 8x10" 인화지를 반으로 잘라서 노광한 후 현상과 정착을 하던 숱한 나날들이 떠오른다. 대학원생 시절, 전기영동 사진(폴라로이드) 등을 논문 투고용으로 보낼 수 있게 흑백필름으로 재촬영하여 인화해서 팔기도 하였다. 당시 바로 곁의 KRIBB에서도 알음알음으로 손님이 오곤 했었는데, 내가 KRIBB에 들어가서 이제 정년퇴직까지 남은 햇수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준에 이르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실험 사진이나 '청슬라이드'를 만들어 주던 어은동의 사진문화원이라는 곳이 기억이 난다. 구식 사진술에 대해서는 꽤 아는 편이지만, 글씨나 선으로 만들어진 원고를 발표용으로 비추기 위해 만들던 청슬라이드의 제작 원리는 지금도 도저히 모르겠다. 바탕은 청색, 글씨나 선은 투명하게 만들어지던 바로 그 슬라이드.
두 장의 흑백 사진을 골라 스캐너에 걸고 파일로 전환하였다. 30년 정도가 흘렀는데 전혀 빛이 바라지 않은 것을 보니 정착액을 아주 잘 씻어낸 것 같다.
먼저 가수 김정민의 사진.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1995년 정도였던 것 같다. 축제 때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공연으로 기억이 난다. 다른 사진에는 권인하와 박상민도 찍혀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성 댄스 가수 그룹도 있었고, 여성 트리오도 있었다. 네거티브에 촬영 정보가 기록되어 있으니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금방 찾을 수 잇다.
또 하나의 사진은 유성 장터에서 찍은 철창 속의 원숭이. 원숭이를 팔기 위한 것인지, 혹은 약을 팔기 위해 손님을 모으려고 곡예를 보여주면서 관심을 끌기 위한 출연진인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얼마 전 오창 분원에 갔을 때 영장류센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실험용 원숭이가 생각난다.
유성 장터에서 뻥튀기를 만드는 할아버지를 찍은 흑백 사진도 있다. 월간 사진예술의 독자 사진전 단사진 부문에 출품하여 총 세 번 입선을 했었다. 소개하자면 바로 그 뻥튀기 할아버지, 위에서 김정민을 찍었던 같은 날 가수 박상민을 촬영했던 흑백 사진, 그리고 아내를 찍었던 컬러 사진이다(11년 전에 쓴 관련 글 - 20년 전의 월간 <사진예술>).
스캔을 하고 보니 노출, 네거티브 현상, 인화 모두 무난하게 된 것 같다. 컬러 필름을 확대기에 걸고 흑백 인화지에 장난삼아 인화한 것도 꽤 된다. 이 경우 콘트라스트가 매우 나쁜 결과물이 나오므로 별로 권장할 것은 못 된다.
지금은 주말 나들이를 하루 다녀와도 휴대폰으로 백 장 가까운 사진을 찍게 되지만, 구글 포토로 전부 백업해 버리고 만다. 클라우드에 오른 수천 장의 사진은 지리정보와 날짜 및 찍힌 인물/사람을 이용하여 아주 스마트하게 검색이 된다. 그러나 예전에 정성들여 찍어서 인화해 놓은 사진은 어떤가? 36매 필름 한통을 찍어서 인화해 놓고 가끔 들추어 보면 장면 하나 하나에 얽힌 사연이 전부 떠오른다.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지금의 것이 과거와 비교 불가일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지만,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추억의 양은 더 적어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여 다시 필름 사진기의 시대로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렌즈교환식 사진 장비를 무겁게 들고 다니기도 어렵고, 사진 재료를 구입하고 처리하는 데에도 비용이 많이 든다. 주머니 속에 간편하게 휴대하여 다니는 스마트폰의 편리함을 따라갈 방법이 없다.
가끔씩 구식 기술이 그리워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