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일요일

공주(公州)의 재발견

인기 프로그램 「전현무계획2」에 소개되었던 어떤 식당을 가기 위해 공주에 들렀다. 원조집이 아닌 다른 업체를 통해 이미 이 음식을 먹어본 일이 있던 아들의 말로는 대전-충남권에서만 잘 알려진 것으로서 다른 동네에서는 '괴식(怪食)' 취급을 받는다고 하였다.

과연 한 시간이나 대기하면서 먹을 가치가 있었을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줄을 서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또 먹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맥주 안주로는 적당해 보였다. 차라리 공주 특산물인 밤을 이용한 디저트류가 더 나았다. '여수(돌산도):갓 = 공주:알밤'이라는 비례식을 떠올려 보았다.


유별난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주변을 검색하여 '#17커피'라는 카페에 들렀다.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 앞 회전교차로에 접한 곳으로,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이 좋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향한 다음 목적지는 공산성. 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로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놓인 비석군을 살펴보았다. 공주는 이미 여러 차례 와 보았기에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공덕비(선정비 또는 송덕비라고도 부름)를 놓기 위해 주민들은 괜한 수고를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공주에는  정3품의 목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공주를 거쳐가는 모든 관찰사가 이곳 백성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훌륭한 관리였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관찰사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에는 공덕비를 과연 세우지 않고 지나갔을까? 혹은 어떤 관찰사가 머물다 가더라도 그저 관행이라는 이유로 비석을 세운 것일까? 혹시 아직도 관료 사회에 남아있는 '간부 모시는 날'(2025년 1월 조선일보 기사 링크)과 같은 폐습은 아니었을까?


여러 공덕비 중 이 사진의 가운데 것이 가장 특이하면서 조형미가 돋보인다.

조금 검색을 해 보니 2015년 장성신문에 실린 「공덕비 유감」이란 기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지만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부임하자마자 자기 밑의 아전들을 시켜 공덕비를 세울 돈을 모으게 했다. 이는 공덕비 건립이 조선시대 고을 수령의 공개적인 비자금 창구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각출했고 이를 비채(碑債) 또는 입비전(立碑錢)이라 부르며 성금의 일부만 공덕비 건립에 쓰고 나머지는 사또가 개인적으로 챙기는 돈 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력에 아첨하는 이방이나 아전들이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정조가 1789년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는 엄명까지 내린 것을 보면 공덕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공덕비에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나의 얄팍한 한자 실력으로도 그 뜻을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는 문구가 적힌 비석이 많았다.


어떤 비석에서는 다음 사진과 같이 永('길 영')을 다소 색다르게 새겨 놓았다. 마치 亠(돼지해머리 두) 부수 아래에 물 수자를 쓴 것 같이 보인다. 永은 내 이름에 쓰이는 한자라서 못알아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공산성 성곽을 올라 시계방향으로 2.66 km에 이르는 둘레를 걷기로 하였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있어서 힘겨워하던 아내도 전체 둘레를 다 돌고 나서는 무척 뿌듯해 하였다. 내가 달리기를 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워밍업이 되기 전까지는 힘들지만,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난 뒤 밀려드는 개운함과 성취감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서루를 비록하여 금강과 면한 곳은 돌로 쌓은 성벽이 있지만 이는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이고, 그 뒤편에는 토성 형태를 하고 있다. 중간쯤 돌았을 때 눈이 많이 와서 출입을 금한다는 작은 표지판이 놓인 것을 발견하였으나 포근한 날씨로 눈이 많이 녹은 터라 우리 부부를 비롯한 많은 탐방객이 이를 무시하고 성벽을 따라 돌았다.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를 배경으로.



누에 씨(알)을 보관하기 위한 잠좀냉장고. 19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연지와 만하루.


동문에 해당하는 영동루. 원래 현판이 없었으나 공주시에서 이름을 공모하였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도중 국방색의 긴 가방을 등에 멘 청년과 그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 둘을 만났다. 가방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활이라고 하였다. 

"양궁인가요, 국궁인가요?"

"국궁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공주 관광단지 안에 관풍정이란 국궁장이 있다고 한다. 전국 380여 국궁장의 종가 역할을 하는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이 떠오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성곽을 따라 걷는 것에 집중하느라 영은사(사찰)을 제외하고는 공산성 내부에 있는 많은 건축물과 유구를 둘러보지는 못하였다. 공산성 안에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475년 동안 공주(당시 웅진)이 백제의 도읍지였던 시절,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웅진 시대 왕궁터를 비정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며, 공산성 내부는 왕궁을 두기에는 매우 협소하다. 지속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언젠가는 그 답이 나오리라.

유난히 길었던 2025년 설 연휴 동안의 나들이는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2025년 2월 1일 토요일

실수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다

서울 출신이지만 대전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진 나에게 서울은 출장이나 관광 목적으로 들르는 곳이 되었다. 유난히 길었던 이번 설 연휴 마지막 날(어제), 국립중앙과학관에 차를 세워 놓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박물관 개장 시간부터 매우 많은 차량이 입구로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은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특별전인 「푸른 세상을 빛다 고려 상형청자」를 둘러보았다. 원래 유료 전시지만 설날을 맞아 무료로 입장을 허용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낸 뒤 4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가끔 들르던 쟈니 덤플링에서 점심을 먹고 앤트러사이트(Anthracite)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 카페 1층에는 반려견을 끌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다른 카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2층에 올라와 보니 이태원을 지나는 멋장이들은 여기에 다 모이는 것 같다. 앤트러사이트는 무연탄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카페(로스팅샵이라고 해야 하나?) 이름으로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로스팅한 커피가 마치 무연탄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오래된 건물을 적절하게 리모델링하여 결코 과하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태원에 처음 왔을 때는 지금은 없어진 빌리엔젤을 자주 들렀었다. 2018년에 이태원 빌리 엔젤의 추억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리움. 고미술이 좋아진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일까? 나는 물고기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분청사기를 특히 좋아하지만, 귀얄기법을 쓴 것도 좋아한다.







우리 딸아이와 같은 도자공예 전공자를 한숨짓게 했을 커다란 항아리.



다시 400번 버스를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405번을 타고 말았다. 버스가 크게 회전을 하더니 잠수교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오, 이런... 일단 반포한강공원·세빛섬 정류장에 내렸다. 이곳에 인공섬이 세 개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언제 또 여기에 오겠는가 싶어서 세빛둥둥섬에 있는 카페에 들러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셨다.



이곳을 벗어나서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려니 마땅한 대중교통 이용 경로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기로 했다.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것은 서울 출신인 우리 부부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날씨가 몹시 춥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수교를 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역시  '서울'이란 선택받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는 것이겠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 모두가 여기에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아, 그렇지도 않구나. 어차피 수도권에는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살고 있지 않은가. 두 아이 중 하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절반은 성공한 것인가, 혹은 수도권 인구 집중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인가? 서울 출신 남녀가 만나 대전에 살면서 자녀 둘 중 하나를 서울로 보냈으니 인구 분산에 더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자녀 중 하나는 미국에 있으니.

서울이 부러운 것은 문화적 혜택 때문이다. 편리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누릴 수 있다. 의료 혜택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대전으로 돌아온 나는 갑천변을 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잠수교를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약간을 달려서 1월 달리기를 마감하였다. 조금만 달리면 90 km를 채우는 것으로 1월을 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뛰었으니 오늘은 가볍게 3 km만 채우고 싶었지만 아침에 빨아 놓은 운동화를 대신하여 고른 신발이 너무 불편하여 채 2 km도 달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달리기 반년째를 맞아서 가장 많은 거리를 달린 달이 되었다. 하루 걸러 하루씩 매번 6 km를 달린 셈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달에 100 km를 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페이스 단축은 달성하기 어려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