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프로그램 「전현무계획2」에 소개되었던 어떤 식당을 가기 위해 공주에 들렀다. 원조집이 아닌 다른 업체를 통해 이미 이 음식을 먹어본 일이 있던 아들의 말로는 대전-충남권에서만 잘 알려진 것으로서 다른 동네에서는 '괴식(怪食)' 취급을 받는다고 하였다.
과연 한 시간이나 대기하면서 먹을 가치가 있었을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줄을 서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또 먹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맥주 안주로는 적당해 보였다. 차라리 공주 특산물인 밤을 이용한 디저트류가 더 나았다. '여수(돌산도):갓 = 공주:알밤'이라는 비례식을 떠올려 보았다.
유별난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주변을 검색하여 '#17커피'라는 카페에 들렀다.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 앞 회전교차로에 접한 곳으로,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이 좋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향한 다음 목적지는 공산성. 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로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놓인 비석군을 살펴보았다. 공주는 이미 여러 차례 와 보았기에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공덕비(선정비 또는 송덕비라고도 부름)를 놓기 위해 주민들은 괜한 수고를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공주에는 정3품의 목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공주를 거쳐가는 모든 관찰사가 이곳 백성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훌륭한 관리였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관찰사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에는 공덕비를 과연 세우지 않고 지나갔을까? 혹은 어떤 관찰사가 머물다 가더라도 그저 관행이라는 이유로 비석을 세운 것일까? 혹시 아직도 관료 사회에 남아있는 '간부 모시는 날'(2025년 1월 조선일보 기사 링크)과 같은 폐습은 아니었을까?
여러 공덕비 중 이 사진의 가운데 것이 가장 특이하면서 조형미가 돋보인다. |
조금 검색을 해 보니 2015년 장성신문에 실린 「공덕비 유감」이란 기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지만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부임하자마자 자기 밑의 아전들을 시켜 공덕비를 세울 돈을 모으게 했다. 이는 공덕비 건립이 조선시대 고을 수령의 공개적인 비자금 창구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각출했고 이를 비채(碑債) 또는 입비전(立碑錢)이라 부르며 성금의 일부만 공덕비 건립에 쓰고 나머지는 사또가 개인적으로 챙기는 돈 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력에 아첨하는 이방이나 아전들이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정조가 1789년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는 엄명까지 내린 것을 보면 공덕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공덕비에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나의 얄팍한 한자 실력으로도 그 뜻을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는 문구가 적힌 비석이 많았다.
어떤 비석에서는 다음 사진과 같이 永('길 영')을 다소 색다르게 새겨 놓았다. 마치 亠(돼지해머리 두) 부수 아래에 물 수자를 쓴 것 같이 보인다. 永은 내 이름에 쓰이는 한자라서 못알아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공산성 성곽을 올라 시계방향으로 2.66 km에 이르는 둘레를 걷기로 하였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있어서 힘겨워하던 아내도 전체 둘레를 다 돌고 나서는 무척 뿌듯해 하였다. 내가 달리기를 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워밍업이 되기 전까지는 힘들지만,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난 뒤 밀려드는 개운함과 성취감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서루를 비록하여 금강과 면한 곳은 돌로 쌓은 성벽이 있지만 이는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이고, 그 뒤편에는 토성 형태를 하고 있다. 중간쯤 돌았을 때 눈이 많이 와서 출입을 금한다는 작은 표지판이 놓인 것을 발견하였으나 포근한 날씨로 눈이 많이 녹은 터라 우리 부부를 비롯한 많은 탐방객이 이를 무시하고 성벽을 따라 돌았다.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를 배경으로. |
누에 씨(알)을 보관하기 위한 잠좀냉장고. 19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
연지와 만하루. |
동문에 해당하는 영동루. 원래 현판이 없었으나 공주시에서 이름을 공모하였다고 한다. |
성곽을 따라 걷는 도중 국방색의 긴 가방을 등에 멘 청년과 그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 둘을 만났다. 가방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활이라고 하였다.
"양궁인가요, 국궁인가요?"
"국궁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공주 관광단지 안에 관풍정이란 국궁장이 있다고 한다. 전국 380여 국궁장의 종가 역할을 하는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이 떠오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성곽을 따라 걷는 것에 집중하느라 영은사(사찰)을 제외하고는 공산성 내부에 있는 많은 건축물과 유구를 둘러보지는 못하였다. 공산성 안에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475년 동안 공주(당시 웅진)이 백제의 도읍지였던 시절,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웅진 시대 왕궁터를 비정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며, 공산성 내부는 왕궁을 두기에는 매우 협소하다. 지속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언젠가는 그 답이 나오리라.
유난히 길었던 2025년 설 연휴 동안의 나들이는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