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의 (구)풍문여고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서울공예박물관 전시1동 1층에는 마치 도넛을 닮은 둥근 고리 모양의 나무 의자가 있다. 탄성이 있는 얇은 나무 재질로 만들어서 앉으면 푹신한 느낌이 든다. 이 의자를 볼 때마다 옛날에 읽었던 동화가 생각이 난다.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뱅글뱅들 돌다가 녹아 내려서 치즈가 되었다는... 바로 그 노란 치즈를 닮았다.
도대체 그 동화는 무엇이었을까? 구글 검색을 통해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The Story of Little Black Sambo>, 즉 '꼬마 검둥이 삼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동화로 스코틀랜드 작가 헬렌 베너만이 1899년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동화라서 아마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도 일본쪽 번역물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많은 잡지와 참고서를 비롯한 많은 서적이 일본의 것을 참고하여(때로는 원전을 밝히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었던가.
사실 이 동화는 기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인종차별적인 내용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고 한다. 배경이 인도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흑인으로 묘사한다거나, 인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프리카계 이름을 주인공에게 붙인 것도 적절치 않았다. 백인이 아니면 전부 비슷한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서울' 아니면 '지방'의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도인이나 흑인들은 이 책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모든 동아시아인을 베트남 삿갓(Nón lá)을 쓴 것으로 묘사하면 기분이 좋을 이유가 없듯이.
1980년대였던가, 한국을 포함한 몇 개 국가가 참여한 <국경 없는 게임>이라는 것을 TV에서 본 일이 있다. 여기에 나왔던 한국 참가자(실제 사람이었는지 맞추기 게임을 위해 인형 모양의 것을 세워 놓은 것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음) 베트남 삿갓을 쓰고 있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그 게임의 뒷이야기에 대한 방송 클립이 남아 있었고, 게임 진행 전체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따라서 내 기억이 100% 정확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고 이주일을 스타로 만들었던 코미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출발>(1980)의 초기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지만 검증을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건축물을 짓는 현장의 해프닝을 정말 재미있게 그렸었다. 따지고 보니 결국 오늘의 주제인 '건축물'과도 연결이 된다.
그림 출처: Cape Gazette(2016). |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특별기획전 <공예로 짓는 집>이 열리고 있다. 공예와 건축은 규모라는 측면에서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편견도 많이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형'의 것으로서 그것(=건축물)이 갖고 있는 의미에 비해 다들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갑자기 큰 돈을 벌어서 수백억 원 정도를 모교에 기부한다고 해 보자. 이 돈으로 장학금을 줄 수도 있고, 새로운 학과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 이름을 딴 건물을 짓는 데 쓸 것이다. 말 그대로 건축물을 만들면 오랫동안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정치가가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을 때 가장 흔하게 하는 일이 바로 건축물을 짓는 것 아닌가.
만약 인류가 멸망한 뒤 수억 년이 지나서 외계인이 지구를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오로지 우리가 지구에 남긴 건축물로만 과거 이 행성에 살았던 생명체를 평가할 것이다.
딸아이가 디자인 및 조형과 관련한 학과를 지망하면서 몇 군데 대학의 수시 입시를 위한 과거 출제 문제를 접한 일이 있었다. 그 문제에서는 마치 건축이나 디자인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인 것 같은 자부심이 넘쳐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생물학자는 그렇게 대담한 포부를 갖고 있지는 못한데 말이다. 건축가들이 자주 한다는 말,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또는 '사람은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윤석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공간(또는 건축물)보다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기억해 두자.
음악이나 문학과 같이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 인류의 유산은 (대규모) 건축물처럼 즉각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효과를 주지는 못한다. 무형적 유산은 이를 감상하고 내 감정으로 녹여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인류의 유산에 더욱 쉽게 감동하고 빠져드는 것 같다. 이런 사연 때문에 나는 건축물과 관련된 전시나 이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편견을 조금은 없앨 수 있었던 것 같다.
건축가 엄덕문(1919~2012)의 말 '공예가 커지면 인간이 그 속에 들어가고, 그 공예품은 생명을 품는 그릇이 된다. 그것이 건축이다' 자체는 정말 멋있었다. 실용적인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늘 꼼지락거리는 나의 행동과 건축 사이에 이런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니. 오늘 글의 제목인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말은 정확한 출처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챗GPT에게 물어보니 르 코르뷔지에나 발터 그로피우스(바우바우스 창시)와 같은 20세기 근대 건축가들의 철학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엄덕문은 살아 생전에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과천정부총합청사와 같은 중요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그러나 통일교와의 연관성이라는 낙인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에 대한 정보는 2012년 매거진 한경에 실린 엄덕문, 지상에서 종교와 건축의 우상이 된 기인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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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어느 집이나 이런 나무 책상이 있었다. 서랍은 뻑뻑하고, 성장기에 키가 자라면서 몸에 맞게 조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책상이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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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도배지를 수집하고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
얼마 전에 CAD로 도면까지 그려 놓고 아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진공관 앰프의 새시(나무틀을 포함하여), 숟가락, 의자... 이들은 모두 '공예(crafts)'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과 건축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어느 유명한 건축가의 말을 발견하고 이에 공감하게 된 것은 이번 전시회 관람의 아주 중요한 성과하고 생각한다.
현대의 공예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건축물에서는? 공간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정신에 너무 빠져들면 풍수지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공간이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공간 자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고자하는 사람이 공간을 이용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뭔가를 계속 만들어 나가고 싶다. 비록 집을 설계하고 짓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리고 '무형'의 것이지만 음악을 창작하는 작업 역시 그러하다. 거기에는 사상을 담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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