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상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는 현실 세계가 가장 많이 담겨 있지만, 희망사항이나 불만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엄청난 침투력을 발휘한다. 특히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어법에 맞지 않는 신조어가 너무나 빨리 퍼져나가는 것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오늘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예비(豫備)○○'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인터넷 시대가 되기 전부터 쓰여 왔는데, 요즘은 '○○'에 해당하는 낱말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예비 수험생, 예비 신랑·신부, 예비 고3. 예비 엄마·아빠(곧 출산을 앞둔), 예비 대학생...
이러한 용어를 쓰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갖는 조바심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리고 대개 그 '○○'는 열심히 준비하면서 맞아야 하는 가치있는 그 무엇인가가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비'라는 낱말을 사전에서는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거나 정식으로 하기 전에 그 준비로 미리 갖춤'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 '○○'은 거의 100% 달성되는 과정만을 일컫는다. 즉 쉽게 설명하자면 대학 합격증을 받고 입학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예비 대학생이 될 수 있다. 수능시험 전의 고3생이나 재수생 신분으로는 언감생심 예비 대학생이라는 말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본인의 노력와 운 여하에 따라서 대학생이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즉 (취업 준비생 ≠ 예비 직장인)의 공식이 성립하게 되며, 결국은 '예비'라는 낱말이 내포하는 다양한 뜻의 폭을 지극히 좁혀서 쓰는 것이 된다. '○○'가 곧 될 사람으로서 이미 적법한 자격을 갖춘 자의 자부심을 은연중에 흘리고도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곧 임박한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미덕이다. 비록 그것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 앞에는 보통 '예비'가 붙지 않는다. 예비 입대자, 예비 환갑, 예비 이혼부부, 예비 임종자... 이런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찾아보니 예비 입영 장정이나 예비 입대자라는 글이 보이기는 한다. 아, 그러고보니 '예비군'이라는 낱말이 있지만 이 글에서 논하는 그 의미가 예비○○와는 사뭇 다르다. 군대 가기 직전의 사람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니까.
'예비'를 붙임으로서 우리의 인생은 한낱 준비과정에 애쓰는 사람으로 환원되고 만다. 현실은 매우 어렵지만 이는 가까운 미래에 '○○'가 됨으로써 다 보상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이는 마케팅 용어로서 정말 적절하다. '예비 신혼부부를 위한 ~', '예비 중학생을 위한 ~', '예비 수험생을 위한 ~' 등 각종 서비스와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미리미리 준비하여(즉 구입하여) 대비하고 남보다 한걸음 더 경쟁력을 갖추라는 광고 문구에 아주 적합하다.
'예비'는 현실이란 결국 지나가는 과정으로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심하게는 희생까지도 할 수 있다는 가치를 은연중에 심어준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예비○○'라는 말을 들을 때 과거 스포츠 입국 시대의 기사가 자꾸 떠오른다.
'드디어 태극전사들이 은메달을 확보했습니다!'
준결승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으니 1등(금메달), 아니면 최악의 경우 2등이라는 뜻이다. 물론 결승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금메달인지 은메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조바심 정신은 이를 '은메달 확보'라는 희한한 전투적(군사적?) 용어로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4강에 오른 것에 대해 '동메달 확보'라고 전하는 어이없는 기사도 종종 보인다. 만약 3-4위 모두에게 동메달을 주는 운동 경기가 있다면 이는 내 무식의 소치가 되겠다.
인생을 준비기간만으로 생각한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최종 목표는 '죽음'인가? 죽기 전에 가치있는 정신적 또는 물질적 유산을 많이 남기는 것을 목표라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 하루 하루가 얼마나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느냐가 더 중요하다(물론 정의로운 방법으로! 남까지 행복하게 한다면 더욱 좋다). 나는 종종 '프로는 결과로 말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표어이지 남에게 강요하고 싶은 자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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