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6일 월요일

세로 화면의 영상에 익숙해지기

휴대폰을 이용하여 세로 포맷으로 찍은 동영상은 아마추어의 전유물인가?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름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포트레이트 구도의 인물 사진을 찍었던가. 요즘 휴대폰으로 찍은 짧은 동영상을 편집하여 유튜브 쇼츠(Shorts)로 올리는 연습을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기로 하였다. 

먼저 기술적인 사항. 쇼츠 포맷은 9:16의 세로 비율에 최대 3분 길이이며, 권장 해상도는 1080x1920(FHD)로서 모바일 환경에서 시청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유튜브 앱에서 쇼츠 작업을 하려면 별도로 준비한 오디오를 쓰기가 어렵다. 촬영한 영상에 녹음된 것을 그대로 쓰거나, 또는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음원만을 써야 하는 것 같다. 오디오를 별도로 입히려면 내가 쓸 줄 아는 편집기는 Open Shot Video Editor이 유일한데, 여기에서 세로 영상을 편집하려면 약간 번잡하다. 편집작업 후 세로 영상으로 내보내기를 위한 별도의 프로파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Reddit의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링크). 가로로 촬영한 영상을 세로 포맷으로 만들려면 약간의 수고를 더 거쳐야 하는 것 같다. 어찌되었든 쇼츠를 만들기 위해 장비나 편집용 소프트웨어에 크게 투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다 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삼성 갤럭시 S23을 쓰고 있는데, 동영상 촬영 시 상당한 수준의 안정화 기술이 적용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한 손으로 휴대폰을 편하게 잡고 촬영을 하려면 짐벌 정도는 있으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상미학 및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런치에 오른 구재모 님의 글 세로 화면 비율에 대한 이론적 고찰(1편, 2편)을 챗GPT로 요약하여 보았다. 세로 화면 증후군(Vertical Video Syndrome, VVS)라는 신조어는 세로로 찍은 (동)영상에 대한 비판 또는 조롱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을 포함한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오늘날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환경에서 영상의 세로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같은 숏폼 플랫폼은 모두 세로 화면비율을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를 넘어 미디어 미학, 시각 경험, 사회문화적 권력 구조까지 재구성하는 현상이다.

기기의 물리적 구조가 세로인 스마트폰은 사용자의 시선과 몸의 방향을 일치시킨다. 사람들은 더 이상 ‘스크린 앞에 앉는’ 대신, 손안의 화면을 통해 세계를 본다. 전통적으로 영화나 TV는 가로 화면비율을 전제로 발전해 왔다. 인간의 양안 시야가 수평 방향으로 넓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되어 왔고, 따라서 가로 비율은 “자연스럽다”는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반면 세로 화면은 오랫동안 ‘비전문적’, ‘아마추어적’, ‘불편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세로 영상 증후군(Vertical Video Syndrome, VVS)’이라는 조롱 섞인 용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기술적 이유만이 아니라, 기존 영상 산업 종사자들의 권력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중심으로 영상의 문법과 형식을 규정해 왔고, 새로운 형식인 세로 영상을 ‘비전문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그 경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SNS가 결합된 오늘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누구나 촬영자이자 편집자이며 동시에 배급자가 된다. 세로 화면은 그런 탈권위적, 참여적 미디어 생태계의 상징이 되었다.

미디어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면, 세로 화면은 결코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초상화나 종교화, 사진 초기에 흔히 쓰인 포맷, 그리고 도시의 건축물처럼, 인류의 시각문화 속에는 늘 수직적 이미지가 존재해 왔다. 따라서 세로 영상은 기술적 우연이 아니라 오랜 미학적 전통의 재맥락화라 할 수 있다. 세로 영상은 인물의 정체성, 몸, 공간의 깊이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특히 스마트폰 카메라가 주체의 시선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세로 영상은 ‘자기 기록’이자 ‘행위로서의 영상’이라는 성격을 띤다.

저자는 숏폼 콘텐츠가 20세기 중반 누벨바그(Nouvelle Vague) 영화운동과 닮아 있다고 본다. 당시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은 기존 영화 문법을 깨고, 일상적 장면과 즉흥적 연기를 카메라에 담으며 새로운 미학을 개척했다. 오늘날 숏폼 창작자들도 짧은 시간 안에 개인적 감정이나 상황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기존 서사구조와 시각 규칙을 넘어선다. 촬영자의 손떨림이나 즉흥성은 결점이 아니라 ‘현존의 증거’로 작동한다. 이는 오히려 관습적 완성도를 거부함으로써 더 진솔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응용 미디어 미학(applied media aesthetics) 관점에서도 세로 영상은 새로운 미학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기존의 영화나 방송 미학은 ‘보는 것’을 중심에 두었다면, 스마트폰 영상은 ‘찍는 행위’와 ‘공유의 과정’이 미학의 일부가 된다. 사용자가 화면을 세로로 들고 인물과 마주하며 촬영하는 행위 자체가 서사와 감정의 일부로 편입된다. 즉 세로 영상은 감상보다는 ‘참여의 미디어’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관객은 관찰자가 아니라 대화자가 된다.

이처럼 세로 화면비율은 단순히 기술적 포맷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구조를 바꾸는 사회문화적 사건이다. 전통적인 영화 문법은 인간 중심의 시각과 공간 구성을 전제했지만, 세로 화면은 그 위계를 해체하고 몸, 사물, 공간을 다른 비율로 재배치한다. 저자는 세로 영상이 결코 “가로 규범의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미학적 질서의 징후라고 본다. 세로 영상은 스마트폰 시대의 ‘주체적 시선’을 대표하며, 더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관계적인 이미지 생산의 방식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세로 화면비율을 조롱하거나 임시적 현상으로 보는 관점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세로 영상은 우리의 몸, 감각, 미디어 소비의 습관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진화이며, 앞으로 영상언어의 또 다른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세로 영상의 미학은 전통적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용자 중심의 새로운 시각적 규범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어제 저녁에 연습 삼아 올린 유튜브 쇼츠 동영상이 자고 일어났더니 1.7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생각보다 높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만든 자작곡을 유튜브에 올려 봐야 1년이 넘도록 수십 회의 조회수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왜 사람들이 쇼츠에 열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쇼츠를 통해서 관심을 끈 뒤 풀 영상으로 연결하는 전략도 많이 활용되는 것 같다. 

이번 글은 두 가지 논쟁적인 주제가 뒤섞여 있다. 가로 영상 대 세로 영상, 긴 영상 대 짧은 영상. 어느 하나는 한동안 주류로 인정되어 왔고, 나머지 하나는 무시되기도 하였으나 새 시대에 떠오르는 경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완전히 밀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2025년 10월 4일 토요일

걱정의 경제학: 할 만한 걱정은 전체 걱정의 4~5%에 불과하다

구글에서 경제학의 목적을 검색해 보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진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AI 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걱정의 경제학'이라고 한다면, 걱정에 드는 비용과 걱정을 통해 얻는 효용을 비교하여 정말 그 걱정이 필요했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에 의하면 걱정을 하는 일의 약 40%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약 30%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그리고 걱정을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이 자리잡는다. 따라서 실제 걱정을 하여 행동으로 옮기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걱정은 약 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주는 내 생애에서 가장 바빴던 며칠이었던 것 같다. 여러 일정을 소화하면서 과연 무난히 내가 각 장소로 늦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 월요일에는 식약처에서 주최하는 포럼에서 발표 및 토론을 하기 위해 청주(오송) 출장이 있었다. 오전에 부서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대전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마음에 별로 여유가 없었다. 일정을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날 아침 8시에 국립암센터에서 열리는 심의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인체 암조직을 분양신청하였는데, 그 분량이 적지 않기 때문에 과제 책임자가 배석을 하여 입장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전에서 서울행 KTX 첫 차를 타도 고양시에 위치한 국립암센터를 아침 8시 조금 전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미리 서울에 가서 미리 1박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청주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을 먹고 짐을 챙겨서 대전역으로 향했다. 서울역까지 간 뒤 근처의 허름한 숙소에서 묵었다.

다음날(화요일) 아침, 이른 시각에 서울역에서 GTX-A를 타고 대곡역까지 갔다. 여기에서 택시나 버스를 타면 국립암센터까지 갈 수 있다는데, 정작 대곡역에 내리니 택시를 불러도 올 것 같지가 않은 분위기였다. 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3호선을 타고 정발산역까지 간 뒤 약 1.2 km를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그 다음 일정은 오전 10시. 연세봉래빌딩에서 열리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 운영위원회에 참석해야 한다. 암센터 심의에 동행하여 실제 발표를 했던 연구 실무자 덕분에 버스를 타고 대곡역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 다시 GTX-A를 타고 서울역까지 온 뒤 걸어서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아침은 근처 편의점에서 초코바 하나와 베지밀로 때웠다.

다음 행선지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제주). 10시에 시작된 운영위원회는 12시에 끝났지만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단 김포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키오스크에서 발권을 하고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려는데 탑승권에 인쇄된 이름이 영문이니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면 발권 카운터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한글 이름이 찍힌 것으로 바꿔 오라는 것이다. 국내 여행에 뭔 여권을 소지하겠는가? 아고다에서 국내선 항공권을 예약한 경우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참 나...

저녁 6시가 넘어서 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고 ICC 제주 근처에 미리 잡아 둔 숙소로 향했다. 고달픈 이틀째가 이렇게 지났다. 그러나 다음날(수요일)의 일정은 더욱 까다로왔다. 오후에 세션 좌장을 맡았는데 예정된 종료 시간은 4시 50분. 그러나 제주공항으로 가는 5시 3분 출발 600번 버스를 타야만 김포공항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20분 정도이다. 

학회가 열린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원래 학회는 목요일까지 이어지지만, 아무리 늦더라도 수요일 안에 대전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돌아가는 항공권 역시 영문 이름이 찍힌 것이라서 수정을 요청해야 하는데, 김포공항과 제주공항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공연한 걱정이 들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연결이 쉽게 되지 않았고, 채팅으로 문의하니 여행사에 요청하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항공권은 모바일로 발권을 해 놓은 상태였는데, 아고다 고객센터의 채팅으로는 이미 예약이 확정되어 원하는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발표가 늘어져서 5시 3분 버스를 타지 못한다면? 걱정이 되어 발표장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미리 체크해 보기까지 하였다(약 5분 이내). 학회에서 세션이 10분 정도 늘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5시 3분 버스는 타지 못한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출발 시간은 8시였다. 그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출발한다. 그러면 7시 정도에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국내선이니 1시간 전에만 가면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날 기억을 떠올리면 중국인 관광객의 무비자 입국 때문인지 공항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고 탑승원 이름 문제로 혹시 실랑이가 벌어지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차라리 기존의 항공권을 포기하고 1시간 정도 늦은 것을 새로 살 것인가? 제주항공 웹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니 당일 표는 채 2만원이 되지 않는 것이 몇 장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수요일 제주도에서 서울을 거쳐 대전으로 돌아오는 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좌장인 내가 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한 탓도 있지만 마지막 연사가 예상외로 빨리 발표를 끝냈기에 600번 버스를 무난히 시간에 맞추어 탈 수 있었고, 제주공항 발권 카운터에서도 국문 이름이 찍힌 탑승권 재발급을 쉽게 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일에 대한 걱정은 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해결책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연사의 시간 절약은 순전한 행운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나의 문제는 모든 것을 사전에 다 계획해 두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크다. 바로 이것이 걱정의 원천이다. 걱정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의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됨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비용이 너무 크다. 그 다음 문제는 현재 어떤 일이 예상대로 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매우 큰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점이다. 미리 하는 쓸데 없는 걱정 + 뜻대로 일이 안 될때 느끼는 스트레스는 누적되었을 경우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떻게는 되겠지'는 매우 현명한 태도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매번 제주도 출장을 갈 때마다 출발 당일에 항공권을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행운은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는 데까지는 계획을 세우되, 너무 지나친 계획은 곤란하다. 플랜 B, 플랜 C... 플랜 Z까지 만들어 둘 필요는 없다.

이번 주의 복잡한 일정 속에서 나는 걱정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투자인지를 새삼 느꼈다. 걱정할 시간에 준비하고, 준비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요즘 배우는 ‘걱정의 경제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