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3일 목요일

초청 세미나에 발표를 하러 갔는데 이런 동의서를 작성하라고 하였다

어제는 모 사립대학교에 초청 세미나 발표를 하러 갔다. 세미나실에는 학과 교수님 몇 분이 들어오셨고, 약 80명의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성황리에(?)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 현장과 기업에서 있었던 경험을 설명하였다. 반응은 비교적 좋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이런 곳을 가면 세미나 연사료 처리를 위하여 개인정보를 적어내고 신분증 복사는 물론 개인정보 제공 활용 동의서를 쓰게 된다. 그런데 어제는 신상정보를 적는 용지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 

아니, 왜? 다른 범죄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만약 교수를 뽑기 위한 절차라면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을 뽑아야 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일회성으로 대학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것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 대학만 유별나게 그런 동의서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법률이나 지침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일 테니까. 하이브레인넷에 이에 대한 토론이 조금 있었다.

전문가 자문료 집행시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 요구

이것이 뭐가 불편하냐는 가시 돋친 답글이 몇개 보였다. 그깟 종이 한장에 인적사항 적어서 내는 것이 뭐가 어떻느냐는..

이것이 그렇게 실효성 있는 '검열' 장치일까? 성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장기간 교육기관에 와서 학생들을 계속 접하게 되면 불미스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전문 분야에 관련한 지식을 세미나 혹은 자문 등의 형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껏해야 몇 시간 머무는 사람에게 이런 것을 꼭 받아야 할까? 그리고 외국인 전문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터폴에 요청하여 성범죄 경력을 물어볼까? 검색을 해 보니 외국인도 조회가 가능하다고 한다. 혹시 이 동의서를 남자에게만 받는 것은 아닌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만약 이 동의서가 정말 제대로 작동하려면, 강연을 하기 이전에 동의서를 받아 경찰서에 범죄 경력이 있는지 조회부터 한 다음, 그런 사실이 없다는 회신을 받은 다음에 강연을 하러 와 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세미나 발표 직전에 이 동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면 이 동의서의 용도는 무엇인가? 일단 지식 전달은 하고 나서 범죄사실이 있다면 연사료 지급을 거부하겠다는 뜻인가?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어제 작성한 동의서의 서식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부산대학교의 서식자료실에서는 세미나 강사를 섭외할 때 교외 인사의 경우 사전에 성범죄조회를 실시한다고 하였다. 첨부된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를 살펴보자.

본인은 부산대학교 및 부산대학교 산학협력단 취업자(취업예정자)로서,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56조 및 같은 법 시행령 제25조에 따른 성범죄경력 조회에 동의합니다.

다른 대학에서 찾아본 세미나 관련 서식도 똑같은 문구가 반복되고 있다. 일단 석연치 않은 점 하나. 여기에서는 산학협력단 취업(예정)자로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서 성범죄경력 조회에 동의한다는 문구가 있다. 세미나 강사라는 말은 없다. 해당 법률 시행령 25조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규정하였나(링크)? 법률의 명칭은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지만, 56조 1항에서 정의한 기관에 대학이 포함된다. 그러면 대학에서 무엇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였을까? 25조 2항에 의하면 운영자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하였고, 3항에서는 취업 중이거나 노무를 제공중인 사람(혹은 그렇게 하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세미나 연사의 경우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으로 해석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게 적확한 해석일까? 만약 내가 시설 공사를 위해서 보름 동안 어느 학교 실험실에서 일을 한다고 치자. 이것은 노무 제공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성범죄경력 조회를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은 없다. 한 시간 동안의 세미나를 하고 돌아가는 사람과, 매일 8시간 가까이 보름 동안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 뭐가 다른가? 세미나를 하는 사람은 학생들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요즘은 온라인이라서 그렇지만도 않다) 학생들에게 지능적으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더 높을까?

이건 좀 과하다고 본다. 아니, 세상이 바뀐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나?

검색을 좀 더 해 보니 이런 글도 있었다.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모욕적이라는 당신에게

이 글에 나오는 것처럼, 성범죄자 신상정보 열람 사이트인 '성범죄자 알림e'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현명하지 않을까? 그리고 참고를 위해서 역사학자 전우용 씨의 페이스북 2020년 8월 27일자 원글(링크)도 남겨 놓는다.

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전문가들의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법은 항상 현실을 한 발 늦게 쫓아가는 것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은 더욱 시궁창이라는 뜻도 되겠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법을 현장에서 적용하려면 그 취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찰이 빚어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떻게 이런 법이 생긴 것을 아직도 모를 수 있느냐'고 면박을 주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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