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네트워크에 연결된 현대 생활 속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딛히는 것이 온라인을 통한 설문조사이다. 직장의 인트라넷을 열면 수시로 설문조사서가 뜨고, 이메일로도 설문조사 요청을 종종 받는다. 지난주에는 이메일 메시지에 포함된 링크를 클릭했더니 연결이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웹으로 구현한 설문조사 페이지가 아주 친절하게도 국가정보원 보안지침에 저촉되는 사이트 목록에 있는 모양이다. 분명히 연구개발 및 국가적 정책에 관련한 설문조사인데도 그렇다.
이메일로만 요청을 해 오면 그나마 매우 양호한 케이스이다. 안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무슨 리서치 연구소라는 곳에서 먼저 전문가 조사를 한다면서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수화기 너머로는 와글와글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상담원들이 설문조사에 협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거는 일종의 텔레마케팅센터와 같은 환경인 것으로 느껴진다. 일단 수락을 하고 이메일로 설문조사 사이트에 대한 링크가 있는 메시지를 받았다.
클릭을 해 보았다. 문항의 수가 많기도 하다! 그리고 꽤 많은 생각을 요하는 것들이다. 체크를 해 나가다가 인내심에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꽤 어렵다. 과연 성의있게 답을 작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앞뒤가 맞지않게 답을 작성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이런 것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본 일이 있을까?
조금 전 또 전화를 받았다. 답변을 하지 않은 문항이 있다고. '체크를 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진행이 안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신거죠?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던가요?' 뭐 이런 정도의 질문을 나에게 한다. 그걸 내가 어찌 하는가? 난 웹 양식에 보이는 그대로 답변을 클릭하고 맨 마지막에 완료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았을 뿐인데. 약간 짜증이 나려고 했다.
누락된 답변에 대한 설문을 다시 받겠다고 한다. 어떻게? 설문조사용 웹사이트를 나 하나를 위해서 바꾸겠다는 뜻인가? 잠시 뒤에 이메일을 받았다. HWP로 만들어진 설문지 파일이었는데 답변이 하나도 되지 않은 원본이 왔다. 이런! 새로 답변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지난번에 작성한 답변과 일치하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걸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는 중에 다시 이메일이 왔다. 내가 이미 답변을 한 것(으로 생각되는)을 제외한 나머지 문항만이 담긴 파일이다. 아, 나와 통화를 했던 상담사가 이전 답변결과를 보고 수작업으로 한글 파일을 편집한 것이 틀림없다. 차라리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이 하나 줄어든 것으로 여기고 그냥 폐기하고 말지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여야 하다니. 그만큼 답변을 한 사람이 적다는 뜻도 될 것이다. 답변서를 마무리해서 이메일로 보냈다.
간혹 설문지를 보면 조사에 응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어쩌면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만들었는지 한숨을 쉬게 하는 것들이 있다. 원하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유도하는 듯한 설문지가 있기도 하다. 아마 조사원들은 낮은 응답률에 많은 고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도 일종의 감정노동이니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진정한 판매원은 판매하고자하는 물건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겠지만, 설문조사원은 이 설문조사의 의미에 대해서 별로 사전에 교육을 받지 않는 느낌이 든다.
설문을 통해서 대중 혹은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빈도가 너무 높으면 일상 없무에 당연히 지장을 받는다. 특정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려면 개인에게 이메일을 일괄적으로 보내서 요청할 것이 아니라 해당 기관에 먼저 공식적으로 사전에 승인을 받은 뒤 설문 이메일을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기관에 소속된 개인을 대상으로 언론 취재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즉 공식적인 홍보 채널을 반드시 통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이렇게 하면 제대로 작성된 답변지를 회수하는 비율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지난주에 크레이그 램버트가 지은 <그림자 노동의 역습>을 읽었다. 소비자에게 떠넘겨지는 노동이 지나치게 많다. 소개된 여러 사례 중에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한 뒤 너무나 많은 설문조사에 시달리는지에 관한 것이 있었다. 고객의 피드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다. 정치 참여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성의있는 답변을 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학창시절 시험문제 수준의 설문지를 접하면 그 누구도 선뜻 응하고 싶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이제 또 연말이 되면 공공기관 만족도 조사를 하게 된다. 설문용 문항 작성, 설문자 선택 등 사려깊게 결정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설문 자체가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지, 설문자는 우호적인 답변을 줄 사람으로 일부러 고르고 있지는 않은지... 설문조사를 통해 파악된 결과는 항상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수능시험 문제가 잘못되어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남을 잘 알고있다. 시험이든 설문조사든 만들어진 문항에 오류가 없는지, 난이도는 잘 조정되어 있는지를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사전에 점검하는 세상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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