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8일 월요일

경주 보문호 주변을 달리며 많은 생각을 하다

작년(8월과 10월 2회)에 이어 올해 여름에도 휴가차 경주를 찾았다. 남들은 경주를 왜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하지만, 이곳은 나에게 항상 새로움을 주는 곳이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경주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낀다. 뜨거운 여름날, 첨성로를 걸으며 인왕리 고분군에 펼쳐진 거대한 무덤의 곡선을 보라. 거대하고 부드러운 윤곽선 아래로 꽉 채워진,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는 잔디색(lawn green, #5EA152, color-hex 웹사이트)의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인공물 중에 이런 편안함을 자아내는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인교동 119호분. 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분이기도 하다.

북쪽에서 바라본 월정교.


월정교 안에서 맞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였던지!

태종무열왕릉을 중심으로 하는 서악동 고분군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은 경주 중심가에 비하여 관광객의 발길은 적은 편이다. 소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좋은 휴식이 없다.

자연석 그대로의 소박한 호석(護石)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귀부)는 하나의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서 만든 것이다. 몸통돌(비신)은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 찾은 경주는 오는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APEC 준비로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몹시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그룹으로 가이드와 함께 탐방 중인 외국인 관광객도 꽤 많이 보였다. 첫날에는 고속도로에서 경주 IC로 진입하기 위해 몇 km나 줄을 지어서 1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경주를 그렇게 많이 왔지만 이렇게 교통체증을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특히 황리단길 인근은 차량이 얼마나 몰려드는지 여기를 지나는 것을 후회할 지경이었다. 겨우 쪽샘지구 임시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릉원을 찾을 수 있었다.

대릉원에서.


이틀째에 찾은 불국사는 언제는 옳다! 그래서 나는 여기를 불굳(good)사라고 부를 만큼 경주 여행에서 언제나 들러도 좋은 곳이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더라도 불국사박물관을 들러 보기를 권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더운 여름에는 불국사 경내를 둘러보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땀을 식히기에 아주 좋다.




대종천 다리 밑에서 더위를 식히다

불국사에서 이틀째 오전을 보낸 뒤 읍천항으로 향했다. 읍천항은 감포 바닷가(봉길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월성원자력본부를 지나면 나오는 작은 포구다. 돌아오는 길에는 T맵이 아니라 차량용 내비게이션을 이용했더니 토함산로(길이 4.3km의 토함산터널 통과)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경감로로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채 다리 밑 그늘을 지나는데 개울가에 자동차 여러 대가 서 있고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축암교(토함산로) 아래를 동쪽으로 흘러서 감포읍에서 바다로 나가는 대종천에 해당한다. 서쪽으로 보이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건물까지는 대략 1.1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의 GPS 좌표는  N 35.793, E 129.403

그대로 지나쳤다가 차를 되돌려서 물가로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물이 맑고 얕아서 아이들이 놀기에 적당해 보였다. 아마 경주 시민들만 알고 있는 로컬 놀이터인 것 같았다. 고기를 구워 먹는 나이 지긋한 부부도 있었고, 바로 옆 텐트에서는 할아버지와 손주까지 가족 3대가 와서 물놀이를 하고 놀다가 짐을 챙겨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너편에서는 어느 할머니가 도시락 그릇을 냇물에 부셔 내더니 아예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와서 머리를 감는다! 엄격하게 관리하는 유원지가 아니므로 모두가 푸근한 마음으로 그러려니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도 더운 날 감포읍에서 경주 시내로 돌아올 때는 이 곳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가고 싶다. 여기를 거쳐서 보문관광단지로 돌아오려면 추령을 지나 상당히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속도를 내기도 어려운데 뒤에서 바싹 붙어서 따라오는 비매너 승용차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저녁이 되어 보문관광단지 안에 자리한 숙소를 찾으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유소년 축구단의 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이들을 유명한 축구 스타로 키우고 싶은 부모도 있을 것이고, 그저 운동을 잘하고 스포츠를 통한 협동심과 리더십 함양을 위해 축구팀에 아이를 넣은 부모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수들의 기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느 방 안에서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1층 복도에 내 놓은 빨래 건조대에 가득 널린 유니폼을 보면서 경기를 대비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고단함을 느낄 수 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포츠의 재미나 의미를 전혀 가르쳐 주지 못했다. 이는 정말 아쉽다.

보문호의 박정희 동상

저녁을 먹은 뒤 여행의 피곤함과 식곤증으로 잠시 잠에 빠졌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여행지라고 해서 이틀에 한번 꼴로 실천하는 달리기를 게을리 할 수는 없는 노릇. 이번에는 보문호의 산책로을 뛰어 보기로 하였다. 걷기 좋게 길이 잘 단장되어 있고, 호수에는 각종 조형물이 조명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둘레길은 총 8km라고 하니 다음 기회에는 한 바퀴를 달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며 거니는 여행객 사이로 총 5km의 거리를 뛰었다. 호수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에 이르니 '대한민국 관광역사 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글씨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이름하여 관광역사공원.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그간 보문관광단지에서 여러 차례 숙박을 했지만 호숫가에 내려와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공원 내부를 잠시 돌아보는 중에 뜬금없이 박정희 전대통령을 표현한 조형물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기는 내가 설계하고 만든 곳이니 고마워 해야 돼!'를 부르짖는 듯한.

여기에서는 별다른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영웅 만들기? 박정희가 앞서 나아가고, 그 뒤로 보문관광단자의 역사가 쓰였음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적나라하게 나타난 조형물 및 전시 자료.

이런 자료는 어디 실내 기념관에다 전시할 일이다.


이 동상이 나중에 미술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걱정이 된다.

경주 보문관광단지가 박정희 시대에 첫 삽을 떴다는 것은 대충 알고는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은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방식이었는지는 두고두고 논할 일이다. 어쨌든 내가 가족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아 즐길 수 있는 기반은 이때 마련된 셈이니까 말이다. 대통령이 1971년 여름 직접 친필로 '경주발전계획 작성 지침'을 써서 내리고, 건설부에서는 이 지침을 받들어 두 달 만에 계획을 완성했다나? 

박정희 전대통령 친필로 쓴 경주발전계획 지침-40년전 '경주발전계획' 아버지 뒤이은 딸이 개발 마무리 해줄까(영남일보 2013년 1월 23일)

지금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대다수 지역민들의 정서인가... 이 기사에 의하면, 박정희가 쓴 친필 지침은 창고에 장기간 보관만 되어 있다가 박근혜 취임 직전 재발견(?)되어 기사화되었다. 그리고 현재 관광역사공원에서 전직 대통령의 동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기사를 검색해 보니 50억원을 들여 지은 이 공원이 2024년 문을 열면서 내부 곳곳에 세원진 박정희 동상 때문에 적잔이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개장 전까지는 이런 구체적인 설치물에 대해서 제대로 공개가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내 생각도 이런 비판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내 나라의 미래는 가 그려 나간다." 

아마 박정희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었을까? 아마 스스로를 '유일한 대한민국 디자이너'로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필 휘호로 잘 알려진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가 떠오른다. 이 문장에선 여러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즉시 구체화하여 계획으로 세워지고, 이를 무서운 속도로 추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경부속도로도 생겨나고, 보문관광단지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뒷이야기① 三無 상태, 치열한 전투  - 월간 국토해양저널 2001년 3월호에 실렸던 글

그렇다면 그 '그림'을 순식간에 그려낸 사람은 진정한 천재급 지도자였단 말인가? 평전에 의하면, 그의 리더십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박정희도 처음엔 카리스마 없었다… 철저한 기획, 단계적으로 이룬 리더십 조선일보 2023년 6월 15일).

어쨌든 그 시절에는 그렇게 세상이 움직였다. 어려운 시대에는 이러한 방식이 유일하고 가장 효율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움직임을 찬성하지 않거나, 밀려난 사람은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잊혀져 갔을 것이다. 

지금 나는 박정희가 뿌린 씨앗이 성장하여 여문 과실을 따 먹고 있는가?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정말 정당하였는지, 그 과정 중에서 어떤 부정적인 효과가 발생하였는지는 얼마든지 비판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그런 비판을 수용할 정도로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가미한 정부 주도형 모델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어려운 처지를 헤치고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동상 건립과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지도자의 추억을 소환하는 곳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최근의 보수 정권일 때 이런 움직임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자유로운'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은 다른 정치적인 목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는 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박정희에 대한 숭모는 숭미(崇美)와 더불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신이라고 믿는다. 

관광지 경주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감은사지 서탑을 바라보며.

월성원자력홍보관에서 찍은 원자로의 모습. 월성원자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유일의 중수로형 원전(3기)을 사용한다. 모든 사용후 핵연료는 각 원자력발전소의 임시 저장 시설에 보관되는데, 월성원자력발전소의 경우 포화율이 가장 높아서 92%에 이르며, 2031년이면 꽉 찬다. 대책이 필요하다. 안전기준을 만족하여 계속운전에 착수한다 하여도 사용후 핵연료를 둘 곳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재처리도 하지 못한다. 사족으로서 용어의 문제-원자력발전이냐, 핵발전이냐?(박정희도 '핵발전'이라 불렀다)

감은사지 동탑의 시원한 그늘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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