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8일 수요일

데이터 거버넌스의 여러 모델

KOBIC 웹사이트의 KOBICian's Story에 6월 23일에 게재 예정인 나의 글을 블로그에 따로 소개하고자 한다. 원문에는 없던 링크와 그림을 삽입하고 약간 수정하였다.

데이터 거버넌스의 여러 모델

요즘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낱말이 심심치 않게 많이 쓰입니다. 동사 govern이 ‘지배하다, 통치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이로부터 파생된 거버넌스는 ‘통치, 지배, 관리, 운영’ 정도의 뜻을 지닐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 다른 낱말과 같이 쓰이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데이터 거버넌스’와 같은 것입니다. 거버넌스의 현대적 의미는 조직이나 기관 또는 시스템을 지휘하고 관리하며 책임을 지는 방식의 틀, 절차 그리고 관행입니다. 동사 govern에서 파생된 또 다른 명사 government(정부)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거버넌스에서는 외부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개방적이면서도 열린 조직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전을 찾아보면 거버넌스를 ‘협치(協治)’로 풀이합니다.

현대 지능정보사회에서 데이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법령을 준수하며, 나아가서는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데이터를 전략적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잘 설계되고 실행 가능성을 갖춘 데이터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학 논문이 유료 저널에 게재되는 일이 흔해지고 데이터 접근도 어려워지자, 오픈 사이언스 재단에서는 2002년 부다페스트에 모여서 과학 및 학술 연구 결과물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2021년 UNESCO에서는 194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오픈 사이언스 권고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오픈 액세스, 오픈 데이터, 오픈 인프라, 시민 참여 및 전통 지식 체계와의 대화 등 오픈 사이언스의 핵심 요소를 구성하고 실행을 위한 우선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권고안의 탄생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COVID-19 팬데믹이라는 대재앙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병원체 게놈 정보의 신속한 공개 덕분에 빠른 진단과 백신·치료제 개발이 가능하였고, 데이터 공유를 통해 신속하고 동시다발적인 연구 협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UNESCO의 오픈 사이언스 관련 문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오픈 사이언스 원칙의 올바른 실행 측면에서도 데이터 거버넌스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단지 연구 데이터를 개방한다고 해서 이를 모두가 신뢰하고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터의 품질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그 사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며, 접근 권한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은 모두 데이터 거버넌스의 영역입니다. FAIR(Findable·Accessible·Interoperable·Reusable) 원칙은 오픈 사이언스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오픈 사이언스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KOBIC의 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은 외부 기관과 협력하여 FAIR 성숙도를 점검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참고: GO FAIR Initiative).

오픈 사이언스는 얼핏 생각하면 데이터의 자산화 경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데이터를 생산한 주체는 이를 소유물로 인식하고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업계에서는 당연히 이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정부 연구개발과제로 생성된 연구 데이터를 국가적 전략 자산으로 여겨서 통제하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특히 유전체 정보나 보건의료 정보는 개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하는 민감정보이자 기업·국가 차원의 경제적 자원이지만, 새로운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재료이므로 공공적 활용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 개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전부 충족시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니 적절한 중간 지점에서 타협해야 합니다. 데이터 거버넌스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데이터 커먼즈(data commons)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커먼즈(commons), 즉 공유지는 본래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관리하는 자원을 뜻합니다. 1960년대 말 사이언스에 발표된 유명한 논문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에서 지적했듯이, 공유 자원은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고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너 오스트롬(1933-2012)은 ‘커먼즈의 거버넌스(원제는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라는 책을 통해서 이를 반박했습니다. 즉 공동체가 공통의 규칙과 책임 아래 자원을 개방하고 공동으로 관리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지켜 나갈 수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경제학에는 시장과 국가만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깨뜨린 공로로 오스트롬은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거버넌스 개념을 제창하고 정립하였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요즘은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서 신뢰 기반의 커먼즈(trusted commons) 개념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전통적 커먼즈 모델에 신뢰, 안전성 및 책임의 요소를 더한 것입니다. 경제적 활용 가치가 매우 높지만 함부로 공개될 경우 정보 주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보건·유전체 정보의 안전하고도 책임 있는 활용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뢰 기반 커먼즈입니다. 미국 NIH의 dbGaP(The database of Genotypes and Phenotypes)이나 유럽의 EGA(European Genome-phenome Archive), 그리고 KOBIC의 인체유래데이터은행이 바로 이러한 신뢰 기반 커먼즈의 사례입니다.

신뢰기반 커먼즈의 핵심 요소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접근 통제(access control): 데이터를 누가 어떤 조건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정함
  • 책임성(accountability):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사용 내역과 목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기록을 남겨야 함
  • 투명성(transparency): 데이터가 어떻게 수집되고 누구에게 공유되며 어떻게 사용되는지 공개해야 함
  • 형평성과 포용성(equity & inclusion): 데이터 기여자나 소외된 집단도 공정하게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함
  • 상호성(reciprocity):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결과나 혜택을 다시 커뮤니티에 돌려줘야 함




지난 4월 미국 신생명공학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mmission on Emerging Biotechnology)가 발간한 보고서 ‘Charting the Future of Biotechnology’에 따르면, 미국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중국의 급부상을 경계하면서 유전체, 인공지능(AI) 및 바이오제조 등에서 자국의 지속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인 Web of Biological Data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는 신뢰 기반 커먼즈의 확장판으로서 FAIR + 신뢰 기반 + AI-ready 상태의 국가적 디지털 인프라에 해당하며, 하나의 통합된 창구(single access point)를 제공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부연하자면 분절되어 존재하는 데이터 리포지토리에 대한 검색 및 활용을 한 곳에서 제공함으로써 사용자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국가 또는 동맹국 중심의 국제 협력을 유도하기 위한 밑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국정과제를 수립하기 위한 바쁜 움직임에 들어갔습니다.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머지않아 바이오 경제 시대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KOBIC이 정성스럽게 모은 양질의 바이오 연구 데이터가 안전하게 널리 활용되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 아울러 글로벌 바이오 데이터 저장소의 모범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025년 6월 12일 목요일

ChatGPT를 보다 능률적으로 쓰는 방법 - 중간 단계마다 저장한 파일을 활용하기

ChatGPT에서 하나의 주제로 대화창을 만들어서 몇 달에 걸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효율이 떨어진다. 문답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가는 전체 대화를 기억해 주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기억할 정보의 분량이 많아지면서 점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개의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과거의 대화에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다시 찾아내는 일도 매우 번거롭다.

그래서 효율화를 위해 하나의 꼼수를 생각해 냈다. 예를 들어 아두이노 나노를 이용한 MIDI 컨트롤러(EZ Ardule MIDI Controller)를 설계하는 대화는 너무 길어져서 새로운 기능을 제안하여 구현 가능성을 평가하고 회로와 코드를 설계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결론을 종합하여 문서로 정리하여 보관한 뒤, 다음번 세션에서는 이 파일을 새 창에 로드한 뒤 추가적인 변경 사항을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어설픈 개념을 실증하는 물건 하나를 만드는 단순한 일이지만 실제로 해 보니 핀 배치나 코드 작성보다 메뉴 및 작동법을 설계하는 것이 더 어렵다. 몇 개 되지 않는 버튼과 인코더를 이용하여 능률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조작 인터페이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진짜 양산용 신시사이저를 만들 때에는 얼마나 많은 실행 착오가 있었겠는가? 실제 DIY 과정에서는 케이스 가공이 또 발목을 잡을 것이다. CAD 가공을 하기 어려운 재활용품 수준의 알루미늄 섀시에 LCD를 위한 네모진 구멍을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어쨌든 ChatGPT 덕분에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단계별로 실증해 나가면서 진행하지 않고 오로지 컴퓨터와 대화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여 나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다. 브레드보드에 부품을 올려서 작동해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또 발견될 것이다.

EZ Ardule의 조작 및 디스플레이부 시안.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것이다. 몇 개 되지 않는 버튼 스위치와 다이얼로 효율과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뒤에서 이를 구동하는 코드를 짜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중간 과정마다 파일로 저장하여 다시 로드하는 방법이 모든 종류의 대화에 어울리지는 않을 것이며, 단점도 갖고 있다. 각 단계에서 저장된 파일을 잘 관리해야 하고, 중간에 바뀐 것을 나중에 음미하고자 할 때 원본 자료를 찾기가 약간 난해하다. 즉, 매번 파일로 저장한 것이 최선이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일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용도의 중간 저장본은 PDF보다는 Word 파일이 더 낫다.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나름대로 생각한 수정사항을 반영하여 편집한 뒤, 다시 업로드하여 후속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DF는 수정할 일이 없는 최후 버전을 미려하게 만들 때 유용하다. 단, 글꼴을 별도로 업로드하고 포맷도 상세하게 지정해 줘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한글 PDF 출력용 텍스트 생성 가이드 템플릿을 별도로 만들었겠는가(관련 글 링크). 글꼴은 나눔고딕(NanumGothic.ttf, NanumGothicBold.ttf)을 추천한다. ChatGPT는 용지 밖으로 글이 길게 튀어나가도록 자꾸 실수를 하기 때문에 제발 이러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지시해 줘야 한다.

이 텍스트를 A4 크기의 한글 PDF로 출력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 줘.

- 줄바꿈이 잘 되도록 문단을 정돈해 줘.
- 여백은 좌우 20mm, 위아래 20mm로 맞춰 줘.
- 줄간격은 약 1.4배로 해 줘.
- 본문 글꼴은 '나눔고딕(NanumGothic)'을, 제목에는 '나눔고딕 Bold'를 사용해 줘.
- 글꼴 파일은 내가 업로드할 테니 그걸 적용해 줘.
- 용지 밖으로 문장이 튀어나가지 않게 해 줘.
- 단락마다 적당한 줄 간격(공백)도 넣어 줘.

최종적으로는 PDF 파일로 만들어 줘.

어떤 주제에 대해서 보고서를 자동 생성하게 하면 검증이 필요함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오경제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바이오혁신법)이 2024년부터 시행된다고 하는 것 말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만든 「그린바이오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확인하였다.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바이오산업'이란 용어가 들어간 법령은 이게 유일한 것 같다. 상당히 발빠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ChatGPT가 만든 결과물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문서 파일을 입수하여 업로드한 뒤 그 범위 안에서만 번역·요약하고 시사점을 도출하게 지시하면 꽤나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온다. 이건 인간 지능의 몫인데... 시간은 부족하고 검토할 자료는 많으니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씁쓸하다.

2025년 6월 11일 수요일

'K-휴지'는 물에 녹지 않는다?

'선풍기를 켠 채로 자면 죽는다'는 속설이 한국에서만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런 미신을 비꼬는 듯한 영문 웹사이트 'FanDeath'라는 것이 있었다. 그 웹사이트를 방문하였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최상위 도메인이 com인지 org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그 사망의 원인으로서 '질식'이 늘 꼽혔는데, 선풍기 바람에 호흡 장애가 일어나거나 질식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선풍기의 작동 소음이 싫고, 특히 잠을 잘 때에는 몸에 차갑게 바람이 닿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타이머가 꺼지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들 때가 많다.

어제 세종시에 있는 어떤 회의장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재미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본 화장실에 비치된 휴지는 물에 풀어지지 않기 때문에 변기에 넣지 말고 반드시 옆에 놓인 휴지통에 넣으라는 것이다.

국내에서 팔리는 화장실용 휴지는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정한 규격과 KS 인증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화장실은 그 규격을 통과하지 못하는 훨씬 질긴 것을 구입하여 비치한단 말인가? 왜? 사용 중에 찢어질 것을 우려하여?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주변에서 흔히 보는 두루마리 하나를 그대로 변기에 넣지 않는 이상 상식적인 사용량 수준에서는 막히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대나무 펄프로 만든 휴지는 질긴 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여 변기를 막을 수준은 아닐 것이다. 

물론 세상은 상식적인 사람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미국 여행 중 패스트푸드점의 소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허리 높이의 레버를 발로 차듯이 밀어서 물을 내리는 사람을 본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좌변기의 레버를 손으로 누르냐 발로 누르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공중 화장실 변기 레버는 바닥에 설치돼있지 않는 이상 손으로 누르는 것이 맞다"(링크)

페이셜 티슈('크리넥스')나 냅킨 종류는 질긴 편이라서 화장실에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예외로 하자.

공중 장소의 화장실에서 흔히 보는 또 다른 안내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수압이 약하여 자주 막히니 사용한 휴지는 별도의 휴지통에 넣어 달라는 것. 표준 양변기의 물탱크 용량은 6~10리터라고 한다. 채워진 물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벽돌을 몇 장 넣지 않고서는 수압이 약할 수가 없다. 결국 화장실용 휴지를 변기에 넣으면 막힌다는 것은 선풍기를 켜고 자면 죽는다는 'K-미신'과 다를 바가 없다.

변기가 막히는 가장 큰 원인은 변기에 넣어서는 안 되는 물건을 넣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물티슈이다. 용케 변기를 막지 않고 흘러 나간다 하더라도 하수처리장까지 가서 모이면 문제를 일으킨다. 

사용한 화장실용 휴지가 갈 곳은 변기밖에 없다. '변기에 넣지 말고 제발 휴지통에 넣어 주세요'라는 경고물을 제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5년 6월 10일 화요일

수운교 도솔천(水雲敎兜率天)에 가다

수운교란 1923년 세워진 동학 계열의 신종교이다. '수운'이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1824~1864)의 호이다. 동학에서 발전하여 생겨난 천도교와 수운교는 같지 않다. 다들 아다시피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생긴 종교이다. 수운교에 대한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 또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라. 이 계열의 종교에서 최제우는 '하늘님'을 대신하는 천사(혹은 예수나 무함마드?)와 같은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하늘님을 일컫는 말은 정말 여러 종류가 있다.

하늘님/하느님/하날님/하나님/한을님/한우님/한울님 - 작성자: 탁암 

대전 유성구의 자운대라는 동네는 1990년대부터 군사 학교와 시설이 모인 곳이다. 흔히들 신성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으로 한꺼번에 부르지만, 자운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법정동인 자운동과 추목동 등지이다. 자운대 지역으로 들어갈 때 거쳐가야 했던 검문소는 이제 없어졌다. 이곳을 찾은 일요일 오전, 군사 학교 등이 좌우로 펼쳐진 너른 길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 두어 명을 보았다. 사거리에서 2km 넘게 직진하여 들어간 뒤 좌회전하여 공동주택단지 사이로 접어들면 수운교 도솔천으로 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도솔천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이 아마 십오륙년 전일 것이다. 숲길을 들어서니 평온하고 시원한 공기가 우리를 감싼다.

도솔천이란 불교의 천계 중 욕계에 속하는 네 번째 하늘이며, 미륵보살이 머무는 것이다.

수운교 도솔천은 1929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이다. 절로 치자면 대웅보전과 같은 곳이다. 지붕 위에 잡상을 올린 것은 마치 조선시대 궁궐을 보는 것만 같다. 수운교의 창시자 이상룡이 설계하고, 조선 말기 경복궁을 중건한 최원식이 지었다고 한다.



바닥에 돌을 박아 교기(敎旗)인 궁을기(弓乙旗)를 새겼다. 수운교 공식 웹사이트에 의하면 "궁은 선(仙)이요, 을은 불(佛)이니 선불합덕이다. 하늘과 땅이 열리고 닫히는 조화의 문이며, 음양이 출입하는 길이요, 만물이 생성하는 기틀이다."라고 하였다. 중앙에 점을 찍으면 천도교의 궁을기와 같은 모양이 된다.



도솔천은 하늘님을 모신 천단이다. 마침 옆문이 열려 있어서 여기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돌로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는 석종. 도솔천 서쪽에 있다.

수운교의 세계관을 그린 삼천대천세계도는 올해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되었다(기사 링크).

도시락을 싸 들고 가서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에서 한가롭게 거닐고 싶은 곳이다. 비록 동학의 기본 정신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실은 요즈음 이중표의 <윤회와 해탈>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나 자신은 현재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지만, 어떤 종교든지 그 탄생 배경을 이해하고 약간은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2025년 6월 6일 금요일

KORG X2의 2025년도 수리를 마무리하였다 - 헤드폰 앰프용 op amp 및 12V 전원 보드 교체

헤드폰 앰프 칩(M5261L)을 교체하고, +/-12V 전원 공급 보드를 약간 더 고급 제품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올해의 수리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Hiss-like 잡음을 완벽하게 잡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볼륨을 최대로 했을 때 헤드폰에서만 들리는 잡음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는 것이 나으리라. 이것 말고도 올해 마무리해야 할 MIDI/audio 관련 DIY는 몇 가지가 더 있다.

팝업 노이즈는 +5V와 +/-12V 전원 공급 보드를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기고, 파워 스위치를 작동시킬 때 볼륨 슬라이더를 최대로 내리는 것으로 대충 모면하기로 했다. 5V가 공급되고 나서 커넥터를 끼워 넣으면서 12V가 들어오도록 해 봤는데(0.x초였을 것이라고 자신함) 여전히 팝업 노이즈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연 릴레이 모듈은 일단 부품통 속으로 들어갔다.

12V 전원 공급 보드를 바꾸기 전에 메인보드에서 DAC 및 IVC에 공급되는 5V를 오실로스코프로 아래 그림의 빨간 지점에서 측정해 보았을 때 아주 깨끗하였다. 따라서 LT3042 초저잡음 LDO를 이용한 레귤레이터 보드도 부품통 속으로 보냈다.



이대로 마무리하기가 아쉬워서 M5261L op amp를 교체하였다. 혹시 가짜 칩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소리가 잘 난다. 하지만 hiss 잡음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M5216L('a high-output and high speed operational amplifier for use in high-performance headphone amplifiers and mizer amplifiers found in cassette decks'). 위의 것이 아날로그 보드에 원래 꽂혀 있던 것이다.

새 칩이 자리를 잡은 후.


다음으로 LM317/LM337을 사용한 +/-12V 전원 보드를 장착하였다. 기존의 것을 들어내고 나니 자리가 부족하여 옆의 빈 공간을 활용하였다.


아, 이 무슨 난해한 배치인가.


개조를 마친 뒤 Audacity에서 무음 상태로 녹음을 한 뒤 50dB 증폭을 하여 재생해 보았다. '쉬-잇' 말고는 험이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WaveSpectra에서도 측정을 해 보았다. 60Hz/120Hz 근방에 별다른 피크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잡음은 잠시 잊어 버리고 '음악 공부'를 더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내년쯤 아날로그 보드의 모든 전해 커패시터를 교체해 보리라.

노이즈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었을까? 3월부터 끌어온 이 프로젝트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전동 드라이버와 오실로스코프 등 DIYer에게 필수라고 할 수 있는 공구와 계측기를 갖게 되었고, PCB에서 부품을 떼는 요령도 많이 늘었다. SMD 부품을 떼고 붙이는 데까지 함부로 흥미를 갖지 않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Tactile switch는 어차피 고쳐야 할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강압 트랜스포머 없이 220V에 직결하여 쓸 수 있게 개조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2025년이라는 시대에 '빈티지 신스'인 X2를 이용하여 라이브 연주나 녹음을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품통의 새 전해 커패시터도 제조일자를 확인해 가면서 써야 하는가? ESR까지 측정해 가면서?

며칠 전, 알리익스프레스에서 5,785원에 구입한 키트형 XR2206 1Hz-1MHz 함수 발생기(function generaor)를 조립한 뒤 30,250원짜리 오실로스코프에 연결하여 테스트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0볼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교류 신호(정현파, 삼각파, 사각파)가 아니라 DC 오프셋이 존재하는 형태인 '맥류'였던 것이다. 공급 전압이 9~12VDC이므로 대략 그 중간 어딘가를 기준으로 변동하는 출력이 나오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자작 오디오 앰프의 성능을 시험하는 신호원으로 쓰기가 나쁘다.


조립 후 뚜껑을 덮기 전.


회로도. XR2206 monolithic function generator의 데이터시트는 여기를 참조할 것.


instructable.com의 7$ Functiona Generator Kit With XR2206 Problems: Don't Buy Before Watching이라는 글에서도 'There's always around 5.56V DC offset in the output'이라고 하였다. 조립 과정 및 테스트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글은 여기(XR2206 Function Generator Assembly and Operations manual)에 있다.

물론 대부분의 앰프 입력단에는 DC를 차단하기 위한 커플링 커패시터(coupling capacitor)가 들어 있어서 실용적으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판매자는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국내에서도 이 키트를 소개하면서 제작 및 테스트 과정을 보여주는 유튜버가 있었는데 DC offset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갖고 있는 몇 종류의 커패시터를 함수 발생기 출력 단자에 직렬로 연결해 보면서 AC 신호를 잘 뽑아내는 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지 점검해 보았다. 1uF 미만의 필름 캐패시터는 그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였다. 그런데 전해 커패시터는 그렇지 않았다. 4.7uF의 무극성 전해 캐패시터 및 10/22uF의 일반 전해 커패시터를 연결해 보았지만 DC 오프셋이 거의 제거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가? ChatGPT와 대화를 해 보니 '오래 되어서 성능이 떨어져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104(0.1uF) 필름 커패시터로 테스트하는 중. 바닥에 놓인 0.22uF 'X2' 커패시터도 디커플링을 잘 수행하였다. XY 커패시터는 EMC 필터에 쓰이는 특수 커패시터이다(설명).


전해 커패시터에도 유통기한이 있나? 그렇다고 한다. 어떤 글에서는 '직사광선을 피해 개봉 전 6개월, 개봉 후 한 달'이라고 하였다. 미사용 상태의 '새' 전해 커패시터가 슬슬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아니, 무슨 식품도 아니고... 그러면 7~8년 전에 한꺼번에 구입해 놓은 전해 커패시터는 어쩌라고? 부풀거나 전해액이 흘러서 외관상 확연히 구별되는 (특히 전원부 평활회로의) 전해 커패시터가 아니라면 전면 교체, 즉 '리캡'이 필요하지 않다는 글과, 새 전해 캐패시터라 하더라도 몇 달 안에 써야 한다는 글 사이에서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심지어 보유하고 있는 새 캐패시터의 성능을 사용 전에 점검하기 위해 ESR(Equivalant Series Resistance) 측정기를 장만해야 하는가? '커패시터 누설 저항과 ESR은 일반적인 멀티미터로 측정하기 어려운 고장 지표'라는 것이 1966년에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전기공학과에서 학사를 취득한 William Mays의 의견이다(Quora 링크). 정말 놀랍게도 이것 역시 몇 천원에 구입할 수 있다. 맹그러(Maker)님이 ESR에 관해 쓴 좋은 글(링크)이 있어서 소개한다.

어쩌면 이번의 작은 발견은 자작한 기기를 오랫동안 보수하면서 사용하겠다는 DIYer의 기본 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만 같다. 차라리 적당한 주기로 새 물건을 사거나 새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전해 커패시터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2025년 6월 4일 수요일

거버넌스(governance)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쓰기, 그리고 데이터 거버넌스 이야기

'거버넌스'라는 영단어의 뜻을 찾아 보았더니 '협치'라는 풀이가 튀어나와서 적잖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govern'이 '통치하다, 지배하다' 정도의 뜻을 갖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와 유사한 뜻의 명사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goven'에서 유래한 명사는 'governance'뿐만이 아니라 'government'(정부)도 있다. 미리암-웹스터 사전에서는 governanc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governance the act or process of governing or overseeing the control and direction of something (such as a country or an organization)

어떤 조직의 '지배구조'라고 해야 할 곳에 그저 '거버넌스'라는 낱말을 넣어서 멋있게 보이는 글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거버넌스'가 무엇인가? 공법학연구 제22권 제2호에 실린 양천수의 2021년 논문 데이터법-형성과 발전 그리고 과제-를 읽다가 225쪽에서 이와 관련한 글이 있어서 원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굵은 글씨와 밑줄은 내가 추가한 것이다.

데이터법은 최근 데이터에 관해 논의의 초점이 되는 데이터 거버넌스(data governance)를 구현하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여기서 데이터 거버넌스는 간략하게 말하면 데이터를 관리 또는 규율하는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데이터 거버넌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는 이에 전제가 되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거버넌스는 보통 정부를 뜻하는 ‘거번먼트’(government)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폐쇄적인 관료제로 구성되는 거번먼트와는 달리 거버넌스는 외부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열린 조직을 추구한다. 그 때문에 상명하달 형식의 수직적인 소통이 주류를 이루는 거번먼트와는 달리 거버넌스에서는 상호이해와 참여,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소통이 중심이 된다. 요컨대 전통적인 거번먼트가 팽팽하고 경직된 조직과 수직적 소통에 바탕을 둔다면 거버넌스는 느슨하고 탄력적인 조직과 수평적 소통에 바탕을 둔다.

거버넌스를 지배구조라는 용어와 동일시하게 된 것은 corporate governance(기업 지배구조)라는 용어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의 지배구조는 기업을 운영하고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주주/이사회 중심의 통제 구조를 뜻한다. 반면 거버넌스는 어떠한 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 참여까지 포함하는 열린 개념이다. 그러니 이를 '협치'라고 뜻풀이를 해 놓은 것은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되는 셈이다. 그렇다 해도 '데이터 협치'라고 해 놓으면 너무 어색하다. 어쩔 수 없이 영단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한글로 옮겨서 적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한글의 발전과 확장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ChatGPT에 따르면 지배구조는 governance as control이고, 거버넌스는 governance as process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오늘날 거버넌스의 올바른 의미는 어떤 조직, 시스템, 네트워크가 의사결정하고, 책임을 지며, 자원을 배분하고, 규범을 따르는 방식 전체를 말한다.

2014년 포브스에 실렸던 Jacob Morgan의 글 'Privacy is completely and utterly dead, and we killed it'을 음미하다가 이번에는 Personal Genome Project(PGP)로 대표되는 '정보를 공유할 권리(right ti share)'에 매료되어 본다. 아, 지조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스윙'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이번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언론 매체를 통해 '스윙(보터)'이라는 표현을 많이 보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다듬고 쓰임새를 늘림과 동시에 새로운 낱말을 갈고 다듬으면 안 되나?

2025년 6월 2일 월요일

ChatGPT에서 PDF를 만들기에 적합한 한글 TTF 글꼴은?

최근 읽은 책 <사생활의 역사>와 <리커넥트>. 오른쪽 책은 '은둔'과는 또 다른 문제인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두 책이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사뭇 다르다. <리커넥트>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나는 세상을 잘못 산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정보화 사회가 AI 기술을 만나면서 데이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워낙 대중화되어서 더 이상 사생활은 없고, 누구나 경제적 가치와 교환할 수 있다면 자기의 데이터를 넘길 자세가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규제가 심하다는 논조의 글을 나 역시 종종 써 왔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여기에 얼마나 개입을 해야 할까? 안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감시해도 될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데이비드 빈센트의 <사생활의 역사>(원제: PRIVACY: A Short History)를 읽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맨 마지막 장인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에서 인용한 몇 편의 참고문헌을 찾아서 한글 번역을 시도하였다. 당연히 작업 도구는 ChatGPT이다. 회색으로 표시한 글은 공백을 포함하여 약 310자 이내로 작성한 요지이다.

William L. Prosser. Privacy. California Law Review 48(3):383, 1960.

사생활 침해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가 법적 체계 내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분석합니다. Prosser는 네 가지 유형(사생활 침입, 공개된 사실, 허위조명, 사적 이익의 무단 이용)으로 사생활 침해를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명확한 법적 보호 체계를 정립하려 시도합니다.

A. Michael Froomkin. The Death of Privacy? Stanford Law Review 52:1461, 2000.

정보기술과 감시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 정보 보호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일상적 감시, 생체인식, 온라인 추적 등 기술이 사생활을 침식하고 있으며, 기존의 법률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다만 다양한 기술적·법적 조치를 통해 완전한 붕괴는 막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Jacob Morgan. Privacy is Complely And Utterly Dead. And We Killed It. Forbes 2014년 8월 19일.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공유하며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초래했다는 논지를 전개합니다. 감시의 주체는 정부뿐 아니라 개인 자신이며, '죽은 프라이버시'는 단순히 피해자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선택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이 분야에서는 매우 유명한 논문(마지막 것은 논문은 아님)인 것 같다. 독후감과 더불어 이 자료를 음미한 바에 대한 글은 나중에 생각을 더욱 정리한 다음 별로로 작성해 보겠다.

ChatGPT에 PDF 파일을 각각 밀어 넣은 뒤 한글 번역본을 역시 PDF로 제공하라고 하였더니, 어떤 문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잘 만들어 내다가 또 어떤 문서는 한글이 아예 표시되지를 않았다. 왜 그런지를 물었더니 다음의 조건을 만족하는 글꼴을 직접 밀어 넣어야 된다는 것이다.

  • TrueType Font(.ttf) 형식
  • 유니코드 범위가 완전하고
  • 단순한 글꼴 구조(복잡한 OpenType 기능이나 CID 맵핑 없음... 무슨 소리인지?)
  • 라이선스가 자유롭고 경량화된 들꼴

ChatGPT에서 한글을 포함하는 PDF 문서를 만들려면 FPDF(단순 문서, 요약 등 간단하고 빠른 작업)이나 ReportLab(논문, 서식지, 다단 문서, 표 포함 문서 등)이라는 것을 써야 하는데, 그 성능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둘 다 파이썬에서 PDF를 생성해 주는 것으로, 앞의 것이 매우 가볍고 빠른 경량 라이브러리이고(원래 PHP용으로 개발) 뒤의 것은 전문적인 PDF 문서를 생성하는 강력한 엔진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윈도우 기본 한글 글꼴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무료 글꼴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권장 글꼴 조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워드 클라우드를 만들 때에는 파이썬 라이브러리를 직접 업로드해야 했는데, 이번 PDF 문서 생성 작업에서는 그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글꼴은 넣으라고 한다. ChatGPT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라이선스 문제가 있으니 사용자가 중간 과정을 처리해 줘야 하는 것 같다.

다음은 나눔고딕(Regular/Bold)를 적용하여 ReportLab으로 만든 문서의 스크린샷이다. 처음 시도했던 결과물에서는 줄바꿈이 되지 않고 줄 간격이 16pt로 다소 좁아서 이를 개선해 달라고 하였다. 줄 간격은 24pt로 늘렸고, 문단 사이 간격도 더욱 늘려서 가독성을 좋게 하였다.



ChatGPT에 작업을 요구할 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2025년 6월 12일 업데이트

📄 한글 PDF 출력용 텍스트 생성 가이드 템플릿

✅ 1. 기본 요청 문구 (복사하여 그대로 사용 가능)

이 텍스트를 A4 크기의 한글 PDF로 출력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 줘.
- 줄바꿈이 잘 되도록 문단을 정돈해 줘. - 여백은 좌우 20mm, 위아래 20mm로 맞춰 줘. - 줄간격은 약 1.4배로 해 줘. - 본문 글꼴은 '나눔고딕(NanumGothic)'을 사용하고, 제목에는 '나눔고딕 Bold'를 사용해 줘. - 글꼴 파일은 내가 업로드할 테니 그걸 적용해 줘. - 용지 밖으로 문장이 튀어나가지 않게 해 줘. - 단락마다 적당한 줄 간격(공백)도 넣어 줘. 최종적으로는 PDF 파일로 만들어 줘.

✅ 2. PDF에 적합한 문서 구성 예시

제목: 디지털 바이오 거버넌스의 미래
부제: 데이터 커먼즈와 WOBD를 중심으로 1. 서론 디지털 생명과학 시대에서 데이터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동시에 공공성을 갖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본 문서에서는... 2. 데이터 커먼즈란 무엇인가 Elinor Ostrom의 공유지 원칙에 근거하여, 데이터 커먼즈는... 3. WOBD 사례 분석 미국 NSCEB 보고서에서 제안한 Web of Biological Data는... 4. 정책적 시사점 이러한 구조를 한국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5. 결론 데이터 커먼즈는 무분별한 개방이 아닌, 조건부 신뢰 기반 공유를 뜻한다... (※ 각 섹션은 명확한 제목, 짧은 문단, 한글 줄바꿈 기준에 따라 정리)

✅ 3. 글꼴 사용 안내

  • 기본 본문 글꼴: NanumGothic.ttf

  • 제목/소제목 글꼴: NanumGothicBold.ttf

  • 필요 시 매 세션마다 업로드
    👉 업로드 예시:

    file-NanumGothic.ttf file-NanumGothicBold.ttf

✅ 4. 줄바꿈 잘 되는 문장 스타일 예시

  • 줄바꿈 안 되는 예시 (문장 하나가 너무 김):

    데이터 커먼즈란 단순히 데이터를 개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신뢰와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고 활용하는 구조를 말한다.
  • 줄바꿈 되는 예시 (적절한 길이로 문장 분리):

    데이터 커먼즈는 단순한 개방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신뢰와 규칙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지속 가능하게 관리하는 구조이다.

✅ 5. 스타일 요약

항목설정 값
페이지 크기A4 (210x297mm)
여백좌우 20mm, 위아래 20mm
본문 글꼴나눔고딕 10.5pt
제목 글꼴나눔고딕 Bold 12.5–16pt
줄간격leading = 14 (1.4배 수준)
문단 간격단락 사이 8pt 이상
줄바꿈 처리자동 wrapping or <br/>
인코딩UTF-8 한글 지원 글꼴 필요

이 템플릿을 복사해 두셨다가 PDF 요청 시 활용하면 매번 줄바꿈이나 폰트 문제로 고생할 일이 없게 됩니다.

2025년 6월 1일 일요일

[KORG X2] 드럼킷과 관련한 궁금증

KORG X2/X3에는 총 4개의 편집 가능한 드럼킷(Drum Kit)이 존재한다. A09(Total Kit), A69(ProducrKit), B09(Rave Kit), 그리고 B69(VeloGated)이다. GM 뱅크의 129번-136번에 해당하는 8개의 킷은 편집을 할 수 없다.

X2/X3 Basic Guide 48쪽에는 다음과 같이 4개 킷의 음색 배열이 수록되어 있다.


각 킷에서는 60개의 키 인덱스에 000(Fat Kick)부터 163(Metronome2)까지 총 164개의 드럼 사운드를 매핑해 놓았다. 그런데 나의 X2를 X2P internal preload data로 재설정해 놓은 뒤 실제로 드럼 소리를 들어 보니 여기에서 소개한 배열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X3보다 나중에 출시된 X2에서 분명히 변화를 준 것은 맞는데, 어떤 점이 더 강화되었는지는 문서 등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Reference manual 170쪽에 의하면 드럼킷 설정은 Global 7A(Drum Kit Setup1)과 7B(Drum Kit Setup2)에서 다루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왜 설정 메뉴가 두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7A-1 모드에서 A1, A2, B1 및 B2를 전부 로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구한 X2/X3용 음색 설정 디스크 중에서 여러 악기로 구성된 완전한 곡이 아니라 드럼 패턴만 수록한 것은 XSD-15 Power Disk가 유일하다. 이 디스크 안에서 X3DRUMS 설정을 로드한 뒤, X3DRUMS.SNG를 시퀀서로 로드하면 S0-S9의 10개 곡 데이터를 얻게 된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망가졌으므로 .PCG 및 .SNG("X3DRUMS.SNG") 파일을 SysEx로 전환한 뒤 MIDI 케이블을 통해 전송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렇게 설정을 바꾼 상태에서 9개의 곡을 차례로 재생하여 녹음해 보았다.


그러면 이 시퀀스 데이터는 XFD-02 Internal Preload Data 디스크의 X3P_LOAD 설정과 잘 맞는가? 이것으로 설정을 되돌린 뒤, X3DRUMS.SNG를 다시 전송하여 각 곡을 재생해 보면 S1-S5는 소리가 맞지 않는다. 이 시퀀스를 제작한 사람은 X3의 기본 드럼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KORG X2가 드럼 머신으로서 탁월한 장비는 아니다. 만약 내가 '손가락 드럼'에 진정 관심이 있다면, 이미 보유하고 있는 AKAI MPK mini를 공부하는 것이 투입한 노력 대비 성과의 측면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구식 장비이기는 하나 음원으로부터 내장 시퀀서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Music Workstation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시퀀스 데이터에서 드럼 패턴을 복사에서 재사용 가능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

2025년 5월 30일 금요일

KORG X2의 팝업 노이즈 및 전원 공급 시퀀스의 기록

오디오 앰프의 전원을 넣거나 끌 때 들리는 '퍽' 소리를 팝업 노이즈(pop noise) 또는 파워 온/오프 노이즈라고 한다. 요즘은 앰프 칩 자체에 보호 및 anti-pop noise 기능이 내장된 경우가 많다.

KORG X2 신시사이저의 전원 회로를 내 마음대로 개조해 놓았더니 전에는 없던 팝업 노이즈가 발생하고 있다. 이를 오실로스코프로 기록해 보았다. 볼륨 슬라이더는 최대로 한 상태이다.


파형은 매번 모양이 다르다. 동영상으로도 기록해 보았다.


X2의 아날로그 보드에는 뮤트 드라이브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 파워 온 직후 전원 전압이 일정 수준으로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출력을 내보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리지널 전원 회로에서는 디지털 회로용 5V와 op amp용 +/-12V가 같은 SMPS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의 동시에 두 그룹의 전원 전압이 공급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올해 이를 개조하면서 SMPS 및 리니어 회로를 섞어 놓았으니 공급 시간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 

5V와 op amp용 +/-12V 중 어느 것이 먼저 공급될까? ChatGPT에 물어보니 SMPS가 만드는 5V는 거의 즉각적으로 출력될 것이고, 리니어 전원 회로의 것이 약간 늦게 나올 것이다. 개조하여 넣은 회로가 원래 설계된 뮤트 드라이브와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X2 뒷판을 열고 오실로스코프를 연결해 보면 된다.

회로의 종류가 다르므로 동시 공급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팝업 노이즈를 줄이려면 어느 것을 먼저 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ChatGPT에 의하면 op amp가 먼저 작동한 뒤 그 앞의 DAC에 전원이 들어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전원 공급 시퀀스의 비밀이 풀리다

30년 가까이 묵은 오실로스코프 프로브의 상태를 보라. 후크 커버를 분리하였더니 팁이 커버 속으로 쏙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 이것도 플라스틱이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 열화되면서 부러진 것 같다. 이런 작은 사건을 겪고 나니 X2를 비롯하여 낡은 오디오 관련 기기를 계속 유지보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오른쪽 검정색 프로브의 상태를 보라.

검색을 해 보니 'probe tip'이라는 액세사리가 있다는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찾기는 어렵다. 중국산 오실로스코프 프로브 자체가 비싸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전체를 바꾸는 것이 낫겠다. 

최근 구입한 저가 오실로스코프의 2개 채널을 전부 동원하여 X2의 전원(5V 및 12V)가 어떤 순서로 들어오는지 점검해 보았다. 오리지널 전원회로에서는 아마 거의 동시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5V가 먼저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Power on과 off 전부 12V가 먼저 들어오고 나갔다. 이어서 약 200~600msec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5V가 동작한다. ChatGPT는 X2와 같은 회로 구성에서는 +/-12V가 먼저 들어와서 후단의 op amp가 안정화된 다음, DAC에 5V가 공급되어야 팝업 노이즈가 적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전원장치가 개조된 나의 X2에서는 이미 이러한 시퀀스를 갖추고 있었다. 

ChatGPT의 답변이 틀렸을 수도 있다. 다른 대화형 AI에서는 전혀 반대 순서를 권장하였으니까 말이다. 또한 일반적인 오디오 기기의 연결에서도 소스 기기를 먼저 켠 뒤에 앰프를 켜라고 하지 않던가. 위에서 촬영한 기록으로 판단하자면, '앰프'가 먼저 켜진 다음 그 앞의 소스 기기가 펴지는 것과 같다. 

그동안 가졌던 기본 가정을 바꾸어야 되겠다. 5V를 12V보다 먼저 들어오게 하면 팝업 노이즈가 나지 않을 것이다. 

NE555를 사용한 시간 지연 릴레이 보드를 벌써 알리익스프레스에 주문해 놓았는데, 이것은 12V로 동작하는 것이다. ChatGPT의 답변을 너무 믿었다! 5V로 동작하는 것으로 주문했어야 한다. NE555는 동작전압의 범위가 4.5~16V로 매우 광범위하므로, 릴레이만 교체하면 사용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원 투입 순서를 바꾸어도 여전히 팝업 노이즈가 난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종류의 직류 전압 파형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 12V의 리플이 매우 심하였다. 시간축을 확대하니 더욱 극명하게 전원의 품질이 드러났다. 이러니 험이 그렇게 심했지... LM317/337을 사용한 전압 조정기 보드를 또 주문해 놓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험은 X2의 무신호 출력을 Audacity에서 녹음한 다음 50dB 증폭을 했을 때에 헤드폰으로 들리는 정도였다.

대충 눈으로 살펴본 노란색 파형(12V)의 리플 주기는 8msec, 즉 120Hz이다. 전파정류를 한 뒤 남는 전형적인 리플이다. 5V에 비하여 대단히 불량한 상태이다. WaveSpectra에서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보자. X2의 개조를 왜 시작했나? 우선 tactile switch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어서 전면 교체가 필요했었다. 이 수리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전원부 개조는? Hiss noise의 원인이 전원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엉뚱한 짓을 벌였다. 220V를 110V로 낮추는 강압 트랜스를 쓰지 않게 된 것은 정말 좋았다. 그러나 팝업 노이즈가 생겼고, 실용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어쨌든 성가신 험이 발생하게 되었다.

X2의 완벽한 개조는 여름을 훌쩍 넘길 것 같다.

2025년 5월 25일 일요일

SCO2 오실로스코프로 전원 어댑터의 품질을 측정해 보다

KORG X2 신시사이저의 잡음 문제를 토의하는 과정 중에 오디오퍼브에서는 전원의 품질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링크). X2의 아날로그 및 디지털 회로의 전원을 공급하는 보드는 얼마 전에 전부 최신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체용 보드를 중고로 구해서 교체한 것이 아니라 +5V(스위칭) 및 +/-12V(리니어)를 출력하는 범용 전원 공급용 보드를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별도로 구해서 넣은 것이다. X2의 메인보드에 위치한 DAC 및 이로부터 나오는 출력을 직접 받는 op amp(IVC 역할)는 매우 깨끗한 DC 5V가 필요하므로, 보드 내에 78L05UA를 이용하여 12V를 5V로 만들어 공급하는 별도의 회로가 존재한다. 

KORG X2 메인보드(KLM-939)의 확대 사진.

정전압을 얻기 위하여 흔히 쓰는 레귤레이터는 내부 출력 임피던스가 인덕티브한 특성을 지니므로 출력 커패시터와 공진을 일으켜 특정 주파수에서 노이즈 피크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레귤레이터 IC 및 그 주변의 소자가 열화되었다면 노이즈가 더 생길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에 나열하였다.

오실로스코프를 구입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근처의 전원 품질을 측정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배송이 완료된 후 며칠 동안 텍트로닉스 TDS 210을 사용했던 기억을 되살려 기본적인 사용법을 익혔다. 

오늘은 갖고 있는 몇 개의 전원 어댑터 품질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출력 파형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살피기 위함이다. 사실 오늘의 실험은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수행한 것이다. 다음에는 텔레다인 르크로이의 어플리케이션 노트 노이즈가 많은 전원 장치 출력 측정하기를 꼼꼼하게 읽어 보아야 되겠다. 

프로브는 1X로 맞춘 뒤 AC 커플링으로 측정을 시작하였다. AUTO 기능은 쓰지 않고 직접 X축(시간)과 Y축(전압) 간격을 조정하였다.

왼쪽부터 12V 3A, 9V 650mA, 12V 1A 출력의 어댑터. 내부는 어떤 회로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먼저 가장 왼쪽의 어댑터부터 측정해 보았다. X축은 1ms/div, Y축은 20mV/div로 하였다. 10X 프로브를 사용했다면 100mV/dev이 최소의 범위라서 작은 신호의 변화를 보기 어렵다. 그런대로 준수한 수준이다. 주파수는 약 1.14kHz.

Hold 버튼을 눌렀더니 파형이 두껍게 나타난다(화면 오른쪽 아래의 주황색 'STOP' 표시를 보라). Auto 버튼을 눌러도 정지된 모습으로 파형을 잘 잡지 못한다.

다음은 가운데의 것. 이것은 StudioLogic SL-990 키보드 컨트롤러에 연결해 쓰던 것이다. 톱니 모양의 리플에 더하여 전체가 출렁거린다. 출렁거림을 화면에 담기 위해 X축 단위를 더 긴 시간인 100mS/div로 늘려 보았다.


다음은 X축을 확대하여 5mS/div로 맞춘 후 측정한 것.

Hold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파형이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상태에서 그대로 화면을 촬영하였다.

다음은 세 번째 어댑터에 대한 결과이다. 톱니와 같은 파형의 주기가 훨씬 짧고, 진폭도 좁다. 시간축 간격을 200uS/div로 확대하였다.


7800 시리즈보다 노이즈 억제력이 훨씬 좋다는 LDO(low-dropout regulator)를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노이즈가 극히 적은 오디오 기기의 전원부에 널리 쓰인다는 LT3045 모듈을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가장 전원 품질이 나빴던 두 번째 어댑터의 출력을 LT3045 모듈에 공급한 다음, 그 결과를 측정해 보았다. 2채널 오실로스코프라서 레귤레이터 투입 전후의 신호 상태를 비교해 볼 수 있어 좋다. 아래의 노란색 톱니 파형이 레귤레이터 투입 전, 위의 파란색의 평탄한 파형이 투입 후이다. LDO의 효과가 극명히 나타난다.


아직 KORG X2의 노이즈를 오실로스코프로 측정해 보지는 않았다. 수 kHz의 주파수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것이 hiss 노이즈의 특징이니, 단순히 오실로스코프 화면으로 나타내기는 어려우며 아마도 WaveSpectra에서 FFT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SCO2의 다음 버전 업데이트에서는 FFT 기능이 추가된다고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실제 X2 뒷뚜껑을 열고 메인보드 내에서 공급되는 78L05UA 유래 5V 전압을 오실로스코프로 측정해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바라지 않았던 원인, 즉 DAC나 여기에 연결된 op amp가 문제였을지도... SMD 부품을 어렵사리 구한다고 해도 나의 장비와 실력으로는 보드에서 이를 떼어낸 뒤 새 것을 붙이는 일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다.

어제 겪은 필름 커패시터의 폭발 사고를 생각해 본다면, 제조 후 30년 가까이 지난 전자제품을 계속 유지보수하여 쓰려는 노력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하러 이렇게 낡은 신시사이저를 고쳐 보려고 애쓰는 것일까? 차라리 12~15년 이내의 주기로 새 물건을 들이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씩 배워 나가면서 DIYer는 보람을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2025년 5월 24일 토요일

SCO2 오실로스코프를 테스트하다 함수발생기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SCO2 테스트. 전원 트랜스포머 2차에서 얻은 60Hz의 파형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KORG X2 Music Workstation의 잡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한 저가 디지털 오실로스코프(모델명 SCO2 또는 SCO_2_10M, 제품 소개 웹사이트)가 5일 만에 도착하였다. 제품 설명은 '듀얼 채널 디지털 핸드 헬드 오실로스코프 PWM 50M 10Mhz 샘플링 속도 2.5KSa/S 전자 수리 도구 용 아날로그 대역폭'이다. Nyquist 이론(샘플링 속도 ≥ 2 × 신호의 최대 주파수)에 따르면 사실 이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 10MHz 대역폭에 2.5KSa/s 샘플링 속도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 판매 사이트의 본문에는 'current sampling rate: 2.4KSa/s'라고 되어 있다. 이 제품은 최대 6A의 전류 측정 기능도 있으니, 어쩌면 이에 대한 설명을 잘못 기재했는지도 모른다. 최소 그리드 간격은 100mV(10X 프로브), 50nS이므로 수 kHz의 신호만 측정 가능하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판매 사이트에 게시된 공식적인 제품 사양은 다음과 같다.

  • Model: SCO _ 2 _ 10M
  • Sampling rate: 50M/channel
  • Number of channels: 2
  • Analog bandwidth: 10MHz (per channel)
  • Measuring voltage: X1/+40V X10/ soil 400V
  • Input Impedance: 1MQ
  • Storage depth: 20Kb
  • Parameter Display: 12 kids
  • Current measurement: 0~6A
  • Minimum accuracy: 2mA
  • Current sampling rate: 2.5KSa/S
  • Display: 3.2 inch LCD
  • Resolution: 320*240
  • Charging voltage: 5V
  • Battery capacity: 2500mAh
  • Continuous working time: 4.5-6h
  • Host computer: to be updated
  • Firmware upgrade: support

상자에 붙어 있었던 라벨. 공식 모델명은 SCO_2_10M이었다.


테스트를 하기 위해 거의 30년을 묵힌 함수 발생기(function generator, METEX MXG-9802)를 연결하여 보았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금이 갈 정도로 낡은 상태이다. 충전식 초소형 오실로스코프라서 몇 개 되지 않는 버튼으로 조작을 하게 만들어 놓으니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시행착오 끝에 예쁜 사인파가 나오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함수발생기에서 폭발음이 나면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전원부의 전해 커패시터가 폭발한 것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오실로스코프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전자제품에게 30년 가까운 세월은 정말 가혹하다. 무엇이 터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함수발생기를 열기 시작하였다. 분해하는 방법을 몰라서 무척 애를 먹었다. 밑면에 있는 네 개의 다리에 붙은 쿠션을 뜯어내고 그 속에 숨은 볼트를 풀어야만 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무엇인가 터진 잔해가 쏟아지는데 외견상 전해 커패시터는 멀쩡하다. 기판 하나를 들어냈더니 바닥쪽 기판의 필름 커패시터가 터진 것이었다. 옆에 있던 레귤레이터는 내용물을 뒤집어썼다. 터진 부품은 X2 안전 커패시터라는 것이다. X2 신시사이저를 고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데 X2 커패시터가 터졌다. X2 커패시터는 교류 전원라인(L-N 사이)에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는 안전 인증된 필름 커패시터로서, 전원 라인에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커패시터 중 하나라고 한다.

RIFA PME271M 메탈라이즈드 폴리에틸렌 필름 커패시터. 폭발 당시의 힘에 의해 저 두꺼운 리드가 옆면을 뚫고 튀어나온 것을 보라.

위에서 본 모습.

커패시터 내용물을 뒤집어쓴 이 레귤레이터도 교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챗GPT의 설명에 의하면 수분 흡수로 인한 팽창 및 폭발 사고로 유명하다고 한다. 삼화 MPX2 시리즈나 Pilkor PCX2 339 시리즈와 같은 국산품이 있으니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 폭발사고 후에도 함수발생기의 디스플레이는 잘 표시되는 것을 보니 일단은 고쳐서 쓸 수 있을 것으로 본다.

SCO2 오실로스코프와 웹사이트에는 이런 표시가 있다.



安捷尼尔('안제니얼'로 읽음)은 바로 Engineer의 음차에 해당한다. 제품에 동봉된 매뉴얼의 PDF 파일도 웹사이트에서 받아볼 수 있는데(링크), 영문을 제공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소프트웨어를 V2.50(2025/03/17)로 업데이트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CH340 USB 드라이버가 Windows 11에 설치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더 나중 버전을 다운로드하여 겨우 설치하였다. 아두이노 호환 보드를 쓰면서 이 드라이버를 알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질 뻔하였다. SCO2 소프트웨어의 3월 버전에서는 파형 표시 알고리즘을 최적화하였고 화면 새로 고침 속도를 향상하였으며, UI가 최적화되었다. 다음 버전에는 파형 연산(A+B, A-B, AxB, A/B) 및 FFT(고속 푸리에 변환)이 추가될 것이라고 한다.

함수 발생기가 고장났으니 오실로스코프를 테스트할 파형을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한다. WaveSpectra와 WaveGen이라는 프로그램 덕분에 컴퓨터에서 원하는 파형을 만들 수가 있다! 이는 오디오 퍼브의 소개(링크)로 알게 되었다. 

악어 클립 케이블(1X)로 연결하여 WaveGen의 출력을 측정하는 모습. 

과연 이 장난감 같은 디지털 오실로스코프로 KORG X2의 잡음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까? 히스 노이즈는 여러 주파수의 파형이 섞인 것이라서 FFT를 하지 않으면 파악이 어렵다. 또한 직류 전원의 품질(특히 리플 수준)을 측정하려면 오실로스코프의 성능이 좋아야 한다. 인터넷에 자료가 많이 있으니 차차 공부해 나가도록 하자.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


2025년 5월 26일 업데이트

X2의 볼륨을 최대로 한 뒤 헤드폰 출력(R)을 Mackie Onyx Pdoucer 2·2 오디오 인터페이스로 연결한 뒤 WaveSpectra에서 FFT를 해 보았다. 아무 건반도 누르지 않은 상태의 분석 결과이다. 


수치 상으로는 noise floor가 별로 나쁘지 않다. 건반 하나를 눌러 보았다. 


오실로스코프를 연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가청 주파수, 즉 악기가 만들어 내는 저주파 영역에서 무음 시에 나타나는 노이즈와 직류 전원의 노이즈를 구별하여 이를 제대로 측정하는 방법을 익혀야 되겠다. 오실로스코프와 WaveSpectra는 전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오디오퍼브의 제안처럼 직류 전원에 커플링 커패시터를 연결한 뒤 오디오 인터페이스로 입력하여 WaveSpectra로 어떤 주파수의 노이즈가 섞여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2025년 5월 22일 목요일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삼엽충

이번에도 아들은 독특한 생일 선물을 보내 주었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를 보니 책이 분명한데 다른 것이 같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삼엽충('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그리고 진짜 삼엽충의 화석 2점. 이 책의 원제는 <Trilobite: Eyewitness to evoution>이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방어 자세를 취한 Austerops sp.(왼쪽)와 Flexicalymene ouzregui. 오른쪽 것(아쉽게도 라벨지에 인쇄된 학명 철자가 틀렸음)은 오르도비스기의 지표 화석이라고 한다. 판매처는 루페우스 코리아.

저자인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1946-2025)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수석 고생물학자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었으며, 과학의 대중화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 지난 3월 <가디언>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였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른 책을 읽느라 아들이 보내준 <삼엽충>은 지난 화요일 부산 BEXCO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KTX에 밀려서 대전-부산을 오가는 고속버스가 없어진 지금(도태 또는 멸종?), 전세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였다. 오늘 행사 참석을 위해 부산을 또 다녀 왔으니 이것 또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문학적이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푸른 눈동자(A Pair of Blue Eyes)>의 주인공이 영국 콘월(Cornwall) 지역의 해안가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위태롭게 매달렸다가 시야에 들어온 점판암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매달린 채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릴 때 주변세계의 익숙한 것들이 서서히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이트의 눈에 암석에서 약간 튀어나와 있는 박힌 화석 하나가 보였다. 눈이 달린 생물이었다. 죽어서 돌로 변했음에도 그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엽충이라고 하는 초기 갑각류의 일종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나이트와 이 하등생물은 죽음의 장소에서 마주친 듯했다. 마치 지금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손이 닿는 곳에 한때 살아 있었고 구해야 할 몸을 지니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29쪽).

하디는 이 지역에서 젊은 시절 건축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리처드 포티는 이 소설에 나오는 해안 지형을 답사하면서 소설의 이 구절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열 네살 때 삼엽충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들이 여자친구를 찾던 시기에 남웨일스 지방의 세인트데이비스 반도 절벽에서.

화석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서 치약과 함께 솔로 문질러 닦았더니 조각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세척하면 안된다!

포티는 이렇게 삼엽충에 매료되어 3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가 처음 박물관 직원이 되어 고생물학과에 배정되었을 때, '삼엽충에 관한 연구를 하는'이라고 적힌 직무설명서를 받아 들고 '즐기면서 돈을 번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77쪽). 그리고 평생을 삼엽충을 보러 다녔다. 새로운 삼엽충의 종을 찾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새로운 생물의 종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삼엽충이 얼마다 다양하고 정교한 생명체였으며, 어떻게 번성하고 사라졌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삼엽충의 눈은 정밀하고도 독특하다. 이러한 멋진 특성을 이어받은 현생생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꿈과 같은 상상이지만 만약 삼엽충의 DNA를 지금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삼엽충 진화가 단속적으로 이루짐을 선구적으로 발견한 루돌프 카우프만(1909-1941?, 위키백과)의 비극적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저미게 한다(198~203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2018년 흑백 영화 <콜드 워>를 몇 번이나 연상했는지 모른다. 1991년 우표 경매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편지와 엽서 묶음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슬픈 인생 결말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PubMed에서 리처드 포티의 논문을 찾아 보았다(검색 결과). 놀랍게도 매우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 Natl. Acad. Sci. USA)에 삼지창 모양의 구조를 머리에 달고 있는 새로운 삼엽충 Walliserops trifurcatus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었다. 이 내용은 302쪽에 나온다.

Trilobite tridents demonstrate sexual combat at 400 Mya. Gishlick AD, Fortey RA. Proc Natl Acad Sci U S A. 2023 Jan 24;120(4):e2119970120. doi: 10.1073/pnas.2119970120. Epub 2023 Jan 17. PMID: 36649420 (원문 링크) 보도자료 국내 기사

이 별난 삼엽충의 삼지창은 성적 경쟁을 위한 무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공작 수컷의 화려하고 거대한 장식 깃이나 사슴 수컷의 뿔을 연상해 보라. 출처: 그림 1(링크).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지금(인공지능의 파급력은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도대체 삼엽충이라니? 그리고 고생물학이라니?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은 10장 <눈이 있는자, 보라!>를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적으로 삼엽충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애써도 삼엽충학이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동원되는 시나리오를 짜낼 수가 없다. 이렇게 외롭고 무해하며 연구비를 따기 어려운 분야이지만. 그러다가 갑자가 어떤 연결이 이루어지면서 최첨단에 영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핵물리학이나 생리학(요즘 말로 이야기하자면 '바이오')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삼엽충 분야는 역사 전체를 살펴볼 여유가 있다.

탐구에 끝이란 없으며, 우리는 다음 절벽 뒤나 다음 셰일 조각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내 삼지창 삼엽충은 하나의 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키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했다.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더 메마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되리라고 예견한다... 앞으로 지식의 그물에 어떤 연결이 이루어질지 헤아리기는 더 어렵다. 그것은 다른 10겨 개 과학 분야의 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결이 계속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하며, 그것은 앞서 그런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303쪽).

고생물학은 장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한다. 한때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절멸한 생물을 탐구하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고, 환경·기후·지질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일례로 우리는도시화된 곳에 밀집해 살면서 지리적 여건과 심지어 기후까지도 기술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BEXCO에서 있었던 학술 행사에서 L박사는 합성생물학의 밝은 미래를 소개하였다. 발표가 끝난 뒤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생명체가 이런 공학적 원리에 저항하지 않던가요? (K대) L교수님 발표를 들으면 정말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러 군데 유전자를 한꺼번에 조작하면 수십 세대만 지나도 그 형질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이에 대해 L박사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챗GPT에 의하면 고생물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대한 시간의 거울에 비춰보게 하는 지적 자극'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포티의 글 중 Nature 2016년 9월 15일자에 발표한 신간 서평이 매우 인상깊었다('Dendrology: The community of trees', PubMed). Nature는 구독하지 않으면 전문을 접근할 수 없어서 내 맘대로 이 글의 번역을 여기에 올리지는 못한다. 짧게 소개하자면 이는 독일의 삼림 관리인 Peter Wohlleben의 책 <The Hidden Life of Trees: What They Feel, How They Communicate — Discoveries from a Secret World>에 대한 서평이다. 저자는 숲을 매우 정교하게 얽인 다층적 네트워크로 묘사하였음을 포티는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충분히 흥미로운 접근이지만, 이는 마무를 껴안으려 더 깊은 실재와 연결된다고 믿는 행위와 멀지 않다고 하였다. 즉, 나무는 엔트(Ents)가 아니라고 하였다. 엔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 생명체라고 한다. 포티의 글을 완벽하게 음미하려면 토마스 하디에 이어서 J. R. R. 톨킨의 책도 읽어 봐야 될 것 같다. 국내에도 소개된 포티의 또다른 저서 <나무에서 숲을 보다(원제: The Wood for the Trees)>도 구해서 읽어봄직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16년, 즉 포티가 Nature에 서평을 쓴 바로 그 해이다.

파손 방지를 위해 앞으로는 화석을 솔로 문질러 세척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되겠다. 

삼엽충 외골격의 상세 구조. 출처: British Geological Suervey(링크).


삼엽충 모양의 마우스 디자인. 출처: ATEC-DAB UTDallas 블로그에 게시된 Ashley D. Goodenough의 작품(링크).


무수한 화석으로 남은 삼엽충 앞에서 우리는 보다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달이나 다른 행성으로 자원을 찾으러 떠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AI가 발달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뜻하지 않은 아들의 선물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챗GPT에게 부탁하여 그린 그림.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드디어 달을 파먹기 시작할 것이다. 삼엽충 모양의 우주선에 달에서 채취한 광물자원을 싣고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삼엽충은 언젠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지도 모르는 우리 인류의 문명을 암시한다.

저자가 185쪽('박물관' 장)에서 인용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경구를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희망에 부푼 여행이 도착보다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