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일요일

내 블로그의 사진이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 쓰인 이야기 - MBC '손석희의 질문들' 제4회

나는 지메일을 매일 꼼꼼하게 열어 보지는 않는다. 어차피 개인 메일 계정으로만 쓰기에 업무상 중요한 일이 지메일로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방송일 하루 전 새벽에 MBC에서 보낸 이메일 메시지를 놓칠 뻔하였다. <손석희의 질문들> 프로그램의 PD가 보낸 그 메시지는 내 블로그에 올린 진공관 앰프 사진을 방송에서 자료로 사용하고 싶으니 허가를 구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지메일뿐만 아니라 블로그의 포스팅 두 개에도 같은 사람이 사진 활용이 가능한지 묻는 댓글을 달아 놓았었다. 광고성 댓글이 너무 많이 달려서 자동 알림 기능을 아예 꺼 놓았기에 그런 문의 댓글이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6J6이라는 진공관을 4알 사용한 미니 푸시풀 앰프를 찍은 이 사진의 출처는 2018년 3월에 작성한 블로그 포스트이다(링크). 내 블로그에 올린 숱한 진공관 앰프 사진 중 이것은 내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 개인 제작자의 작품이다. 나의 오디오 DIY에 관한 전체 글 목록에는 꽤 많은 진공관 앰프 관련 사진 자료가 있는데, 하필 이 사진이 눈에 뜨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촬영 장소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본관동 북쪽윙 3층에 위치한 예전 사무실이다. 참고로 쌍삼극관인 6J6은 원래 오디오용 관이 아니다.

출처를 명시해 주면 사용해도 좋으니 방송은 언제 되느냐고 답장을 보냈다. 바로 오늘(8월 24일 토요일 - 참고로 이 글은 토요일에 방송을 본 뒤 늦은 시간에 쓰기 시작하였으나 실제 마무리를 거쳐 포스팅된 날짜는 일요일) 밤 8시 40분이라면서 텔롭에 출처를 표시해 준다는 답장이 재차 도착하였다. 텔롭이 뭐지? 검색을 해 보니 텔롭(telop, television opaque projector)이란 TV 방송에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영상 속에 글자나 그림을 직접 넣어 보내는 장치 또는 그 글자나 그림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방송 끝부분에 삽입되는 텔롭이라면 영화로 치면 엔딩 크레딧 정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요즘 단행본 원고를 하나 쓰면서 편집자와 함께 바이라인(byline, 신문이나 잡지에서 작성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라인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헤드라인과 텍스트 사이에 위치함)에 올릴 저자 목록에 관한 논의를 하는 중인데, 이것 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도대체 어떤 초대 손님과 함께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손석희의 질문들> 제 4회에서 내 진공관 앰프 사진 - 지금은 개조 후에 처남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 을 배경으로 깔게 된 것일까? 호기심을 잔뜩 안고서 TV 앞에 앉았다.

오늘 방송의 주제는 영상물이 넘쳐 나는 시대에 '읽고 쓰는 것'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었다. '숏폼', 즉 짧은 동영상에 모두가 몰두하는 이 시대에 차분하게 앉아서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많은 인내력을 요구한다. 

첫 번째 초대 손님은 작사가 김이나 씨였다. 역시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사용하는 낱말의 폭이 풍성함을 느꼈다. 젊어서는 전완근이 발달한 사람이 멋져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전두엽이 발달한 사람이 낫다는 재치 있는 말과 함께. 참고로 전두엽은 기억력, 사고력, 추리, 계획, 운동, 감정, 문제해결 등 고등정신작용을 관장하며 다른 연합영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조정하고 행동을 조절한다고 한다(출처: 서울아산병원).

대중음악의 가사를 쓴다는 것은 창작자로서 자기 자신을 아주 잘 드러내는 일은 아니다. 비록 저작권협회에 수백 곡이 등록되어 적지 않은 고정 수입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가장 돋보이는 일이다. 만약 가사를 쓰는 일을 아주 심각한 '예술'로 여기고, 그 하나 만을 주업으로 삼아서 전력 질주하듯이 일을 했더라면 이렇게 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이나 씨는 현재 27대 별밤지기로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기에게는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하였다. 두 진행자는 책('텍스트')은 마치 라디오와 같다고 하였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문자로 전달된 정보를 머릿속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런 쪽으로 대화가 흘러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진공관을 이용한 옛날 라디오(수신기)와 TV로 흘러 갔다. 드디어 세트장 위 커다란 배경 화면에 내 블로그의 사진이 나타났다. 엄밀히 말해서 이 사진은 진공관 라디오가 아니라 진공관 앰프를 찍은 것이지만. 전원을 넣으면 진공관에 불이 들어오면서 소리가 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멘트와 함께. 기록을 위해 휴대폰으로 방송 화면을 찍었다. 전체 방송을 보려면 웨이브에서 구매권을 구입하여야 한다.



두 번째 초대 손님은 소설가 황석영 씨였다. 방북 후 망명을 거쳐 귀국한 뒤 옥고를 치르는 등 15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문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현업에 복귀하였고, 지금도 새 책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을 만큼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이 민담집을 엮어서 내는 등 새로운 시도를 끊임 없이 하고 있으며, 컴퓨터와 챗GPT와 최신 기술을 다룸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황석영 씨는 '챗GPT를 써 보니 마치 박사 열 명을 데리고 일하는 것 같더라'고도 하였다.

독서 인구나 출판 시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것으로 화제가 이어졌다. 요즘 독서 인구에서 20~30대의 비율이 70% 정도로 늘어나고 있고, 유명 연예인이 읽었다고 방송에서 소개한 소설의 판매량이 급증한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전 소설을 읽는다'는 유명인의 행위 자체를 따라 하면서 소셜 미디어 등에 내보이기 위해서 젊은 층이 서점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황석영 씨는 이렇게 해서라도 시작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저변이 늘어나기 시작한다면 그 중에는 진정성을 갖고 책을 대하는 사람이 조금은 늘어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지난 2015년에 출판된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선>도 잠깐 화제에 올랐다. 당시 경향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소개한다. 나도 갑자기 소설책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

황석영 "정치인들 한국 소설 읽어야"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 황석영 씨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도둑놈이 집을 침입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다리를 두고 간 것이라고. 남기고 간 사다리가 도둑이 물러간 이후 피해자 가정의 살림에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결과를 이유로 도둑의 침입·폭행·약탈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화면으로 흘러가는 '텔롭'을 지켜 보았다. 자료 출처를 소개하는 글귀가 옆으로 흘러 지나가는 가운데 '정해영의 블로그'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휴대폰 조작을 잘못하여 그 순간을 촬영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웨이브에서 유료로 구매하여 다시 보면 된다. 

마지막 회인 다음 주에는 영화배우 윤여정 씨가 출연한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또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이 주제라고 하였던 것 같다. 겨우 5회를 끝으로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려고 했었으나 역시 시청률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번 4회에서 손석희 씨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 질문 - 읽고 쓰는 문제 -을 던진다고 했으니 말이다.

증거물 확보! 김상옥 박사님, 고마워요~

김이나 씨는 나이가 들어도 재미 있는 사람, 후배들이 찾아와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방청객이 질문과 함께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칭찬하고 떠 받들어 주는 것을 믿지 말라는. 정말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자기로 집중되고, 듣기 좋은 말만 들리기 마련이다. 권력 서열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윗사람에게 비판보다는 칭찬에 가까운 말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을 진실에 기반한 것으로 오해하고 '옳거니, 역시 내가 인생을 잘 살고 있었어!'라고 여기면서 이를 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 우물을 파고 싶지만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젊은이의 질문에 대해 김이나 씨는 미래를 위해 현재 모든 것을 다 쏟지는 말라고 했던 것 같다. 가사를 쓰는 것을 예로 들자면, 특정 가수와 계약을 맺어서 기한 내에 완성을 해야 하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경우 이를 잠시 멈추고 다른 가사를 써 보는 것이다. 나도 가끔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내가 인터넷에 남긴 사진 자료가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 아니겠는가? 텍스트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책을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된 것도 이번 방송의 바람직한 영향일 것이다. 주말마다 인근 도서관을 열심히 찾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왜 그러지 못하는 것인지... 다시 도서관에 간다면, 외국서적 번역본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소설책을 읽고 싶다. 헛갈리지 않도록 등장인물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가면서 말이다. 눈 앞을 어지럽히는 짧은 동영상과 손가락 넘김으로 표출되는 인내심 부족을 모두 떨쳐내고, 텍스트로부터 비롯된 상상력을 머릿속에 채우면서 정신적 쾌감을 느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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