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1일 토요일

창자(腸) 앤 드럭스(drugs)

올해 8월 3일에 받은 종합건강검진 결과를 상담하기 위해 어제 출근길에 내가 늘 다니던 병원의 가정의학과를 방문하였다. 처방약을 한 꾸러미 받아 들고 나서는데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러브 앤 드럭스(2010)>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스토리 전개에 과연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노출 수위가 과도하게 높은 로맨스 드라마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적나라게 묘사했던 거대 제약회사 영업활동의 치열한 현실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내가 받은 처방전에도 그런 영업활동의 영향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침 B tv의 무료 영화 목록에 이것이 올라와 있어서 저녁 식사 후 아내와 함께 예전에 보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감상하였다. 영화 내내 'Pfizer', 'Zolotof', 'Viagra'와 같은 실제 회사명과 약품명이 등장하는데, 챗GPT에 물어본 바에 의하면 Pfizer가 실제로 이 영화를 후원했다는 공식적인 증거는 없다고 한다. 국내 개봉 당시 대한민국 약사법을 유린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좀 있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링크).

TV 화면 직접 촬영. 아래도 마찬가지.

남녀 주연배우는 각각 1980년, 1982년 생이니 영화가 개봉한 2010년에는 얼마나 풋풋한 젊음을 자랑했겠는가?

그러면 영화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내가 처방 받은 약에 대해서 써 보고자 한다. 고지혈증 치료제는 워낙 오랫동안 먹고 있는 데다가 별다른 부작용 없이 잘 듣기 때문에 특별히 조사하고 공부할 필요성은 잘 느끼지 못한다. 이번 상담에서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또는 과민성 장 증후군, IBS, irritable bowel syndrome)을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지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과민성장증후군이란 반복적으로 복통과 함께 복부 불편감, 배변 습관의 변화, 복부 팽만감 등 다양한 하부위장관 증상이 나타나는 증후군으로 만성적으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한다. [출처: 대한소화기학회지, 2017 과민성장증후군의 임상진료지침 개정안 소개(PDF)]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던가, 무척 심한 장염을 앓고 나서 배변 습관이 아주 불편하게 바뀌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는 필수이고 낮에 외출한 상태에서도 꼭 화장실을 한 번 이상 찾아다녀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리집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출근 전 화장실을 찾는 습관이 있었고(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디 가려고만 하면 꼭 그 직전에'), 어쩌면 유전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IBS에는 설사형과 변비형 및 혼합형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설사형이다. 

어떤 의사는 배변 횟수가 하루 3회부터 일주일 3회까지라면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 '창자의 존재'를 느끼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가스가 차고, 꾸르륵거리며 무지근한 불편함을 불러 일으키고,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KTX 안에서 황급히 화장실을 찾아 돌아다니고... 주말에 모처럼 시내로 나가서 외식을 한 후 에어컨이 틀어진 서늘한 카페에서 디저트(팥빙수!)를 먹기가 무섭게 갑자기 아랫배에서 불편함을 느껴서 차를 되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낭패를 겪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특히 비행기를 타고 국외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시차에 적응하는 며칠 뒤까지 그 괴로움이 더하다. 이번 9월에 딸이 있는 뉴욕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기왕이면 약의 도움을 받아서 편안한 여행을 하고자 어렵사리 의사에게 말을 꺼낸 것이다.

의사는 혹시 평소에 불안을 많이 느끼느냐고 물었다. 질문 자체가 별로 즐겁지는 못하다. 큰 일을 앞두고 마음이 초조하여 좌불안석이거나, 심장이 빨리 뛰거나 하지는 않으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약속 시간에 남달리 일찍 나가는 것이 불안의 증거라고 하면 또 모르겠지만. 식사 후 변의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이 심하다고 해서 약을 써 봐야 어차피 그때 뿐이니 증세가 걱정될 때만 식사 전에 먹으라면서 다음과 같은 약을 일주일 치 처방해 주었다. 여행 전에 시간이 있으니 미리 먹어 보고 부작용이 없는지 테스트를 해 보라는 지시와 함께. 인터넷에서 각 약의 정보를 찾아 보았다(드러그인포는 로그인이 필요). IBS 증세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약은 menoctyl(+polybutin)이다. 증세가 심하지 않다며 polybutin 한 종류만 먹는 것이 몸에 부담이 덜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주 심한 증세가 나타날 것이 우려될 때에만 임시적으로만 사용할 목적으로 여러 약을 섞어서 강력한 처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약 정보를 찾아보다가 '인데놀'은 꽤 유명한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박수를 낮추고 혈관을 안정화하여 긴장이나 흥분 상태를 가라 앉히기 때문에 소위 '면접약'으로 널리 쓰인다는 것 아닌가? 우황청심환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의사는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을 IBS에 같이 쓰게 되면 사용에 주의하라는 말을 했는데, 바로 이 약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남들 앞에 자주 서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상비약으로 애용할 정도라니 그 효능을 짐작할 만하다. 일단 오늘(토요일) 시험 복용을 해 보았다. 결과는 나중에 쓰기로 한다.

IBS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약물은 일부 환자에 대해서 증세를 완화하는 것에 불과하니, 먹는 습관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른바 FODMAP(fermentable, oligo-, di-,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을 낮게 함유한 음식을 권장한다. 고FODMAP 식이는 소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고 대장으로 이동하여 삼투압에 의해 수분 배출 및 대장 관강을 확장시키고 장내 박테리아에 의해  발효되어 가스를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FODMAP 제한 식이는 복통과 복부 팽만감을 호전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설사형과 변비형의 증세를 완화시키는데 모두 유용하다(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하지만 고FODMAP 식이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뭘 먹으란 말인가?

그림 출처: 과민성 대장증후군, 탈출 비밀번호는 'FODMAP'. 한겨레신문 2024년 4월 30일

이를 포함한 식이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은 2017년 대한내과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 과민성 장 증후군 치료의 최신 경향'(PDF)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래 추가한 업데이트의 '일반인을 위한 알기 쉬운 음식설명서'도 유용하다. 다음은 증거바탕의학에 기반할 수는 없지만 식이 전문가의 일반적인 조언으로, 출처는 2015년도 British Medical Journal이다.

  1. 규칙적인 식사와 천천히 삼키기
  2. 식사를 거르지 말고, 먹는 도중에 중단하지 말기
  3. 하루에 8컵 이상의 음료 마시기
  4. 차와 커피는 하루 3잔 이내로
  5. 술과 탄산음료 줄이기
  6. 식이섬유가 많은 음식을 섭취하기
  7. 저항성 전분의 섭취 줄이기
  8. Fructose, sorbitol, lactulose 등의 섭취를 줄이기
  9. 팽만감 감소를 위하여 쌀, 귀리, 아마씨 섭취하기
  10. 알로에 베라 사용 자제
  11. 매운 음식(capsaicin) 줄이기

우리나라의 소화기 질환 전문가들이 우리 실정에 맞는 IBS의 임상적 특징, 병태 생리, 진단 및 치료 가이드라인을 발간해 오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자료로는 2019년 대한내과학회 추계학술대회 논문인 '과민성 장 증후군의 치료 가이드라인'(PDF)이 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대한소화기기능성질환·운동학회와 대한내과학회 등 관련 학회에 따라 별도로 발표되는 것 같다.

삼성서울병원 소화기내과 이준행 교수('아낌없이 주는 선생')가 운영하는 EndoTODAY에도 '과민성 장증후군과 저포드맵 식사'라는 유익한 글이 올라와 있다. 저/고FODMAP 식이의 사례를 매우 쉽게 설명하였다. 또한 다음 의견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Dietary and psychological intervention이 first-line therapy가 되어야 한다는 take-home message로 강의가 끝났습니다. 약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음식과 stress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IBS는 약으로 치료할 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약물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증세를 잠시 완화하는 효과만 있을 뿐임을 명심하자. 적절한 운동, 바람직한 생활습관과 식이, 그리고 굳건한 평정심 유지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업데이트 - 약 1회 복용 후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

아침 식사 전 약을 먹은 뒤 점심식사 후까지 약 5~6시간 정도 창자의 존재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속이 비교적 편안하였다. 약 복용 직후 2~3 시간 정도에 걸쳐 약간의 졸림 현상이 있었는데, 이는 그란닥신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IBS는 기능성 위장관 질환, 즉 반복적인 소화기 증상을 보이지만 객관적 검사에는 이상이 없는 질환의 일종이다. 2021-22년에 메디게이트뉴스에 실렸던 대한소화기기능성질환·운동학회 릴레이 칼럼에는 총 13회에 걸쳐서 이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 바 있다. 제13회차인 '포드맵(FODMAP) 음식 그것이 알고싶다'에 전체 글에 대한 링크가 소개되어 있으니 하나씩 클릭하여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같은 학회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알기 쉬운 음식 설명서도 배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기능성 변비, 기능성소화불량, 위식도역류질환 및 과민성장증후군을 포함하였다. 아무래도 이번 글의 제목을 '위장관 and 음식 and 드럭스'로 바꾸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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