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7일 목요일

이태원 빌리 엔젤의 추억

어제 휴대폰으로 작성한 은 나의 글쓰기 본능을 충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오늘만큼은 근처 PC방을 찾아서 그동안 생각해 둔 바를 마음껏 글로 남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생애 두 번째로 찾는 PC방이라니! 미리 사용법을 검색해 보았다. 카운터에서 관리자를 직접 대면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좀 어색했지만 별로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구글에서 'PC방'을 검색하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이 PC방을 경험하면서 놀라워하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너무나 많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방송을 포함하여 왜 이러한 것(동영상·기사 등)이 만들어져서 국내인을 위해 소비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자는 것인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부류의 프로그램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 외국인이 온 나라에서 방송이 되어서 인기를 얻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아르바이트생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회원 가입을 어떻게 하느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저 'PC에서 하시면 돼요'였고, 가입 후 결제를 하러 다시 카운터로 가서 물었더니 '(기계에서) 직접 해 보세요'가 전부였다. 이보다 조금 더 친절할 수는 없는 것일까.


PC방은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외부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경고가 여럿 붙어있었다. 시설은 매우 쾌적하고 장비의 성능도 좋아 보였다. 먼지 방지용 투명 커버를 벗겨내니 멋진 조명의 기계식 키보드가 나를 맞는다. 평소에 사무실에서 쓰던 멤브레인 키보드에 비하여 스트로크가 다소 길지만 키를 누를때  '달각달각'거리는 느낌이 너무나 좋다. 얼마 전 KOBIC 전산실을 방문했을 때 관리자가 쓰던 묵직한 기계식 키보드에서 뭔가 전문가적인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PC방의 것은 이에 더하여 형형색색의 LED 조명이 물결 흐르듯 시간에 따라서 밝기가 변한다. 조명 때문에 키보드가 꽤 전력을 소모할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마우스도 예사롭지 않다. 나도 늘 컴퓨터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몸에 직접 닿는 주변 기기를 바꾸어서 호사를 누려보고 싶다.



PC방 초보에게 조명 키보드는와 마우스는 큰 감동을 주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면서 작업을 하고 싶은데 설정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관리자에게 물어봐야 친절한 설명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음향 관련 제어판 설정을 매만져 보았으나 자꾸 외부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 모니터 한쪽에 '스피커&헤드셋 듣기는 해당 아이콘을 더블클릭하세요'라는 메시지가 떠 있다. 처음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바탕화면에 '헤드셋 듣기'라는 아이콘이 있었다. 이것을 더블 클릭을 하니 비로소 헤드셋에서만 소리가 난다. 유튜브를 열고 Corelli의  Complete Edition을 재생하였다. 헤드셋을 벗고 혹시나 외부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하였다. 사용자들이 게임을 하는지 키보드를 민첩하게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모두가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거의 눕다시피 앉게 만들어 놓은 의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척추 건강에 별로 좋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면 이태원 빌리 엔젤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이태원역 교차로에서 동쪽(한남동) 방향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이 끝나가는 곳 즈음에 짙은 파랑색의 5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1층에는 Loui Ruth's라는 베이커리 카페가, 2-3층에는 멋진 인테리어의 디저트 카페인 Billy Angel이 있었다.


2017년 2월의 모습.
2018년 2월의 루이 루스.
 


루이 루스는 와플이 맛있었고, 빌리 엔젤은 독특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끌었었다. 절제미가 느껴지는 흰 바탕에 멋들어진 조형물이 있었고, 벽에는 그래픽으로 표현한 오드리 햅번, 엘리자베스 테일러(확신이 잘 서지 않음), 그리고 비비안 리의 초상이 크게 걸려 있었다. 이런 세세한 사항까지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지시를 한 것인지 혹은 점주의 창의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조각 케익을 먹으며 창밖으로 이태원 거리를 내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달콤한 케익에 어울리는 쌉쌀한 커피는 1층에서 구입하여 들고 올라왔었다. 물론 케익의 가격은 싼 편은 아니었지만 맛은 좋았다. 자리가 없어서 발길을 돌려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위기와 파는 음식이 판이하게 다른 두 개의 매장이 한 건물에 층을 달리하여 입주해 있었으나 의외로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2017년 2월 촬영.

이러한 독특한 인테리어를 없애면 손님을 더 많이 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2018년 12월, 이태원 빌리 엔젤은 그렇게 바뀌었다.


이러한 기대가 성탄절까지 이어지리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2018년 12월 25일에 다시 찾은 이곳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에는 1층 루이 루스의 분위기에 맞게 건물 바깥쪽도 짙은 파란색이었는데, 다시 찾은 이곳에는 루이 루스는 없어지고 빌리 엔젤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리모델링을 하여 예전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건물 외벽도 밝은 색으로 다시 칠한 것 같았다. 홀은 더 많은 손님이 앉을 수 있도록 조밀하게 테이블을 배치하였고, 성탄절을 즐기러 나온 커플 손님들로 이미 빈 자리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3층까지 올라갔다가 여자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특별한 날이니 손님이 많은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다.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으고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인테리어를 바꾼 것도 업주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추억과 분위기를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내와 나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이곳을 되돌아 나왔다. 어차피 자리가 없어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지만, 둘 다 같은 마음이었다. 다시 이 곳을 오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루이 루스와 빌리 엔젤의 추억이여, 안녕!(2018년 2월)
어느덧 정오가 지났다. 점심을 해결할 시간이 되었는데, 또다시 카운터에 가서 어색하게 주문을 해야 하는가? 요즘은 PC에서 직접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고 하니 모니터 어딘가에 이것과 관련된 기능이 있으렸다... 인기 게임 리스트를 직접 클릭하여 실행하는 창이 몇 개 있고 오른쪽 위에 'PICA Play'라는 창에 커피를 그린 아이콘과 '상품 주문'이라는 탭이 보인다. 이를 클릭하니 라면, 빵, 음료 등 다양한 메뉴가 보인다. 편의성도 좋지만 이렇게 대면 접촉을 하지 않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니 놀랍고도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기왕 PC방에 왔으니 모든 서비스를 다 이용해 보자는 생각으로 주문을 하였다.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클릭은 되지 않았다. 컴퓨터 사용료 못지않게 음식 매출도 PC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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