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8일 금요일

(주)항소 고객지원실을 방문하여 만년필을 수리하다

올 겨울 들어서 최강의 추위가 몰아닥친 하루이다. 장갑과 목도리, 모자로 중무장을 하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507 대신빌딩 5층에 위치한 (주)항소의 고객지원실을 찾았다. 바닥에 떨어뜨려서 닙이 휘고 제대로 글씨가 써지지 않는 워터맨 엑스퍼트 만년필을 수리하기 위함이다(Waterman  만년필, 망가지다 2018/12/10). '항상 웃는다'는 뜻의 (주)항소(恒笑)는 파커와 워터맨의 필기구를 수입하는 업체이다. 파커(Parker)는 우리나라에서는 '파카'로 상표가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도 '파커'라고 쓴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먼 길을 나섰다. 7호선 청담역 9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 청담 사거리에 이른 뒤 길을 건너 오른편으로 네번째 건물이다. 다음의 사진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밝은 갈색 계통의 5층 건물이 대신빌딩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올라 (주)항소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고객지원실을 찾았다. 바닥에 떨어뜨려서 닙이 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잠시 기다렸다. 닙이 크게 손상되지 않아서 간단히 펴서 수리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핫트랙스에서 보낸 물건 - 아마 수리를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이 분주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담당 기사는 수리가 되었으니 테스트를 해 보라며 만년필과 종이를 건넸다. 종이에 긁히는 느낌이 없이 부드럽게 잘 써졌으며 끊김도 없었다. 수리비는 들지 않았다. 망가진 직후에는 만년필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서 그냥 서랍에 넣고 잊어버리거나 사설 수리업체를 찾아갈 생각만 했었다. 이렇게 공식 수입처에서 처리를 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약 대전에서 우편으로 수리를 의뢰했더라면 오가는 배송료를 들이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을까?


내가 사용하는 워터맨 만년필 두 종(Phileas & Expert)은 전부 캡이 매우 쉽게 여닫긴다. 그러나 이것이 밀폐 불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정 불편하다면 캡을 따로 구입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웬만한 저가 만년필 하나 가격이 되니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파커 IM Preminum Vacumatik의 잉크 마름 현상에 대해서도 문의하였더니 많은 사용자가 이 문제로 고생을 하지만 오래 사용하면 나아진다고 한다. 나처럼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은 캡에 뚫린 구멍을 테이프로 막아서 쓰기도 한다(파커 IM Premimum Vacumatic 만년필의 잉크 마름 현상 해결하기).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Good replacement for Parker IM? <= 'Hard starts and drying out (thanks to that ventilation hole under the clip)'라는 표현이 내가 경험한 문제 바로 그대로이다.


수리 전후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왼쪽이 수리 전, 오른쪽이 수리 후이다. 변형된 닙 끝이 완벽하게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글씨를 쓰는데 더 이상 지장이 없다면 무슨 문제이랴?




만년필을 이렇게 수리를 하고 나니 지난주에 구입한 3·OYSTERS의 헌터스 만년필의 활용 빈도가 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세 자루의 만년필을 같이 놓고 사진을 찍어 보았다. 왼쪽의 소책자는 오늘 (주)항소에서 입수한 것이다.





전화 통화와 같은 직접적인 대화를 피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전화 통화를 두려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인 콜포비아(call phobia)라는 낱말까지 생겨났다. 영어권에서는  telephone phobia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으로 여겨진다(위키피디아). 이는 최근의 언택트 마케팅(untact marketing, 대면 접촉을 없애는 마케팅 방식 관련 기사 "웬만하면 말 걸지 맙시다")과 연결되면서 직접적인 대화 또는 대면을 기피하는 풍조는 점점 더 흔해지는 것 같다. 작년에 읽었던 소설 '밈: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린 미래가 현실화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 카카오톡이나 메신저를 더욱 선호하면서 전달되는 텍스트는 더욱 넘쳐나지만, 정작 종이 위에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넘쳐나는 텍스트 역시 정제되지 않은 상태이며, 정확하지 않은 것도 많다. 악의적인 텍스트(정보)는 만드는 사람과 퍼 나르는 사람에 의해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나는 고지식하게도 이런 세태에 역행해 보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다. 손으로 정성들여 쓴 글씨는 진실에 좀 더 가까우며 절제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소통의 방식은 low-tech에 가까울수록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보다는 직접적인 만남, 전화 통화, 아니면 손으로 쓴 편지가 더욱 진정성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의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통하려고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다. 편하게 혼자 쇼핑을 하려는데 곁에 다가와서 자꾸 뭔가를 권하고 설명하려는 판매원이 가끔은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판매원의 의도 때문인 것이지 대면 접촉 자체가 사람을 피곤하게 해서 그렇다고 보지는 않는다. 패스트푸드점의 무인주문기가 나는 싫다. 기계적인 ARS 역시 마찬가지다. 좀 더 인간적인 방식을 이용한 교류를 원한다.


만년필 정보를 검색하다가 미국 브랜드인 Conklin의 Duragraph Collection(링크)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화려한 무늬의 레진 몸통이 워터맨 필레아(구형)를 닮았다. 스크류 캡을 쓰는 만년필로서 매우 매력적이고 가격도 적당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구입하여 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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