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는 과거에 받은 공격의 기억에서 온다. 그것은 생존 본능이다. 특허 명세서나 법원 판결문처럼 극도로 방어적인 문서들도 결국 같은 원리에서 만들어진다.
글쓰기는 정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다. 조직에서 만들어 내는 많은 문서는 겉으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책임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안전하게 글을 쓰는 방식을 방어적 글쓰기라고 불러 보자. '세 시간 내로 보내 주세요'와 같은 갑(甲)의 요청에 대응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작성된 글을 전달하는 기술에 해당하지만, 이것도 포함하여 논하기로 한다.
첫 번째 기술은 매우 널리 통용되는 것으로, 제출 시한에 임박해서 보내기이다. 표면적으로는 작성에 공을 들이느라 이렇게 되었다고 변명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 만들어 놓고도 일부러 늦게(그러나 기한 내에) 보내는 것이다. 문서를 너무 일찍 보내면 검토와 질문이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술은 표현을 적절히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세하거나 전문적인 용어가 들어가면 추가 설명을 요청하거나 꼬투리를 잡히기 쉽다. "모든 여건을 감안해 본다면", "일반적으로", "필요하다면"과 같은 표현은 문장도 온건하게 만들고 책임의 범위도 흐려진다.
세 번째 기술은 서론을 길게 만드는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긴 배경 설명이 들어가면 읽는 사람은 핵심 메시지를 잡아채서 논쟁하기 어려워진다. 결론을 가장 나중에 말하는 우리말의 특성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글쓰기 기법이다. 이 기술은 글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으로 서론을 길게 끌면, '결론부터 말해봐요'라는 공격에 직면할 수 있다.
글을 요청하는 갑(甲)은 이런 기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원래 이틀 뒤에 받아도 충분한 글을 일부러 촉박하게 내일까지 달라고 요청한다. 이틀 후에 제출해도 된다는 것은 물론 철저히 숨긴다. 을(乙)이 애를 먹고 있음을 너무나 뻔하다. 이윽고 내일이 되었다. 갑은 마감 직전에 이렇게 알린다. "힘드세요? 그러면 시간 하루 더 드릴께요". 을은 갑이 어렵사리 융통성을 발휘해 준 것으로 착각하고 오히려 고마워한다.
을에게 마감일을 어떻게 통보할까? 금요일 퇴근 전? 월요일 출근 직전? 이를 결정하는 데에도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지고, 그 결과에 따라 을의 주말은 평온한 휴식이 될 수도 있고 초과 근무가 될 수도 있다. 주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좋지 않은 뉴스를 금요일 오후에 내보내는 것('Friday afternoon news dump'), 인사발령을 금요일 오후에 내는 것... 다 이유가 있다. 방어적 글쓰기와 함께 엮어서 방어적 커뮤니케이션 전술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전형적인 방어적 글쓰기 사례는 뭐가 있을까? 보험 약관, 특허 명세서, 법원 판결문, 감사 대응 보고서, 기업의 리스크 공시, 의료 동의서/임상시험 설명문, 계약서 등.
이러한 기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업무 중 매우 이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는 당신은? 자랑스러워하지 말라. 조직 혁신의 측면에서는 매우 어두운 곳에 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