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2일 목요일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삼엽충

이번에도 아들은 독특한 생일 선물을 보내 주었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를 보니 책이 분명한데 다른 것이 같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삼엽충('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그리고 진짜 삼엽충의 화석 2점. 이 책의 원제는 <Trilobite: Eyewitness to evoution>이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방어 자세를 취한 Austerops sp.(왼쪽)와 Flexicalymene ouzregui. 오른쪽 것(아쉽게도 라벨지에 인쇄된 학명 철자가 틀렸음)은 오르도비스기의 지표 화석이라고 한다. 판매처는 루페우스 코리아.

저자인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1946-2025)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수석 고생물학자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었으며, 과학의 대중화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 지난 3월 <가디언>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였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른 책을 읽느라 아들이 보내준 <삼엽충>은 지난 화요일 부산 BEXCO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KTX에 밀려서 대전-부산을 오가는 고속버스가 없어진 지금(도태 또는 멸종?), 전세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였다. 오늘 행사 참석을 위해 부산을 또 다녀 왔으니 이것 또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문학적이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푸른 눈동자(A Pair of Blue Eyes)>의 주인공이 영국 콘월(Cornwall) 지역의 해안가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위태롭게 매달렸다가 시야에 들어온 점판암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매달린 채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릴 때 주변세계의 익숙한 것들이 서서히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이트의 눈에 암석에서 약간 튀어나와 있는 박힌 화석 하나가 보였다. 눈이 달린 생물이었다. 죽어서 돌로 변했음에도 그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엽충이라고 하는 초기 갑각류의 일종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나이트와 이 하등생물은 죽음의 장소에서 마주친 듯했다. 마치 지금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손이 닿는 곳에 한때 살아 있었고 구해야 할 몸을 지니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29쪽).

하디는 이 지역에서 젊은 시절 건축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리처드 포티는 이 소설에 나오는 해안 지형을 답사하면서 소설의 이 구절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열 네살 때 삼엽충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들이 여자친구를 찾던 시기에 남웨일스 지방의 세인트데이비스 반도 절벽에서.

화석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서 치약과 함께 솔로 문질러 닦았더니 조각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세척하면 안된다!

포티는 이렇게 삼엽충에 매료되어 3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가 처음 박물관 직원이 되어 고생물학과에 배정되었을 때, '삼엽충에 관한 연구를 하는'이라고 적힌 직무설명서를 받아 들고 '즐기면서 돈을 번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77쪽). 그리고 평생을 삼엽충을 보러 다녔다. 새로운 삼엽충의 종을 찾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새로운 생물의 종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삼엽충이 얼마다 다양하고 정교한 생명체였으며, 어떻게 번성하고 사라졌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삼엽충의 눈은 정밀하고도 독특하다. 이러한 멋진 특성을 이어받은 현생생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꿈과 같은 상상이지만 만약 삼엽충의 DNA를 지금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삼엽충 진화가 단속적으로 이루짐을 선구적으로 발견한 루돌프 카우프만(1909-1941?, 위키백과)의 비극적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저미게 한다(198~203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2018년 흑백 영화 <콜드 워>를 몇 번이나 연상했는지 모른다. 1991년 우표 경매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편지와 엽서 묶음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슬픈 인생 결말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PubMed에서 리처드 포티의 논문을 찾아 보았다(검색 결과). 놀랍게도 매우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 Natl. Acad. Sci. USA)에 삼지창 모양의 구조를 머리에 달고 있는 새로운 삼엽충 Walliserops trifurcatus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었다. 이 내용은 302쪽에 나온다.

Trilobite tridents demonstrate sexual combat at 400 Mya. Gishlick AD, Fortey RA. Proc Natl Acad Sci U S A. 2023 Jan 24;120(4):e2119970120. doi: 10.1073/pnas.2119970120. Epub 2023 Jan 17. PMID: 36649420 (원문 링크) 보도자료 국내 기사

이 별난 삼엽충의 삼지창은 성적 경쟁을 위한 무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공작 수컷의 화려하고 거대한 장식 깃이나 사슴 수컷의 뿔을 연상해 보라. 출처: 그림 1(링크).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지금(인공지능의 파급력은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도대체 삼엽충이라니? 그리고 고생물학이라니?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은 10장 <눈이 있는자, 보라!>를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적으로 삼엽충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애써도 삼엽충학이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동원되는 시나리오를 짜낼 수가 없다. 이렇게 외롭고 무해하며 연구비를 따기 어려운 분야이지만. 그러다가 갑자가 어떤 연결이 이루어지면서 최첨단에 영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핵물리학이나 생리학(요즘 말로 이야기하자면 '바이오')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삼엽충 분야는 역사 전체를 살펴볼 여유가 있다.

탐구에 끝이란 없으며, 우리는 다음 절벽 뒤나 다음 셰일 조각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내 삼지창 삼엽충은 하나의 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키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했다.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더 메마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되리라고 예견한다... 앞으로 지식의 그물에 어떤 연결이 이루어질지 헤아리기는 더 어렵다. 그것은 다른 10겨 개 과학 분야의 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결이 계속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하며, 그것은 앞서 그런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303쪽).

고생물학은 장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한다. 한때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절멸한 생물을 탐구하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고, 환경·기후·지질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일례로 우리는도시화된 곳에 밀집해 살면서 지리적 여건과 심지어 기후까지도 기술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BEXCO에서 있었던 학술 행사에서 L박사는 합성생물학의 밝은 미래를 소개하였다. 발표가 끝난 뒤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생명체가 이런 공학적 원리에 저항하지 않던가요? (K대) L교수님 발표를 들으면 정말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러 군데 유전자를 한꺼번에 조작하면 수십 세대만 지나도 그 형질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이에 대해 L박사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챗GPT에 의하면 고생물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대한 시간의 거울에 비춰보게 하는 지적 자극'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포티의 글 중 Nature 2016년 9월 15일자에 발표한 신간 서평이 매우 인상깊었다('Dendrology: The community of trees', PubMed). Nature는 구독하지 않으면 전문을 접근할 수 없어서 내 맘대로 이 글의 번역을 여기에 올리지는 못한다. 짧게 소개하자면 이는 독일의 삼림 관리인 Peter Wohlleben의 책 <The Hidden Life of Trees: What They Feel, How They Communicate — Discoveries from a Secret World>에 대한 서평이다. 저자는 숲을 매우 정교하게 얽인 다층적 네트워크로 묘사하였음을 포티는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충분히 흥미로운 접근이지만, 이는 마무를 껴안으려 더 깊은 실재와 연결된다고 믿는 행위와 멀지 않다고 하였다. 즉, 나무는 엔트(Ents)가 아니라고 하였다. 엔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 생명체라고 한다. 포티의 글을 완벽하게 음미하려면 토마스 하디에 이어서 J. R. R. 톨킨의 책도 읽어 봐야 될 것 같다. 국내에도 소개된 포티의 또다른 저서 <나무에서 숲을 보다(원제: The Wood for the Trees)>도 구해서 읽어봄직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16년, 즉 포티가 Nature에 서평을 쓴 바로 그 해이다.

파손 방지를 위해 앞으로는 화석을 솔로 문질러 세척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되겠다. 

삼엽충 외골격의 상세 구조. 출처: British Geological Suervey(링크).


삼엽충 모양의 마우스 디자인. 출처: ATEC-DAB UTDallas 블로그에 게시된 Ashley D. Goodenough의 작품(링크).


무수한 화석으로 남은 삼엽충 앞에서 우리는 보다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달이나 다른 행성으로 자원을 찾으러 떠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AI가 발달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뜻하지 않은 아들의 선물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챗GPT에게 부탁하여 그린 그림.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드디어 달을 파먹기 시작할 것이다. 삼엽충 모양의 우주선에 달에서 채취한 광물자원을 싣고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삼엽충은 언젠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지도 모르는 우리 인류의 문명을 암시한다.



2025년 5월 21일 수요일

값싼 휴대용 오실로스코프를 주문하다

취미로 이따금 납땜을 하는 사람은 비싼 도구를 살 때 실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고주파 인두가 그렇고, 오실로스코프가 그렇다. 아마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납 흡연기를 사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라는 나라 덕분에 DIY에 필요한 각종 부품이나 공구, 계측기기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오실로스코프가 몇 만원이라니? 조작성이나 전반적인 성능이 중고 텍트로닉스 제품에 비할 것은 아니겠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텍트로닉스의 TDS 210이라는 오실로스코프를 갖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전원을 넣었더니 화면이 알아볼 수 없게 나왔다(링크). 교체용 스크린(5.7인치)을 국외에서 구할 수는 있지만 신품은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다. 게다가 노브도 몇 개 없어졌다. 그 돈을 들이느니 차라리 저가 오실로스코프를 새로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uora에는 2020년에 160달러에 Tektronix TDS 210 오실로스코프를 구매할 가치가 있을까요?라는 글이 있다. 답변은 '비싸다'였다. 

어차피 오디오 신호 외에는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5만원 미만의 휴대용 오실로스코프면 충분할 것이다. 디지털 멀티미터 및 신호 발생기를 겸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가격이 슬슬 올라간다. 프로브는 이미 두 개의 텍트로닉스 P6112(100MHz, 10X)를 갖고 있으므로 프로브를 포함하지 않는 패키지를 선택하면 몇 천원이라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2채널로서 배송비가 무료이면서 조금이라도 싸게 파는 것이 없을까... 알리익스프레스에서 하나의 모델을 골라 놓은 뒤 검색을 하여 조건이 괜찮은(=프로브를 적게 포함한) 다음의 제품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화면은 3.2인치에 불과하고—놀랍게도 TDS 210의 5.7인치 디스플레이와 동일한 해상도인 320 x 240 픽셀—샘플링 속도는 채널당 50M, 대역폭은 10MHz이다. 유튜브에서 SCO2 dual channel digital oscilloscope review를 입력하면 몇 개의 동영상이 나온다. 메뉴가 불편하고 펌웨어 업그레이드가 까다롭다는 의견이 있다. 직류 전원의 미세한 리플을 정확히 측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구입한 가격은 30,250원. 패키지에는 악어클립 케이블, 고전압 프로브, 그리고 USB 케이블이 포함되었다. 다른 물건도 두어 가지 같이 주문하면서 약간의 할인을 더 받은 것 같다. 

돈낭비일까? 글쎄, 점심 두 번 먹은 것으로(거기에 커피까지?) 생각하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DSO2512G라는 제품은 이보다 더 좋지만, 10만원 언저리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이 기기는 요즘 잡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KORG X2 synthesizer를 비롯하여 내가 가끔 새로 만들거나 고치는 오디오 기기의 점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텍트로닉스 TDS 210을 30년 가까이 갖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DIY 기술의 근본적 혁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 점심값 수준의 오실로스코프를 구입하고는 뭐가 갑자기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오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달라진 것이 있다. 많은 경험을 통해 그 분야가 무엇이든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생각하는 수준이 높아졌고, 추진력 자체가 더 왕성해졌다. 또한 단순히 취미로 끝날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의 경력 및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방향과 연결지어 통합적인 성과로 완성하겠다는 확신이 더욱 커졌다.

X2의 잡음 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있는 오디오퍼브에서는 오디오 스펙트럼 분석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오실로스코프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만 있으면 된다. 이를 사용하면 FFT(Fast Fourier Transform)도 가능한 것으로 안다.

Wave Spectra와 Wave Gen 프로그램

ARTA 소프트웨어용 테스트 픽스처 만들기

CJ대한통운에서 배송 완료 알림이 왔다. LT3042라는 LDO(low dropout regulator)를 이용한 초저노이즈 5V 공급 보드가 도착했을 것이다. X2의 DAC 및 IVC에 안정적인 5V가 공급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주문한 것이다. 일주일 쯤 지나서 오실로스코프가 도착하면 전원의 품질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근 몇 달 동안 구입한 물건 중 쓸모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밝혀질 것이다.

LT3042 보드(위)와 M5216L op amp(데이터시트). 아래의 부품은 KORG X2의 아날로그 보드에서 헤드폰 앰프 회로를 구성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2025년 5월 19일 월요일

요한 하리의 책, 매직필(Magic Pill)

저자 요한 하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위키백과를 찾아 보았다가 다음 인용문과 같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인기 작가로서 이런 과거는 잊혀지고 싶은 부끄러운 구석일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인디펜던트》를 퇴사한 뒤 오히려 전문 작가로서 더욱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회가 되면 2023년 국내에도 소개된 같은 저자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어 보고 싶다. 

요한 에두아르트 하리는 《인디펜던트》와 《허프포스트》에서 근무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이다. 2011년 하리는 2001년부터 상습적인 표절과 자료 조작, 자신을 비판한 언론인들의 위키백과 문서를 악의적으로 편집한 것을 인정한 뒤 《인디펜던트》에서 정직되었으며 이후 사임했다. 출처: 위키백과

올해 2월 국내에 소개된 요한 하리의 책 매직필('기적의 비만 치료제와 살찌지 않는 인간의 탄생')<매직필>은 '집중력 문제와 비만율 증가의 공통점'이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전작인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비만으로 이어지면서 GLP-1(Glucagon-like peptide-1) 호르몬 기반 비만 치료제의 개발 경위와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관한 책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GLP-1은 음식을 먹었을 때 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는 것을 촉진하여 혈당을 낮추고, 동시에 글루카곤 분비를 억제하여 간에서 당이 만들어지는 것을 억제하며, 뇌에 작용하여 포만감을 유발한다. 쉽게 말해서 '어, 배불러~'하는 느낌을 주는 호르몬이다. 체중 감량이라고 하면 보통 엄청난 의지가 필요한 일로 여겨지는데, 그저 일주일에 한 차례 주사를 맞는 것만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어째서 그런 마술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 일반인이라도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가 없다.

매직필을 읽으면서 각 장의 시작 부분에 삽입된 간지의 화려한 분홍색이 눈에 뜨였다. 어디서 많이 본 색깔인데... 그렇다. 화제의 영화 <서브스턴스>였다. 출판사에서 일부러 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연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최신 생명공학 기술에 의존하여 젊을을 유지하려다가 결국 불행한 결말을 초래한다는 충격적인 이 영화는 매직필이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부정적 효과(의학적·심리적·사회적)와 맞닿아 있다.



출판용어 중에서 간지는 각 장을 단순히 구분하기 위해 넣은 색지를 일컫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인쇄는 하지 않는다. 각 장을 소개하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다면 이는 일본어에서 온 인쇄용어인 '도비라(とびら·문짝)'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 말을 국어로 순화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다음의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도비라·세네카·하리꼬미? 한국책 인쇄하는 것 맞나요(조선일보 2020년 10월 26일)

마침 BRIC의 Bio리포트에서 지난 4월 비만 치료제 개발 동향에 관한 리포트를 게재하였기에 그 링크를 참고 목적으로 소개해 둔다. 이 리포트는 GLP-1 계열 비만 치료제를 시장과 기술이라는 측면에서만 소개한 것이다. 2014년 비만 치료제로 최초 승인된 제품인 노보 노디스크의 삭센다는 매일 주사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면서 체중 감소 효과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반감기가 길어서 주1회 주사로 충분한 새로운 개발제품 오젬픽(2017)이 제2형 당뇨병 치료제로 등장하였고, 비만 치료 용도로 더욱 용량을 늘린 위고비(2021)가 나오게 되었다.

어쩌다가 비만이 이렇도록 인류에게 흔한 현상(질병?)이 되었는가? 매직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녕 부작용은 없을까? 특별히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신체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는 거식증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 약을 남용하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저자인 요한 하리는 직접 오젬픽을 사용하면서 이 논쟁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비만이 곧 질환인가?'라는 물음에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만에 의해 건강이 위협받고 일상과 사회 생활마저 어려운 상태라면 치료해야 할 질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지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의지 부족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인류는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늘 배가 고프게 살아왔고, 따라서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남는 영양분은 되도록 체지방으로 비축하려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다. 따라서 요즘과 같이 값싸고 입맛에 짝짝 달라붙는 공업화된 먹을거리가 넘치는 문명 사회에서는 누구나 쉽게 비만해질 수 있다. 이렇게 떨쳐 내기 어려운 비만을 일주일에 한번 맞는 주사로 해결할 수 있다니 정말 복음과 같은 소식 아니겠는가?

하지만 GLP-1 계열의 약품은 끊는 순간 다시 무섭게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공정이 개선되고 제너릭 의약품이 풀리면서 값이 더 내려갈 터이니 고지혈증약이나 고혈압약처럼 평생 사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낙관적 예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약은 배고픔을 둘러싼 신체의 근본적인 조절 메커니즘을 '해킹'하는 것이며, 장기 사용에 의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는 우리 몸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고 본다. 약간 적게 먹고, 초가공 식품을 피하며,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체중조절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시력이 떨어지니 안경을 끼고, 소화가 안 되어서 소화제를 먹듯이 체중 감량을 쉽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초고도 비만인 사람의 삶의 질을 되돌리기 위한 방편이라면 모를까. 또한 패션이나 연예 산업에서 대중에게 마른 체형에 대한 환상을 계속 주입한다면(예를 들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모델 '트위기' 및 케이트 모스 등) 건강한 체중 또는 체형에 대한 왜곡된 추구를 할 수밖에 없다. 기술이나 효율성에 기반한 경제의 논리가 아니라 문화 및 사회적 수용성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제10장 '식욕을 없앨 수만 있다면'이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저술가 엘리스 로넌(Elise Loehnen), 그리고 저자의 오랜 친구 '라라'과 만나 대화하면서 겪은 경험을 다루었다. 책 전체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매우 적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묵직하다. 먼저 엘리스 로넌. 할리우드 스타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아주 비싼 웰빙 경험을 팔다가 이것이 자기를 '삭제'하는 것임을 깨닫고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케이스이다. 두 번째인 라라. 저자가 오젬픽을 쓰는 것은 건강 때문이라고 하지만, 라라는 췌장암에 걸릴 위험(아마 장기 부작용 가능성을 말하는데 완벽하게 입증된 것은 아님)을 감수하면서 고작 외모에 대한 허영 때문에 그 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냐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즉, 자기 몸과 전쟁을 벌이지 말자는 것이다. 

글의 흐름은 다음 장에서 자연스럽게 비만한('비만이다'가 아니라 '비만하다'가 옳다고 함) 사람이 스스로의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비만 수용 운동('fat pride' 또는 'fat acceptance')과 연결된다. 침대에서 누워서 살아야 할 정도로 극 초고도 비만인 사람에게 팻 프라이드를 가지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만은 병일까, 아닐까? 2022년 코메디닷컴에 실린 기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 비만은 병이라는 입장 - 비만은 신경회로 이상으로 인해 식욕 조절이 어려워지는 것. 유전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 비만은 병이 아니라는 입장 - 비만을 병으로 간주하면 개인의 책임감이 희석된다. 비만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이다. 



2025년 5월 18일 일요일

10km를 한 시간에 달리고 싶다면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가

왜 낮에 달리면 더 힘이 들까? 더워서일까? 비가 잦았던 요즘 날씨 때문에 그렇게 덥지도 않은 5월 중반에 더워서 달리기가 더 힘들다는 핑계를 대기도 어렵다.

일요일이었던 오늘은 오전을 이용하여 달리기를 하기 위해 갑천변으로 나섰다. 첫 1km는 5분 36초로 끊으면서 잘만 하면 평균 페이스 6분 미만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다고 자신을 하였는데,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숨도 차서 4km째에 잠시 멈추어야 했다. '지속 가능한 페이스를 유지하세요'라던 런데이의 멘트가 떠올랐다.

요즘 들어서 목표 거리(6km)를 왜 한번에 채우지를 못하는 것인가. 이틀 전, 영종도에서도 5km를 뛰고 잠시 쉬어야만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오래 달리기라도 하자는 생각에 추가로 4km를 더 뛰어서 8km를 채웠다. 평균 페이스가 6분 반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지만, 전반적으로 지난 봄보다 실력이 떨어진 것만 같다. 2025년에는 6분 미만의 페이스가 되거나 10km를 쉬지 않고 달려 낼 수 있으리라 막연하게 기대하였건만, 고통스런 훈련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달리기를 거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저 평소와 동일한 목표만 채우는 것으로는 퇴보하고 만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런데이의 <50분 달리기 도전> 프로그램을 따라서 해 보거나, 전력 질주를 약간 포함하는 변형된 방식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ChatGPT에게 "6분 15초 정도의 평균 페이스로 6km를 겨우 달리는 수준입니다. 1시간에 10km를 달리려면 어떤 체계적 훈련을 해야 되나요?"라고 질문해 보았다.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제시된 훈련은 4주 용 계획이므로 나에게는 상당한 고강도일 수도 있다. 

현재 6분 15초/km의 페이스로 6km를 완주하셨다면, 이미 기초 지구력과 심폐 능력은 갖추고 계신 상태입니다. 목표인 1시간에 10km(= 6:00/km 페이스) 달성은 충분히 가능한 거리이며, 훈련을 체계화하면 수주 내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몇 가지 훈련 요소를 골고루 강화해야 합니다.


🎯 목표

  • 목표 거리: 10km

  • 목표 페이스: 6:00/km

  • 목표 시간: 60분


🧱 주간 훈련 구성 (주 3~4회 기준)

지속주 (기초지구력 향상) – 1회

  • 내용: 편안한 속도로 7~9km 달리기

  • 페이스: 6:30~6:45/km

  • 목적: 거리 적응, 지구력 향상

페이스주 (목표 페이스 적응) – 1회

  • 내용: 4~6km를 목표 페이스(6:00/km)로 달리기

  • 점차 거리를 늘려 8km까지

  • 목적: 목표 페이스에 신체 적응

인터벌 or 템포런 (심폐기능 강화) – 1회

  • 템포런: 2km 워밍업 → 3~4km를 5:30/km 전후 → 쿨다운

  • 인터벌: 800m × 45회 (5:155:30/km), 휴식 400m 조깅

  • 목적: VO₂max 및 유산소 임계 향상

④ (선택) 리커버리 조깅 or 크로스트레이닝 – 1회

  • 자전거, 빠른 걷기, 수영 등

  • 너무 지치면 휴식도 괜찮음


⏳ 시간 프레임

  • 꾸준히 하면 4~6주 안에 10km 1시간 완주 가능

  • 이후에는 페이스 안정성부상 예방에 집중


📌 보조 팁

  • 스트레칭과 코어 운동 병행 (부상 예방)

  • 주 1회는 걷기 포함해도 좋음 (회복용)

  • GPS 워치나 앱으로 기록 추적 (Strava, Garmin 등)

  • 충분한 수면과 수분 섭취


🧭 마일스톤 예시

주차장거리주페이스주템포런
1주차7km @ 6:454km @ 6:003km @ 5:45
2주차8km @ 6:405km @ 6:004km @ 5:40
3주차9km @ 6:356km @ 6:005km @ 5:35
4주차10km @ 6:307km @ 6:003km × 인터벌

✅ 마무리

목표는 충분히 현실적이며, 페이스 유지력과 호흡 여유도 함께 키우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ChatGPT가 제시한 훈련 프로그램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특히 국문 설명에서는 지속주-페이스주라고 해 놓으니 이를 해당 주의 3회 달리기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달리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8주짜리 프로그램을 짜 보는 것이다. 다시 요청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표를 받았다.


상당히 합리적인 계획표라고 여겨진다. 



실수투성이의 KRIBBtonite 5월 공연

UST KRIBB스쿨에서 개최한 스승의날 행사에서 우리 밴드 KRIBBtonite가 작은 축하 공연을 하였다. 지난 2월 연구소 창립 40주년 행사에서 가졌던 공연, 연구소 마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노래 몇 곡을 연주한 것까지 포함하면 벌써 올해 세 번째의 공연이다.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공연이 확정되었고 건반 연주자의 출산 휴가, 게다가 내가 손가락을 다치는 일도 생기는 바람에 공연을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멤버들의 열정이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연습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연주자가 충분하지 않아서 배킹 트랙을 미리 준비하여 이를 틀어 놓고 나머지 악기와 보컬을 얹는 이른바 노래방 모드로 공연을 진행하였다.

배킹 트랙 준비는 언제가 그렇듯이 내가 하였다. 이번에는 모든 곡에 대해서 전체 음량도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어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음원 파일을 GAUDIO STUDIO 등에 올려서 일부 파트를 제외하게 만들면 남은 소리는 영 깨끗하지 못하다. 다음부터는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MIDI 데이터를 얻어서 최소한 드럼 트랙은 따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다. 실전에 사용한 삼익 패드 드럼 역시 잡음이 너무 심해서 아쉬움이 많았다. 다음의 영상에서 두 번째 곡인 우효의 <민들레> 시작 부분에서 잡음이 크게 들린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배킹 트랙을 휴대폰에서 블루투스 수신기를 통해 파워드 믹서로 보낸 것이다. 곡을 잘못 재생하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실수는 없었다. 세 번째 곡인 볼빨간사춘기의 <여행> 2절을 신나게 끝내자마자 갑자기 반주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 년에 걸쳐 사용해 온 블루투스 수신기가 갑자기 말썽을 부린 일은 없었다. 블루투스 수신 기능이 있는 ALTO Uber PA를 파워드 믹서(SAMSON XML 610)에 유선으로 연결하여 모니터 스피커용으로 쓴 것이 문제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면 적절한 위치에 두기가 어려워서 충전을 한 뒤에 작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스피커의 배터리가 다 방전되면서 불안정한 상태에서 블루투스 수신 기능을 잡아 챈 것으로 여겨진다.  공연 현장에서 무선 연결을 쓸 경우 배터리 방전이나 다른 기기와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것도 좋다. 

공연이 끝나고 장비를 연습실로 옮긴 뒤 다시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SAMSON 파워드 믹서의 1번 채널 레벨이 다른 것에 비해 월등히 낮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자다가 이불킥'을 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이 남는 공연이었지만 KORG X2를 중고 구입 21년째에 처음으로 라이브 현장으로 들고 나왔다는 것, 가곡의 베이스 라인을 내 마음대로 원 없이 만들어서 사실상 즉흥 연주에 가깝게 만들었다는 것(첫 곡의 건반 연주 역시 그러했지만)에 의의를 두기로 하였다. 다음 공연에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가급적이면 휴대폰 녹음이 아니라 믹서에서 직접 오디오 신호를 따서 컴퓨터로 녹음을 해 보겠다. 장비를 연결하여 제대로 점검도 하지 못했는데 본 행사 진행을 위해 장비를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설치하다여 연주에 돌입해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된다. 작년부터 연구소에서 요청하여 수락했던 세 번의 공연이 다 이런 식이었는데, 실수가 벌어지기 정말 좋은 조건이 된다.

리허설 현장.

공연 현장.

공연이 끝나고. 왼쪽 뒤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상옥, 권태호, 김선규, 나, 그리고 이언진.






2025년 5월 16일 금요일

영종도 인스파이어 엔터테인먼트 리조트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달린 결론: 궁즉통(窮則通)은 특이점-빅뱅, 그리고 그 후의 도약이다

한국생명정보학회에서 개최한 제4회 영종 생명정보 AI 바이오 컨퍼런스를 찾았다. 해마다 영종도에서 열렸기 때문이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15분짜리 짧은 발표를 준비하면서 어떤 말로 시작을 할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개최지인 Inspire Entertainment Resort 근처를 달려 보기로 하였다.




달린 거리는 총 언제나 그렇듯이 총 6km. 부슬비를 맞으며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달렸다. 여전히 평균 페이스를 6분으로 맞추는 것은 어렵다. 2km까지는 5분 50초 미만을 유지했지만 이를 유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5km를 달리고는 한참을 쉬어야 했다. 추가 훈련을 하지 않으면 획기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이틀에 한 차례 5~6km를 슬렁슬렁 달리는 것으로는 현상 유지만 겨우 하거나 심지어 더 퇴보할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서 중간에 쉬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가?

Inspire(고무하다), aspire(열망하다), conspire(공모하다), expire(만료되다), respire(호흡하다), perspire(땀을 흘리다)... 전부 'spirit'(활기, 기운)를 어원으로 하는 영단어이다(출처). 'Aspire to inpire before you expire'라는 멋진 말도 있다.

'I inspired other people', 이것은 내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의 배경으로 쓰는 이미지이다. 내 묘비명에 정말 이런 글을 새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22년 갤러리밈에서 있었던 팀 벤겔(Tim Bengel)의 아시아 지역 첫 개인전에서 찍은 것.


INSPIRE 리조트에서 열리는 학술행사에서 나는 'Expire하지 맙시다'라는 말로 발표를 시작하였다. 이 학회는 상대적으로 젊은 학회이고, 영종 컨퍼런스는 새롭게 임용된 교수들이 자신의 연구분야를 소개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신진 연구자들의 등장을 바라보는 나와 같은 세대는 이른바 '고인물'인 셈이다. 

생명정보학 기술을 이용하면 여기 앉아계신 분들 사이로 고인물 구분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INSPIRE 리조트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인물들이여, 절대로 EXPIRE하지 맙시다.

두 번째의 오프닝 메시지는 주역에 나오는 '궁즉통(窮則通, 원래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이지만 이를 줄인 것)'이란 말에 관한 것이었다. 출장을 오면서 가지고 온 책 <공자가 인생에 답하다>(한민 지음)을 오늘 아침에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었다. 이 말은 궁핍한 상황에 처하면 반전을 일으키거나 결국은 이를 돌파하여 통하게 된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의 '궁'은 어렵고 딱한 처지가 아니라 '궁극'을 뜻함이 옳다고 한다. 즉,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의 옳은 풀이는 이러하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변하게 되고, 변화가 일어나면 막힘이 없이 통하게 되며, 막힘없이 통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궁'은 특이점(singularity)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술이나 역량이 고도로 발전하여 어떤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펑! 터지면서(=big bang!) 모두가 행복해지는 현상. 바로 이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발표 본론에 들어갔다.

가기 위하여 더 이상 긴 말은 하기 어려웠지만, 챗GPT에 물어보니 궁즉통을 특이점과 연결하거나, 특이점을 사회적 빅뱅과 연결하여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대 사회는 AI에 의해 특이점으로 치닫고 있다. 직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고, GPU는 너무 인기가 있어 구입하기 어려우며, 이를 운좋게 구입했다 해도 대규모로 운용하려면 전력 수급이 어렵다. 이것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불러 일으킬지 아무도 확신하기 어렵다. 모든 인류가 행복해질까? 디스토피아가 될까? 그것을 모르기에 우리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그러나 '궁즉통'이라는 오랜 말처럼, 이는 새로운 돌파구로 연결될 것이다. 궁극은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앞에 펼처질 대전환은 바로 특이점(singularity)에 해당한다. 문명의 본질적 도약은 바로 이 창조적 폭발의 시점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 시기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2025년 5월 13일 화요일

리더의 조건

어느 조직이나 리더는 필요하다. 리더를 다른 말로는 '관리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두 개념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관리자 없이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에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02년, 구글에서 이러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수 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자율성과 이상주의는 더 이상 정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웹을 조금만 뒤져 보면, 구글의 이 실험에 대한 실패 원인과 이로부터 얻은 교훈에 대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가리키는 리더포비아(leader phobia)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이다.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책임은 많고 보상은 점점 적어지니 이러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접근 동기' '회피 동기'... 이런 용어까지 들먹이면서 설명하고 리더가 되기를 꺼리는 현상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직에게 돌아간다. 단지 나이가 들고 약간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 차세대 리더를 길러내는, 이른바 리더 풀(pool)이 있어야 하며, 이들을 육성하고 격려해야 한다. 이들로부터 리더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들만의 폐쇄적인 소수 엘리트 그룹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에 의해 리더로 육성되었다 해도,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리더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리더가 된 뒤에 비로소 리더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모두가 성공적으로 변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리더로 나서지 않을 때—나는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다들 거부할 것이다—리더가 되면 안 될 사람이 리더가 될 수도 있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조직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솔직한 태도는 '리더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전략적으로 구사해야 한다! 우왕좌왕하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리더의 자리가 정말 무서운 것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겸손이란 덕목은 양날의 칼과 같다. 특히 리더는 겸손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원래 유교적 전통에서 겸손은 절대적인 미덕과 같이 여겨지고 있으나, 요즘과 같이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소속 조직을 내세워야 하는 전쟁터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 중요성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 문제는 '거짓 겸손'에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교만함을 가장한 겸손과, 자기비하의 두 가지가 있다(참고할 글 - 정신과 의사가 말하는 겸손의 두얼굴, 지나친 겸손과 진정한 겸손).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는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사람이다.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리더가 되고, 그 자리에 오른 뒤 더 이상 배우거나 변하지 않는 그런 리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과 일 년 반 전에는 이런 종류의 고민이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 길을 걸어 오면서 겪은 사연을 일일이 밝힐 수도 없고 또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결국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