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2일 금요일

Terps란 무엇인가 - 워싱턴 D.C.를 짧게 둘러보고 출장을 마무리하다

워싱턴 D.C. 인근의 요즘 날씨는 장난이 아니다. 오후에 잠깐 비가 쏟아지다가 그치고 이내 뜨거운 햇볕이 쪼이면서 숨이 막힐 지경으로 습도가 높아진다. 6월 중순이 이러니 한창 더운 칠팔월에는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할 것인가? 정말 기후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외출을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근처 상점에서 모자를 하나 샀다. 'Terps'라는 빨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스포츠 팀의 이름 같은데 전혀 들어본 일이 없었다. 검색을 해 보니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컬리지파크(UMD)의 공식 스포츠 팀 명칭인 메릴랜드 테라핀스(Maryland Terrapins)의 줄임말이라고 한다(공식 홈페이지). 메릴랜드주를 상징하는 거북이의 이름이라던가...


이번 출장길의 유일한 기념품.


UMD의 상징, Testudo(사진 출처 링크). Testudo는 라틴어로 거북이를 뜻한다.



UMD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FBI의 주요 연구 파트너 역할을 하며, 특히 FBI에 가장 많은 졸업생이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UMD의 범죄학 및 형사사법학과(Department of Criminology and Criminal Justice, CCJS)는 미국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니 정말 흥미롭다. 즉흥적인 쇼핑이 뜻하지 않게 상식을 넓혀 주었다.

INSDC 연례 회의는 6월 11일 오전에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났다. 귀국 항공편은 내일이라서 잠깐 시간을 내서 링컨 기념관 근처를 가 보기로 했다. 이른바 '내셔널 몰' 일대를 제대로 보려면 두어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레드 라인을 타고 오가는 시간(왕복 약 두 시간)을 포함하여 딱 네 시간만 투자하자고 생각하고 호텔을 나섰다. Rockville의 Twinbrook 역에서 Farragut North 역까지 간 뒤 또 남서쪽으로 약 1.4 마일을 걸어야 한다.

데이비드 글래스고 패러것(David Glasgow Farragut).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4성 제독.


링컨을 만나러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 더웠다. 새로 사서 신고 온 신발이 불편하여 발바닥에서는 슬슬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독립 250주년 행사를 위해 시설물을 설치하고 리허설을 하느라 매우 정신이 없고 어수선하였다.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니 그 유명한 워싱턴 기념탑이 보인다. 저쪽으로도 박물관이 있을텐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를 지났다. 분수에서 발을 적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링컨 기념관 앞의 Reflecting Pool은 그 크기가 무려 619m x 51m나 된다. 저 멀리 링컨 기념관이 보인다. 불볕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갔으나...


행사 준비 관계로 올라가는 계단이 차단된 상태였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 관계자와 같은 사람들만 듬성듬성 보일 뿐이었다. 거대한 링컨 조각상을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뭔가 영감을 얻고 싶었지만 그 기회조차 차단되어서 너무나 아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촉사나 대조사의 보살상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눈앞까지 가서도 만날 수 없었으니 그 아쉬움이 더욱 컸다.



알링턴 메모리얼 브릿지 쪽에서 찍은 사진.

아쉽지만 기념관 남동쪽에 가까이 위치한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으로 향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우리 국가는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답한 아들딸들을 기린다.

휴전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우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데에는 이러한 미군의 희생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도 가까운 이웃나라가 아니라, 생전 알지도 못하던 이역만리 먼 나라의 젊은이들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군 약 3만 6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참고로 2차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은 무려 40만명에 달한다.

참전 희생자의 가족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미국 정부로서는 참전을 결정하게 된 다른 전략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동아시아 질서를 유지하려는 현실적 계산이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의 비문은 그러한 국가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 결정의 결과로 목숨을 잃은 젊은 병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려는 문장으로 읽힌다.

한국전쟁 사망자 수를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


군인에 비해 민간인의 희생이 훨씬 크다. 또한 북한군의 사망자 수는 미군과 기타 유엔군은 물론, 한국군의 희생을 크게 웃돈다. 먼저 침략을 감행하였으니 이러한 결과를 당연한 대가로 보아야 할까?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개별 병사의 죽음은 반드시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만은 없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미국은 자유를 지키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참전했다고 설명한다. 중국 역시 압록강까지 진출한 유엔군에 대응하고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고 주장하였다. 각국 정부가 내세운 명분의 타당성은 별도로 평가할 문제이겠지만, 전장에서 죽어 간 병사들 대부분은 그러한 국가적 결정에 따라 동원된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순전히 그들이 자유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논의의 출발점에는 북한의 남침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쟁의 책임을 논하는 일과 전쟁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일은 반드시 같은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미국 메릴랜드주 락빌에 위치한 호텔방에서 이런저런 성찰을 하면서 국외 출장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출장 결정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건너편 건물 유리창에 비친 EVEN Hotel Rockville의 불빛. 왼쪽 아래에 삽입한 사진은 호텔 공식 페이스북(링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제39회 INSDC 연례 회의에 참석하다

INSDC(International Nucleotide Sequence Database Collaboration)란 전 세계 생명과학 연구자들이 생산한 DNA·RNA 염기서열 데이터를 수집·보존·공유하기 위해 운영되는 국제 협력체이다. 미국 NCBI의 GenBank, 유럽의 European Nucleotide Archive(ENA), 일본의 DNA Data Bank of Japan(DDBJ)이 공동으로 참여하며, 어느 한 곳에 등록된 데이터는 세 기관에 자동으로 공유된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이 협력체는 생명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오픈사이언스 성공 사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 유전체 연구와 바이오인공지능(AI)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핵심 공공 인프라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자들은 누구나 무료로 데이터를 등록하고 활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연구의 재현성과 데이터 재사용성을 높이고 전 세계적인 지식 공유를 촉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KOBIC(Korea Bioinformation Center, 국가생명연구자원정보센터)은 일종의 옵저버 자격으로 INSDC 연례 회의에 4년 연속 참석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KOBIC과 오랜 협력관계에 있었던 DDBJ의 도움이 매우 컸다. 원래 이 회의는 미국-유럽-일본 순으로 매년 돌아가면서 개최된다. 작년 영국에 이어서 올해는 일본이 개최할 순서였지만, DDBJ가 한 해를 미루어서 내년에 40주년 기념 행사와 더불어 개최하기를 희망함에 따라 올해는 2년 만에 다시 미국에서 열렸다. 

행사가 열리는 Bethesda North Marriot Hotel & Conference Center.


한국(KOBIC)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 참석하였다. 나는 이 미팅에는 처음 참석한다. DDBJ쪽 주요 인사들(Masanori Arita, Yasukazu Nakamura, Yuichi Kodama, 그리고 한국인인 이경범 박사님, 링크)는 국내외를 오가며 여러 차례 만나서 이미 친숙한 인물들이다.

2024년, INSDC는 회원 기관을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링크). 여기에는 한국의 KOBIC, 중국, 인도(IBDC) 등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는 꽤 많은 생명과학 데이터센터가 있는데, 오늘의 발표에서는 CNSDC(CNGDC였나?)가 단일 창구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음을 밝혔다.

NCBI의 Acting Director인 Kim Pruitt가 인삿말을 하고 있다. 2년 전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AI-바이오과학 협력회의에서 그녀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다(관련 글). RefSeq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Prospective member는 기술적 역량에 더하여 다음의 사항도 충족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므로 잘 명심해 두어야 한다.

  • 장기적 운영 지속성
  • 데이터 공개 정책
  • 국제 협력 의지(outreach)
  • 안정적인 재원
  • 데이터 교환 능력

3개 회원 기관 및 3개 prospective member의 발표를 들은 뒤에는 실무진 소그룹에서 논의한 의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생물학적 데이터 센터의 모임이므로 당연히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첫날부터 쏟아져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리적 실체가 없이 컴퓨터로 만든 서열의 취급 문제가 거론되기는 했으나, 점차 제출량이 증가하고 있는 MAG(metagenome-assembled genome) 관련 사항과 TPA(third-party annotation)에 대해서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MAG 데이터는 ENA의 경우 한 species에 대해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등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NCBI는 그렇지 않다. 사실 prokaryote의 종 내 다양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서, 대표성은 strain 수준으로 더욱 레벨을 좁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또한 shotgun metagenome 데이터는 제출된 MAG에 의존할 수도 있으나 raw data를 직접 다운로드하여 각자의 파이프라인으로 조립해서 활용하려는 연구자가 꽤 많다.

한 방에 모인 참가자들이 각자 노트북 컴퓨터로 Teams에 접속해 사용하는 모습은 조금 특이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현장 참여자의 경우 발표자가 아니면 개별적으로 Teams나 Zoom을 켜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테이블에 비치된 마이크와 노트북의 마이크가 동시에 켜져 있으면 피드백이 발생하여 매우 곤란하다. 잠깐 동안 잡음을 유발했던 장본인은 Teams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였다!

EC(Executive Committe)의 2026년도 최우선순위 업무.

AI 학습을 위해 메타데이터의 필수 항목을 늘리고 더욱 점검을 강화해야 한다, 등록된 데이터의 활용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용자를 위해 클라우드 기반 컴퓨팅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나라 환경이라면 요즘 단골로 나오는 이러한 주제는 내가 알아듣기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내일 있을 2일차 오전 발표에서 DDBJ는 GLM-based annotation system에 대하여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나로서는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모든 연구자가 AI를 향해서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고, AI 학습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데이터셋'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고 질문을 받는 묘한 분위기에만 절어 있다가 '디톡스'를 하고 온 느낌이었다. 물론 오늘 1일차 공식 일정을 마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는 AI 기술에 대한 피로감을 다들 토로하였지만... 아니, 우리나라는 정말 누구에게나 기본이 될 만한 레퍼런스 데이터를 만들어서 과학계에 기여한 적이 있었나.

제39회 INSDC 연례회의 첫날 자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신기술을 얼마나 빨리 수용하고 있는지를 자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연구자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생물학 서열 데이터를 얼마나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서비스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유행은 바뀌어도 공공 데이터 인프라의 가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INSDC 회원은 데이터 표준안을 수립하는 권위가 있지만(오해하지 말기를. 제출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필수 항목이 잔뜩 들어 있는 표준안이 아니라, 'minimum standard' 방식으로 접근한다), 동시에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의존하는 데이터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서비스해야 하는 의무도 따른다.

따라서 '국내 연구데이터나 잘 모아서 국내 활용이나 잘 되게 하면 되지, 무엇하러 외국 데이터를 미러링하는가?'라는 단순한 논리를 따라서는 안 된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면서 INSDC 회원 자격이 단순한 명예나 지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prospective member에게 강조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outreach이다. 이는 단순한 홍보 활동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연구자와 기관을 연결하고, 글로벌 지식 생태계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데이터를 소비하는 나라를 넘어 공공 데이터 인프라를 제공하고 유지하는 나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6년 6월 6일 토요일

5개의 누름버튼을 하나의 아날로그 입력으로 읽는 방법

아두이노 응용 DIY에서 다섯 개의 누름버튼 스위치 조작을 입력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버튼 하나에 대해서 디지털 입력 하나를 할당하는 것이다. 노이즈에도 강할 것이고, 동시 누름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귀한' 디지털 핀을 이렇게 소비하는 것은 너무 아깝다. 버튼 수만큼 디지털 핀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아날로그 입력 핀 하나를 이용하여 여러 개의 버튼 입력을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사실 Fluid Ardule의 개발 전에는 전혀 몰랐던 기법이었다. 이는 전기 또는 전자공학 전공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기초적인 지식일 것이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는 이미 이러한 용도의 5-button keypad module을 판매하고 있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약간 까다로운 면이 없지는 않다. 아날로그 입력값이 가끔 흔들리므로 보정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보정 기능을 구현하느라 아두이노 펌웨어의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단순히 기준값을 측정하여 펌웨어에 상수로 하드코딩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 중에 측정한 값을 EEPROM에 저장해 두고 다음 부팅 시 다시 읽어 오도록 만들었다.

CAD로 설계하며 만든 전면 패널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나, 키패드 모듈의 측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도저히 고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패널 고정용 버튼 스위치 5개를 달아서 대신하고자 한다.



이를 쓰려면 아두이노 우노의 아날로그 입력 단자로 신호를 보낼 저항 회로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 ChatGPT는 위 사진의 빨간색 기성품 키패드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과는 약간 다른 회로를 제안하였다. 두 회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다. 자동 생성한 자료이므로 세부 배선이나 수치는 100%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방식의 개념을 비교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5버튼 입력을 위한 두 가지 저항 인코딩 회로(수정판-1번 방식의 회로 오류를 바로잡음). 나는 2번 방식, 즉 풀업 저항과 버튼별 저항을 조합하는 방식을 쓰려고 한다.


2026년 6월 5일 금요일

Fluid Ardule, 케이스 가조립을 시작하다

라즈베리 파이와 TFT-LCD를 연결하는 리본 케이블(20cm)이 너무 길다. 10cm짜리로 구입했어도 될 것을. 양 말단 커넥터를 female-female로 구입한 것도 실수였다. 

훌륭하게 가공을 거친 Fluid Ardule의 전후 패널(두께 3mm, 무광 마감)이 도착하였다. 도면에 매우 충실하게 만들어졌지만, 보다 신중하게 설계하여 가공 의뢰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물과 같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 5-button keypad 모듈은 무척 애를 써서 구멍 간격 측정을 한 뒤 도면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잘 맞지 않았다. 어긋난 구멍은 드릴로 넓힐 수 있지만, 패널 뒤에 모듈을 고정하게 되니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기존의 tactile switch의 버튼 캡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갖고 있던 패널 고정형 누름버튼 스위치(다섯 개!)를 쓰기로 하였다. 신뢰성은 높지만 누를 때 '딸깍'하는 느낌이 없고 저항 사다리를 이용한 회로를 꾸며야 한다.
  • 볼륨 포텐셔미터와 인코더의 간격을 너무 좁게 만들어서 노브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인코더는 D-shaft 노브를 쓰는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저품질 spline knob만 잔뜩 구입해 놓았다. 축간 간격이 22mm이므로 이보다 직경이 작은 노브를 다시 골라야 한다.
  • DXF 파일의 dimension layer에 참고용 텍스트를 달아 두었는데 너무나 충실하게 가공에 반영되었다. 실제로 새겨 넣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어야 하는데... 그나마 후면판의 경우 내부에 새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글자가 필요했다면 올바른 면에 새겨달라고 했었을 것이다.
  • 뒷면의 퓨즈-파워소켓-전원 스위치의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워 스위치를 모서리에 가깝게 배치한 것은 작동의 편의성을 위한 것이나, 파워소켓으로부터 퓨즈를 거쳐서 배선이 가로질러야 하니 보기에는 별로 좋지 않다.

고정 전의 부품을 케이스 안에 담아 보았다. 생각보다 공간이 좁다. 바닥 면적이 A4 용지보다는 넓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적당히 아담하고 전체적인 중량도 적게 나가겠지만, 조립이 까다로울 것 같다.

라즈베리 파이와 아두이노 우노를 고정할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한다. 바닥이 나무판이라고 하여 단순하게 나사못을 박아서 고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시나리오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는 전원부 재구성부터 손을 대야 되겠다.

2026년 6월 6일 업데이트



주말 작업은 주요 부품을 고정한 뒤 소리를 들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2026년 6월 4일 목요일

Fluid Ardule, 콤비(Combi) 기능을 구현하다

음악 신시사이저에서 '콤비(Combi)'란 여러 음색을 조합하여 하나의 연주 환경을 만드는 기능을 말한다. 가장 흔한 예는 피아노와 현악기 앙상블을 동시에 울리는 경우이다. 이를 위해 내장 음원의 서로 다른 MIDI 채널에 각 음색을 배치하고, 키보드에서 들어오는 연주 정보를 여러 채널로 복제하여 전달한다. 이렇게 여러 음색을 겹쳐 연주하는 방식을 레이어(layer)라고 한다.



콤비에는 스플릿(split)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건반의 왼쪽 영역은 베이스, 오른쪽 영역은 피아노를 연주하도록 설정하면 마치 한 사람이 두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들어오는 노트 정보를 음높이에 따라 구분하여 각 파트로 전달한다. 따라서 레이어가 동일한 연주 정보를 여러 파트에 복제하는 방식이라면, 스플릿은 연주 정보를 건반 영역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Fluid Ardule 개발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콤비 음색 활용까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전원을 켠 뒤 건반을 연결하여 연주하면 소리가 난다'는 겉보기에 단순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때에는 콤비까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버튼과 인코더를 이용하여 매끄럽게 돌아가면서도 직관적이면서 안정적인 UI를 만드는 과정은 참으로 힘겨웠다. 게다가 순수히 재미 삼아 시도한 음원 파일(MP3, OGG, WMA...) 재생 기능 및 인터넷 라디오 기능이 이렇게까지 자잘한 재미를 더해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적으로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는 것보다 모든 부품을 견고한 케이스에 넣어서 '음악 감상 및 공연장에서도 라이브용으로 쓸 만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나무틀은 제작 완료되었고, CAD로 설계한 전후판은 가공을 마치고 오늘 집으로 배송될 것이다. 이를 기다리는 동안 콤비 기능을 몇 시간에 걸쳐 구현한 셈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콤비 음색을 JSON 파일로 정의한 것이다. 현대적 신시사이저에서는 직접 프리셋을 한 레이어씩 쌓아서 콤비를 만드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이미 마련된 콤비를 불러서 쓰다가 적절히 편집한 뒤 유저 영역에 저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에 정의한 JSON 파일 역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초안을 만들었다. 우선은 단일 사운드폰트 파일(FluidR_GM.sf2)를 이용하는 것으로 단순한 체계로 구축하였다.

전체 파이썬 스크립트가 이제 1만 라인에 육박하고 있다. 콤비 기능은 별도의 스크립트 파일로 분리해야 하는지 약간 고민을 하였었는데,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기능 구현이 된 것을 생각하면 아직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콤비의 편집 및 저장까지 마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Fluid Ardule을 케이스에 넣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또 발생할 것이다. 미국 출장을 앞두고 있어서 금주 안에 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7월이 오기 전에 외관과 소리 모두 완성된 모습을 만들도록 하겠다.

2026년 5월 29일 금요일

Fluid Ardule, LCD의 외계어 표시를 없애다 - 10uF 전해 커패시터의 힘

Fluid Ardule의 UI 컨트롤러에 해당하는 아두이노 우노에는 I2C LCD 모듈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이따금 '외계어'를 표시하는 문제가 있었다. 가끔 일어나는 노이즈 문제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 USB 커넥터를 뽑았다가 다시 연결해도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만드는 물건이 '상품'을 목표로 한다면, 도저히 시장에 내놓기 부끄러운 상태였다.


이 모습은 영화 <프레데터>에 나오는 Yautja 알파벳을 닮았다. 작년에 개봉한 <프레데터: 죽음의 땅> 관련 기사(LA Times 링크)에서는 이 문자와 언어 체계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LCD는 Fluid Ardule의 보조 진단 장치 역할을 한다. 전원을 넣은 직후 상태를 알려주고, Raspberry Pi와 연결되었는지 여부도 표시한다. 따라서 화면이 깨진다는 것은 사용자가 장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설령 실제 기능은 정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처음에는 I2C 통신 자체를 의심했다. 하지만 곧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외계어 현상은 Raspberry Pi와의 통신이 시작되기 전에도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원인이 Serial 통신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ChatGPT와 더불어 온갖 가설 수립과 실험을 해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문제는 LCD가 아니라 초기화 순서일 수 있었다.

UNO, PCF8574 I2C backpack, HD44780 LCD 컨트롤러는 전원이 들어온 뒤 각각 안정화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다. 만약 Arduino가 너무 빨리 실행되어 lcd.init()를 호출한다면 LCD 쪽이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전원을 넣으면 아두이노 우노가 켜지면서('cold start') LCD 모듈(컨트롤러 포함)에도 전원이 인가되어 자연스럽게 화면이 나온다. 이 때에도 외계어가 발생한 사례가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라즈베리 파이가 완전히 부팅되고 Fluid Ardule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아두이노 우노와 USB를 통한 시리얼 통신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노는 다시 재시작될 수 있다. Arduino Uno의 기본 자동 리셋(auto-reset) 기능 때문이다.

이 경우 LCD는 계속 전원이 공급되고 있는데 우노만 다시 시작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ChatGPT는 이러한 비대칭적인 재시작 과정이 LCD 상태 불안정의 한 원인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다만 이것이 유일한 원인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RESET-GND 사이에 10µF 전해 콘덴서를 추가하는 실험을 했다.

이 콘덴서는 전원 안정화용이 아니다. RESET 핀의 상승 시간을 약간 늦추어 Arduino가 조금 더 늦게 시작하도록 만든다. 즉 LCD와 PCF8574가 충분히 준비된 뒤 초기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외계어 발생 빈도가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Arduino IDE에서 펌웨어를 업로드하려고 하자 갑자기 다음과 같은 오류가 발생했다.

not in sync: resp=0x55

한참 원인을 찾다가 문득 깨달았다. 10µF 콘덴서가 Arduino의 자동 리셋 기능까지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콘덴서를 제거하면 업로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다시 연결하면 동일한 문제가 재현되었다. 이는 콘덴서가 RESET 타이밍에 실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결국 콘덴서는 납땜된 상태로 두지 않고, 필요할 때 꽂았다 뺄 수 있는 탈착식 구조로 변경했다. 다음과 같은 프로토타입 실드(Keys 5.1 Proto Shield, 패턴 설명)를 쓰고 있기 때문에 소켓 헤더(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맨 아래 가운데 부품)의 Rst와 GND에 전해 콘덴서를 필요한 때에 꽂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어제는 리셋 버튼 스위치 근처에 납땜을 하여 테스트를 했기 때문에 펌웨어 업로드 시에 뺄 수가 없었다.


소켓 헤더에 10uF 전해 콘덴서를 꽂은 사진. 6월 3일 현재 프로토타입 실드는 제거해 버렸다. 전원을 연결할 수 있는 작은 확장 보드를 만들어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이 좋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개선점을 발견했다.

현재 UNO-1 펌웨어는 전원 투입 시 LCD를 초기화하지만, Raspberry Pi와 처음 연결되는 순간에는 LCD를 다시 초기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초 HELLO 메시지를 수신할 때 LCD를 한 번 더 재초기화하는 코드를 추가했다. 일종의 복구 계층을 만든 셈이다(Commit 0380f4a).

하지만 이번 실험에서 중요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펌웨어에서 HELLO 수신 시 LCD를 재초기화하더라도, RESET-GND 사이의 10µF 콘덴서를 제거하면 전원 투입 직후 LCD에 다시 외계어가 나타났다. 즉 소프트웨어 재초기화만으로는 이 문제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정리하면 현재 구조는 다음과 같다.

  • RESET-GND 10µF 콘덴서 → 예방 계층
  • HELLO 수신 시 LCD 재초기화 → 복구 계층

하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돕고, 다른 하나는 혹시 문제가 생겨도 다시 정렬해 준다.

10µF 콘덴서는 UNO-1의 리셋 해제 시점을 늦추어 LCD와 I2C 주변 회로가 안정된 뒤 초기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반면 HELLO 수신 시 LCD 재초기화는 Raspberry Pi와의 연결이 수립된 뒤 화면 상태를 다시 정렬하는 보조적인 안전장치에 가깝다.

수정 후에는 서비스 재시작을 25회 이상 반복했지만 외계어 현상은 관찰되지 않았다. 물론 원래도 매우 낮은 빈도로 나타나던 문제였기 때문에 완전 해결을 선언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사건은 단순히 LCD 글자가 깨지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스템의 초기화 시퀀스를 이해하게 된 과정에 가까웠다. 전원 투입, RESET 해제, LCD 초기화, Raspberry Pi와의 링크 수립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가장 작은 부품 하나가 가장 큰 교훈을 준다.


질문에 독이 있다

모르는 것을 상대에게 묻는 것을 질문이라 한다.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알아내고 싶거나, 이해와 설명을 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질문이란 나의 무지를 전제로 하며, 질문하는 태도에는 겸손함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질문자는 답변을 통해서 상대를 평가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좋은 점이 드러나면 다행이지만,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토론회가 그러한 사례가 될 것이다. 토론회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열리는 것이니까.

이러한 의도를 품은 질문은 미처 방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질타하거나 비난거리를 찾기 위한 질문이 바로 그러한 질문이다. 질문자가 '갑'의 위치에 있을 때, 그리고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그러한 질문은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영향력이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도 흔하다.

"내가 몰라서 묻는 줄 아세요?"

이렇게 질문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좌우를 둘러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말과 제스쳐는 사실 질문의 목적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미 정답으로 정해 놓았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시험하고 압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질문이 압박의 도구가 되면 심문으로 바뀐다. 그러면 올바른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흔히 'garbage in, garbage out'이라 한다. 질문도 이에 비유할 수 있다. 올바르지 않은 질문에는 좋은 답변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는 질문, 어떤 답변을 하든 상대를 불리하게 만드는 질문, 원하는 곳으로 결론을 끌고 가기 위한 질문...

그래서 나는 독이 든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다. 그걸 잘 알면서도... 오늘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