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9일 화요일

회의는 AI가 다시 정리해 준다



부제: 게으른 국외출장자를 위한 영어 녹음·전사·요약 워크플로

생물학자에게 전사(transcription)라는 단어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어 있다. 바로 DNA를 주형으로 RNA를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중심원리(central dogma)를 처음 배울 때부터 DNA → RNA → Protein이라는 도식과 함께 전사와 번역(transcription and translation)을 수도 없이 외웠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요즘 AI 서비스를 이야기하면서 “회의를 녹음해서 전사한다”라는 표현을 접하면 처음에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 전사란 RNA polymerase가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전사(轉寫)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영어 transcribe는 라틴어 transcribere에서 왔으며, trans-는 ‘건너서, 다른 쪽으로’, scribere는 ‘쓰다’를 뜻한다. 즉 본래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형태로 옮겨 적는 것이다. 한자어 轉寫도 말 그대로 ‘옮겨 쓴다’는 뜻이다.

DNA의 염기서열 정보를 RNA라는 다른 매체에 옮겨 적는 것도 transcription이고, 회의실에서 사람이 한 말을 문자로 옮겨 적는 것도 transcription이다. 생물학자에게 익숙한 전사가 오히려 이 넓은 의미의 한 사례인 셈이다.

그리고 이번 국외출장에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AI-assisted transcription, 즉 AI를 이용한 전사는 출장 기록의 방식을 꽤 크게 바꿀 수 있다.

요즘 업무 회의를 마친 뒤 젊은 연구원들이 녹음 파일과 함께 AI가 자동으로 요약해 준 문서를 전달해 줄 때가 많다. 이처럼 AI를 이용하여 업무 효율화를 이루고 있는데, 나도 여기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4회 GA4GH Plenary에 참석하면서 수립한 워크플로를 글로 정리해 보았다. 미리 계획을 세우거나 조사한 것은 아니다. 회의장 테이블에서 발표내용을 기록하던 도중에 이리저리 검색하고 테스트하여 완성하였다. 따라서 이보다 더욱 효율적이면서도 정확한 기록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일러 둔다. 


출장보고서를 위해 회의 내용을 받아 적을 필요가 있을까

국외출장을 다녀오면 마지막에 남는 숙제가 있다. 출장보고서다.

회의 중에는 발표를 듣고, 슬라이드를 보고, 메모도 하고, 발표가 끝나면 사람들과 이야기도 해야 한다. 영어 발표라면 집중력도 더 필요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 내용은 나중에 보고서에 써야 하니 적어놓자”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이번 출장에서는 조금 다른 방법을 시험했다.

회의는 녹음한다. 슬라이드는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나중에 AI에게 회의를 다시 정리하게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중간 단계가 바로 전사였다.

음성 녹음만 잔뜩 가지고 있어서는 활용하기 어렵다. 한 시간짜리 녹음을 다시 한 시간 동안 들으면서 필요한 내용을 찾는다면 AI를 사용하는 의미가 별로 없다. 음성을 검색하고 분석할 수 있는 텍스트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음성 → 전사된 텍스트 → 슬라이드와 결합 → AI에 의한 재구성

Otter와 Subtitle Edit는 쓰임새가 조금 다르다

영어 회의를 녹음하고 전사한다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서비스 중 하나가 Otter.ai다. 회의 녹음과 전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서비스라서 전사 결과를 확인하고 화자를 구분하며 회의 내용을 정리하는 데 편리하다. 온라인 회의나 협업 환경에서 쓰기에도 좋다. 나도 2년 전 워싱턴 DC 출장(AI-바이오과학 협력회의)에서는 Otter를 꽤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그런데 이번 출장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조금 달랐다.

이미 녹음해 둔 한두 시간짜리 영어 음성 파일이 여러 개 있고, 이것을 인터넷 연결 상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내 노트북에서 처리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오픈소스 프로그램인 Subtitle Edit가 의외로 아주 잘 맞았다. 이름 그대로 원래 동영상 자막을 만들고 편집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Whisper 계열 음성인식 엔진을 이용하면 동영상뿐 아니라 녹음 파일을 자동으로 전사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물로 SRT 자막 파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용도에는 아주 좋았다.

00:23:14 → 00:23:21
발표자가 이 시간에 한 말...

SRT에는 이렇게 시간 정보가 붙는다. 처음에는 그저 자막을 위한 시간표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출장 기록에서 대단히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Whisper 모델이란 무엇인가

Subtitle Edit 자체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음성인식을 담당하는 것이 Whisper다.

Whisper는 OpenAI가 공개한 음성인식 모델이다. 사람의 음성을 입력받아 문자로 변환하는 speech-to-text 모델이며, 여러 언어와 다양한 녹음 환경을 처리할 수 있다.

Whisper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모델이 있다. 일반적으로 작은 모델은 계산이 빠르고 필요한 컴퓨터 자원이 적은 대신 인식 정확도에서 손해를 볼 수 있고, 큰 모델은 처리 시간이 길어지는 대신 좀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번에는 Subtitle Edit에서 whisper.cpp와 medium 모델을 사용했다. 용량은 약 1.5GB였다. 8GB의 데이터 로밍을 준비해 왔는데, 노트북을 휴대폰의 모바일 핫스팟에 연결해 이 모델을 다운로드하는 바람에 로밍 데이터를 상당히 소진하였다. 

2021년에 구입한 Dell XPS 노트북에서도 별도의 고성능 GPU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전사 시간이 실제 녹음 시간보다 조금 더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난 뒤 호텔에서 돌려놓는 작업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일단 프로그램과 모델을 준비해 놓으면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도 긴 녹음을 전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국내에서라면 클로바노트도 아주 편리한 선택이다. 한국어 회의뿐 아니라 외국어 음성도 처리할 수 있다. 영어 회의라면 노트를 만들 때 음성 인식 언어를 영어로 지정해서 사용하면 된다.

꼭 클로바노트 자체에서 녹음할 필요도 없다. 휴대폰의 기본 녹음기로 회의를 녹음한 다음 파일을 가져와 전사하는 방법도 있다.

문제는 이번과 같은 국외출장 환경이다.

클로바노트 같은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결국 녹음 데이터를 서버로 보내야 한다. 짧은 음성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한두 시간짜리 회의를 하루에 몇 개씩 녹음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호텔 Wi-Fi가 불안정하거나 로밍 데이터를 사용하고 있다면 대용량 음성 파일을 클라우드로 올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반면 Subtitle Edit + Whisper에서는 녹음 파일만 노트북에 가져오면 이후의 전사 작업은 로컬에서 이루어진다.

인터넷 연결이 충분하고 편리한 회의 관리가 중요하다면 클로바노트나 Otter,
긴 녹음 파일을 인터넷 연결 없이 내 컴퓨터에서 처리하고 싶다면 Subtitle Edit + Whisper.

녹음은 휴대폰이 가장 편했다

실제로 회의를 녹음해 보니 휴대폰이 가장 편했다. 별도의 녹음 장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놓고 녹음 버튼만 누르면 된다. 요즘 휴대폰의 마이크 성능이면 일반적인 회의실에서 발표 내용을 전사하기 위한 음질로는 충분했다.

문제는 녹음이 끝난 다음이다.

Whisper를 노트북에서 돌리려면 녹음 파일을 PC로 옮겨야 한다. USB 케이블을 연결하고 휴대폰 저장소를 찾아 들어가도 되지만 매번 그렇게 하는 것은 귀찮다.

이번에 써보니 이 문제의 답은 Quick Share였다.

Android 휴대폰과 Windows PC 사이에서 Quick Share를 이용하면 녹음 파일과 사진을 무선으로 바로 넘길 수 있다. 일반 Windows PC에서는 Google이 배포하는 Windows용 Quick Share를 사용할 수 있다.

휴대폰 녹음 → Quick Share → 노트북 → Subtitle Edit/Whisper → SRT

노트북 자체의 녹음기도 시험해 보았다. 이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회의장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있다면 녹음이 끝나는 순간 파일이 이미 PC에 있으므로 Quick Share 과정조차 필요 없다.

그래도 휴대폰은 위치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고 녹음을 시작하고 끝내기도 편하다. 개인적으로는 휴대폰을 주 녹음기로 쓰는 쪽이 마음에 들었다.

게으른 출장자도 슬라이드 사진은 부지런히 찍어야 한다

여기에서 약간의 모순이 생긴다.

제목은 ‘게으른 국외출장자를 위한 워크플로’인데, 슬라이드 사진만큼은 부지런히 찍어야 한다.

슬라이드가 바뀔 때마다 가능하면 고해상도로 찍는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사진 이름을 바꾸고 발표자별 폴더를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순서와 촬영 시각을 보존하는 것이다.

사진에는 촬영 시각이 기록되어 있다. SRT에는 녹음 시작점을 기준으로 각 발언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전 9시 30분에 녹음을 시작했고 SRT의 00:27:30에 어떤 발언이 있다면 실제 시각은 대략 오전 9시 57분 30초다. 그 무렵 촬영한 사진을 찾아보면 당시 화면에 떠 있던 슬라이드를 찾을 수 있다. SRT의 타임코드와 사진의 촬영시각이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Subtitle Edit의 결과 화면.


Whisper가 틀린 것은 슬라이드가 고쳐 준다

Whisper의 영문 전사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쓸 만했지만 당연히 완벽하지 않았다.

특히 국제학회는 음성인식 프로그램에 꽤 가혹한 환경이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억양이 섞이고, 생소한 사람 이름과 기관명, 프로젝트명, 약어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때 슬라이드 사진이 위력을 발휘한다.

Whisper가 발표자의 이름을 엉뚱하게 받아썼더라도 첫 슬라이드에는 정확한 이름과 소속이 적혀 있다. 프로젝트명이나 전문용어, 숫자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슬라이드에는 제목과 몇 개의 불릿만 있고 발표자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부분은 SRT가 채워준다.

슬라이드는 ‘무엇을 보여주었는가’를 기록한다.
SRT는 ‘무엇을 말했는가’를 기록한다.
손으로 쓴 메모는 ‘그중 무엇이 나에게 중요했는가’를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ChatGPT에 밀어 넣는다

이번에는 하루 동안 촬영한 슬라이드 사진이 200장을 넘었다. 여기에 여러 시간 분량의 SRT 파일도 생겼다.

예전 같으면 이 자료를 보는 순간 출장보고서를 쓸 의욕부터 사라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사진을 시간 순서대로 묶고 SRT와 함께 ChatGPT에 넣었다. 그리고 세션을 구분하고, 발표자와 발표 제목을 확인하고, 슬라이드와 전사 내용을 대응시키면서 출장보고서 형태로 정리하도록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AI에게 아무 자료 없이 “오늘 학회에 다녀왔으니 출장보고서를 써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능한 한 충실한 원자료를 남기고, 그 원자료를 AI에게 다시 읽히는 것이 핵심이다.

음성에는 발표자의 설명이 있다. SRT에는 그것을 검색하고 분석할 수 있는 텍스트와 시간 정보가 있다. 사진에는 정확한 제목, 사람 이름, 기관명, 수치와 그림이 있다.

AI에게 맡기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녹음 + SRT + 슬라이드 사진 → 발표 흐름의 재구성 → 요약 → 출장보고서

찍을 수 있는 것과 공개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프로젝터에 보인다고 해서 모든 슬라이드를 촬영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학회나 회의에 따라서는 발표 자료의 촬영이나 녹음을 금지하기도 한다. 미공개 연구 결과, 아직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 환자 또는 연구참여자와 관련된 정보, 기업의 기밀 자료 등이 포함될 수도 있다. 발표자가 특정 슬라이드에 대해 촬영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슬라이드가 바뀔 때마다 찍는다’는 방법은 촬영이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이다. 녹음 역시 마찬가지다. 회의 성격과 주최 측의 규정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촬영과 공개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출장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촬영이 허용된 자료라고 해도 그 사진을 블로그나 SNS에 그대로 공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발표 자료에는 저작권이 있고, 발표 당시에는 공개되었지만 온라인 재배포까지 의도하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다.

이번 워크플로에서 슬라이드 사진의 일차적인 목적은 공개가 아니라 기록과 확인이다. Whisper가 틀리게 인식한 이름이나 프로젝트명을 확인하고, 발표 순서를 복원하고, 발표자의 설명과 화면의 내용을 대응시키기 위한 원자료에 가깝다.

AI 서비스에 자료를 올리는 행위 역시 외부 서비스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기밀자료나 개인정보처럼 외부 처리가 허용되지 않은 자료라면 업로드해서도 안 된다.

기록할 수 있는 것만 기록하고,
AI에 제공할 수 있는 것만 제공하며,
공개해도 되는 것만 공개한다.

그래서 이제 회의를 안 들어도 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녹음에는 회의장의 모든 맥락이 담기지 않는다. 어떤 발표에서 사람들이 유난히 관심을 보였는지, 어떤 질문에서 분위기가 달라졌는지, 쉬는 시간에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만 안다.

AI가 만들어 준 결과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Whisper가 고유명사를 틀릴 수 있고, 사진이 빠졌을 수도 있으며, AI가 서로 다른 발표의 내용을 잘못 연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이름, 숫자, 발표 제목 정도는 원자료와 다시 맞춰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출장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지금 이 문장을 받아 적어야 한다”는 부담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시간에 발표 자체에 더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AI가 회의를 다시 정리해 준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나 대신 회의에 참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남겨놓은 여러 종류의 기록을 시간축 위에서 다시 조립해 주는 것이다.

이번에 실제로 해보니 이 방법은 앞으로 국외출장에서도 계속 써먹을 만하다.

나의 새로운 출장 준비물은 별것 없다.

휴대폰, 노트북, Quick Share,
Subtitle Edit + Whisper, 그리고 ChatGPT.

아, 하나 더 있다.

슬라이드가 바뀔 때 사진 찍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의 성실함.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

찍어도 되는 것과 공개해도 되는 것을 구별하는 상식.

게으른 출장자에게 요구되는 성실함은 딱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너무나 쉽게 출장 보고서를 쓰는 꼼수를 공개하는 부도덕한 일은 아닐까? 혹은 AI를 업무에 활용하여 자동화할 것은 최대로 자동화한다. 반면 회의장에서 듣고, 질문하고, 판단하고, 중요한 것을 알아채는 일은 사람이 한다. 이때 AI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출장보고서 작성에 두 시간을 썼느냐 이틀을 썼느냐가 보고서의 성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얼마나 충실하게 남기고,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 전달하느냐일 것이다. AI 덕분에 그 과정이 쉬워졌다면, 그것은 요령이라기보다 도구의 발전에 가깝다.

2026년 9월 26일 토요일

브리츠 BR-1800 Classic 스피커에 파일럿 램프를 달다

당장 폐가전제품 수거통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고물 액티브 스피커에 너무 정성을 들이는 것은 아닐까. 가벼우면서도 출력이 높고(대부분 Class D일 것이므로) 블루투스까지 연결되는 현대적인 PC용 스피커를 몇 만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요즘에 2005년 11월 제조일자가 찍힌 구형 스피커를 부품까지 바꾸어 가면서 쓰는 정성이란...

이 액티브 스피커는 전원이 들어왔는지 표시해 주는 파일럿 램프가 없다.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뒷면에 위치한 스위치를 확실히 내리는 것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시각적으로 작동 상태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하여 파일럿 램프를 달아 주기로 하였다. 이틀 전 MAX4410 헤드폰 앰프에 케이스를 달면서 LED 파일럿을 달아 주었던 일(링크)이 '자작심(心)'을 자극한 것일게다.

이는 아날로그 아날로그 리니어 파워 앰프 IC인 LM1875T를 써서 Class AB로 동작한다. 무거운 전원 트랜스포머가 들어 있고, 으며, 18-0-18V AC를 정류·평활하여 대략 ±24 V의 DC 전원을 앰프 회로에 공급하는 전형적인 구성이다.

LM1875T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른바 ‘게인클론(Gainclone)’ 계열의 리니어 파워 앰프 IC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원조 게인클론에 사용된 칩은 아니지만, LM1875를 비롯하여 LM3875, LM3886 같은 칩 하나로 간결한 Class AB 파워 앰프를 만드는 방식은 한때 오디오 DIY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이제는 작고 가볍고 효율까지 높은 Class D 앰프가 그 자리를 거의 차지해 버렸다. 무거운 전원 트랜스포머까지 품고 있는 이 BR-1800 Classic은 그런 의미에서도 제법 옛날 물건이 되었다.

전원 레일 한쪽에 저항과 LED를 달면 파일럿 램프 대용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저항값을 계산하기가 귀찮다. 부품통에 샤시용 네온램프(AC 220V 연결용)가 하나쯤 남아 있을텐데... 찾았다! 뒷면 패널 아래쪽 전원스위치와 왼쪽 스피커 출력선을 연결하는 RCA 단자 중간 부분에 적당히 구멍을 뚫고 램프를 고정하였다. 



LED를 썼다면 저항을 적당히 조합하여 더 밝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기 뒷면에 있으니 밝은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겠지만 손이 덜 가는 방법을 택했다. 납땜조차 하지 않은 채 압착 커넥터로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새로 산다면 4인치 우퍼를 장착한 에디파이어 MR4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가끔 음악 작업도 하니 조금 사치를 부려 전문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제네렉 8020D 한 조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도 나는 BR-1800 Classic을 버리지 않고 또 케이스에 구멍을 뚫어 작은 네온램프 하나를 달았다. 소리가 더 좋아진 것도 아니고 수명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전원이 들어왔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몇 만원이면 새 스피커를 살 수 있는 시대에 이런 수고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일 리는 없다. 그래도 멀쩡히 소리가 나는 오래된 물건에 작은 불 하나를 밝혀 주는 일은 제법 즐겁다. 아마 그래서 아직도 이런 짓을 하나 보다.

2026년 9월 24일 목요일

Human reference genome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추석 연휴인데 사무실에 나와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다음 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제14차 GA4GH(Global Alliance for Genomics and Health) Plenary Meeting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 때문이다. 연휴에 굳이 사무실까지 나와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학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BIKO)에 참여하는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나도 일행 중 한 사람으로서 Patrick Tan을 비롯한 PRECISE(Precision Health Research, Singapore)의 주요 인사들과 만날 예정이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생각하다 보니 당연히 싱가포르의 국가 정밀의료 사업인 NPM(National Precision Medicine)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미팅을 주선한 사업단 관계자들께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때마침 아주 적절한 논문도 나와 있었다. 2026년 8월 Nature Genetics에 실린 “Translating genomic data into healthcare practice with the Singapore National Precision Medicine program”이라는 Perspective 논문이다. Patrick Tan을 비롯한 PRECISE 관계자들이 대거 저자로 참여했다.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translating genomic data into healthcare practice이다. 너무 길어서 읽기가 불편하다면 PRECISE 웹사이트에 실린 소개의 글만 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다음 주 미팅을 위해 필요한 내용만 뽑아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우리는 BIKO와 같은 대규모 바이오데이터 구축 사업의 활용을 이야기할 때 대체로 두 가지를 떠올린다. 연구자가 데이터를 이용하여 좋은 논문을 쓰는 것, 그리고 기업이 이를 이용하여 신약이나 새로운 진단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나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싱가포르 NPM에는 그 사이에 한 단계가 더 있었다. Clinical Implementation Pilot(CIP)이다. 연구에서 얻은 유전체 지식을 실제 진료 과정에 집어넣어 보고, 임상적으로 정말 도움이 되는지, 비용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검증한 뒤 실제 의료체계로 옮기는 것이다.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familial hypercholesterolemia, FH)은 그렇게 해서 국가적인 유전자 검사 및 관리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지난주 보스턴에서 열렸던 International Precision Health Summit에서 UK Biobank 관계자도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당시에 찍었던 발표 자료를 여기에 소개해 둔다. 2035년이 되면 영국의 전체 의료 서비스 이용에서 최대 절반에서 유전체 정보가 어떤 형태로든 활용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부럽지 않은가?




논문을 읽지 않고 AI가 만들어 준 digest 정도만 보았더라면 아마 “SG100K를 구축했고 연구와 임상 활용을 추진하고 있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진다. 연구 결과가 저절로 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clinical pathway를 만들고, health economics를 따지고, 실제 의료체계 안에서 시험하는 과정이 있었다.

NPM이 Phase I을 proof of concept, Phase II를 proof of value, 현재의 Phase III를 proof of scal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읽다가 나의 관심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유전체를 보고 있는 것일까?

싱가포르는 Chinese, Malay, Indian이 함께 사는 나라이다. PRECISE-SG100K 역시 이 세 population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multi-ancestry Asian cohort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생산한 유전체 데이터를 함께 분석하려면 무엇을 맞추어야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다음 주 PRECISE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은 여기서 한 번 더 옆길로 샜다. Harmonize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지? Sequencing depth와 QC 기준을 맞추고, variant calling pipeline을 통일하는 것까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reference genome이 다르면 어떻게 하지?

여기에서 또 하나의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GRCh38은 도대체 누구의 유전체인가?

좀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GRCh37과 GRCh38은 오랫동안 들어와서 잘 알고 있다. Reference가 다르면 좌표를 변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최근에는 T2T-CHM13이 나왔다는 것도 알고, Human Pangenome이라는 것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GRCh38은 누구의 유전체인가?”라는 질문에는 즉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조각조각이었다. Human Genome Project에서 여러 사람의 DNA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었고, reference genome은 어느 한 사람의 genome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샘플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GRCh38의 70%를 차지하는 RP11

Genome Reference Consortium의 설명을 읽어 보니 GRCh38은 여러 익명의 사람에게서 만든 genomic clone library의 염기서열을 조합한 composite genome이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이다.

그런데 구성 비율이 예상 밖이었다.

GRCh38 primary assembly의 약 93%가 11개의 genomic clone library에서 왔고, 그 가운데 RP11(RPCI-11 Human Male BAC Library)이라는 하나의 library가 혼자서 약 70%를 차지한다.

무려 70%라니!

여러 사람의 유전체를 골고루 섞어서 만든 reference 같은 것을 막연히 상상했다면 꽤 많이 틀린 셈이다. 실질적으로 GRCh38의 대부분은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Genome Reference Consortium: Frequently Asked Questions

그런데 더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었다.

RP11 donor는 익명의 남성인데, 유전체를 분석해 보니 African-European admixed ancestry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후속 연구에서는 RP11이 GRCh38의 72.6%를 차지한다고 계산했고, ancestry를 판별할 수 있었던 RP11 clone 가운데 56.0%는 African, 28.1%는 European local ancestry로 분류했다. 논문에서는 이 donor를 admixed African-American ancestry를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어라?

나 역시 reference genome의 population bias를 이야기하면서 별 생각 없이 ‘Western population 중심의 reference’ 같은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GRCh38의 대부분을 제공한 사람이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European ancestry의 ‘백인 표준 인간’이 아니었다. 아, 여기에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백인이 모든 인종의 표준이라는 의미로 읽지는 말기를 바란다.

더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로 큰 CTD library이다. GRCh38의 약 5.5%를 차지하는데, ancestry를 분석할 수 있었던 clone의 86.3%가 East Asian local ancestry로 추정되었다.

Aganezov et al. A complete reference genome improves analysis of human genetic variation

그러니까 GRCh38은 European genome도 아니고 African genome도 아니며, 당연히 Asian genome도 아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이해할 물건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에게서 얻은 DNA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mosaic reference이고,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이 한 admixed donor에게서 왔다.

그러면 T2T-CHM13은 좀 나은가?

여기까지 오니 당연히 다음 질문이 생겼다.

GRCh38이 이렇게 복잡한 물건이라면 2022년에 ‘완성된 인간 유전체’로 등장한 T2T-CHM13은 어떨까?

T2T-CHM13은 대단한 성과이다. GRCh38에서 제대로 조립하지 못했던 centromere, segmental duplication, 반복서열 등의 영역을 포함하여 telomere에서 telomere까지 이어지는 거의 완전한 인간 유전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CHM13의 정체를 알고 나면 여기에서도 이야기가 묘해진다.

CHM13은 일반적인 사람의 혈액에서 얻은 평범한 diploid genome이 아니라고 한다. Complete hydatidiform mole(완전포상기태)에서 유래한 세포주이다. 쉽게 말하면, 난자의 핵 DNA가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한 정자의 haploid genome이 복제되어 두 벌이 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염색체 수는 46개이지만 두 벌의 서열이 거의 동일하다. 보통 사람처럼 부계와 모계에서 물려받은 서로 다른 두 haplotype을 구별할 필요가 거의 없으므로, 완전한 genome assembly를 만들기에 매우 유리했다.

즉 CHM13이 선택된 것은 이 사람이 인류를 가장 잘 대표해서가 아니다. 완전한 genome을 조립하기에 아주 좋은, 다소 특별한 생물학적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ancestry까지 들여다보면 CHM13은 대체로 European ancestry를 가진 genome이다.

여기서 또 한번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머리를 긁적이는 장면
뚜껑이 열릴 일이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1993) 중에 출연한 Dr. Finkelsterin.

GRCh38은 여러 사람의 DNA가 섞여 있고 그 대부분은 African-European admixed donor에서 왔다. T2T-CHM13은 훨씬 완전하지만 사실상 하나의 haplotype에 가까운 genome이고 predominantly European ancestry이다.

완전한 인간 유전체(complete human genome)가 인류를 대표하는 유전체(representative human genome)라는 뜻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나는 두 가지를 은연중에 같은 문제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Completeness와 population diversity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 그래서 Pangenome을 써야 하는구나

여기까지 오고 나니 Human Pangenome이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전에는 pangenome을 ‘여러 사람의 유전체를 더 많이 모아서 만든 더 좋은 reference’ 정도로 막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reference에 sequence를 조금 더 추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 또는 소수 사람의 linear genome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인간의 variation을 기술하는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Human Pangenome Reference Consortium(HPRC)이 2023년에 발표한 첫 draft human pangenome은 서로 다른 ancestry를 가진 47명의 phased diploid assembly를 이용했다. GRCh38과 비교하면 약 119 million base pairs의 euchromatic polymorphic sequence가 추가되었고, small variant와 structural variant를 찾아내는 성능도 향상되었다.

Liao et al. A draft human pangenome reference. Nature 617, 312–324 (2023)

여기서 또 하나 궁금해졌다. Pangenome은 여러 사람의 유전체를 단순히 이어 붙인 거대한 FASTA 파일이 아니다. 여러 haplotype의 서로 다른 경로를 graph 형태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GRCh38이라는 하나의 linear reference를 놓고 BWA로 read를 mapping하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실제로 pangenome에서는 vg Giraffe와 같은 graph-aware mapper가 사용된다. 다만 graph 안에 GRCh38이나 CHM13과 같은 기존 reference를 하나의 path로 유지할 수 있으므로, 기존 좌표계와의 연결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pangenome의 문제는 reference sequence 하나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mapping에서 variant representation, 그리고 좌표계에 이르는 분석 체계 전체를 바꾸는 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제 인류의 다양성을 충분히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47명으로 만든 첫 draft였고, HPRC 자체도 더 많은 사람과 population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36개 population을 대상으로 별도의 Chinese pangenome reference를 구축했다.

Gao et al. A pangenome reference of 36 Chinese populations. Nature 619, 112–121 (2023)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긴다.

한국인은 한국인에게 더 잘 맞는 reference를 만들고, 중국은 중국 population을 위한 pangenome을 만들고, 싱가포르는 Chinese, Malay, Indian을 포함하는 reference를 만들면 각 population의 분석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데이터를 나중에 한데 모아 분석하려면 어떻게 하지?

결국 다시 PRECISE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다음 주 PRECISE 사람들과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준비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이번에 읽은 Nature Genetics 논문에서 PRECISE-SG100K는 Chinese, Malay, Indian을 중심으로 한 multi-ancestry Asian population resource로 소개된다. 싱가포르 NPM은 Phase III가 끝날 무렵에는 국민의 약 10%를 genetically mapped population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논문은 또 PRECISE가 GA4GH의 WGS Quality Control Standards, Regulatory and Ethics Work Stream, federated gnomAD, National Initiatives Forum 등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다음 주 참석할 2026년 제14차 GA4GH Plenary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열린다는 내용도 이 논문에 들어 있다.

Translating genomic data into healthcare practice with the Singapore National Precision Medicine program. Nature Genetics 58, 1760–1772 (2026)

그러니 이 문제를 그들과 이야기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시아 각국이 자기 population에 더 적합한 reference 또는 pangenome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장점을 살리면서도 국가 간 데이터의 interoperability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또 T2T와 human pangenome이 등장한 지금, 언제까지 GRCh38이라는 하나의 linear reference에 의존할 것인가. 그렇다고 지난 수십 년 동안 GRCh37과 GRCh38을 기준으로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를 버릴 수도 없다.

다음 주에는 질문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런 이야기도 한번 꺼내 볼 생각이다.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처음의 의문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biosample의 provenance에 관한 것이었다. GRCh38이라는 reference를 구성한 DNA는 도대체 누구에게서 왔는가? 어떤 시료에서 만들어졌고, 그 시료를 제공한 사람의 ancestry는 무엇인가? 평소 데이터를 다루면서 provenance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가장 들어 온 reference genome의 provenance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RP11을 거쳐 T2T-CHM13과 human pangenome까지 따라가고 나니 질문의 성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reference를 만든 시료의 출처가 궁금했는데, 점차 ‘무엇을 reference라고 부를 것인가’로 질문이 바뀌고 있었다.

GRCh38에서는 여러 사람의 DNA 조각을 하나의 linear genome으로 조립했다. T2T-CHM13에서는 거의 하나의 haplotype으로부터 훨씬 완전한 genome을 만들었다. 그리고 pangenome에 와서는 하나의 linear sequence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Reference가 더 정확해졌다기보다 reference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과거 Human Genome Project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잡학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BIKO에서 수십만 명의 유전체를 만들고, 언젠가 SG100K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데이터와 함께 분석하려 한다면 각 population의 다양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과 서로 다른 데이터 사이의 interoperability를 유지하는 것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추석 연휴에 다음 주 국외 출장 준비를 하다가 생각보다 멀리 와 버렸다. 시작은 biosample의 provenance였는데, 끝에 와 보니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reference라고 부르게 될까?

MAX4410의 시대는 지나갔는가

Fluid Ardule의 I²S DAC(PCM5102A 사용) 출력은 헤드폰을 직접 울리기에 적당하지는 않다. 음원 파일이나 여러 채널의 출력이 동시에 나오는 MIDI 파일 재생에서는 큰 문제가 없으나, 어쿠스틱 피아노 사운드폰트를 걸어놓고 연주할 때에는 약간 빈약한 느낌이다. 16개 채널 중 하나에서만 소리가 나므로 그러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 DAC의 출력은 파워앰프로 보내어 스피커를 울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적당한 헤드폰 앰플리파이어를 쓰는 것이다. 예전에 MAX4410칩을 사용한 헤드폰 앰플리파이어 보드를 몇 개 구입해 둔 일이 있다. 문제는 이를 Fluid Ardule 내에 깔끔하게 넣어버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선 전후 패널이 너무 두꺼워서 볼륨 pot의 나사산이 이를 통과하여 나오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SMPS의 자체 노이즈가 보드의 음성 출력에 딸려 나오는 것이다. 전원이 들어간 SMPS에 가까이 귀를 대면 '삐~뀨~'하는 소리가 난다. DAC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이를 MAX4410 앰플리파이어 보드의 전원으로 공급하면 여지없이 출력단에서 이 소리가 딸려 나온다. 

따라서 별도의 전원을 공급하는 거치형 헤드폰 앰플리파이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존의 보드를 적당한 케이스에 넣고 입출력 단자와 파일럿 LED 등을 달아야 한다. 서투른 DIYer를 가장 힘들게 하는 점은 바로 케이스 가공하기가 아니던가.

차라리 완제품 앰프를 살까? 알리익스프레스를 검색해 보니 MAX97220이라는 칩을 사용한 보드가 대세이다. 3.5mm 스테레오 폰잭이 입력과 출력에 전부 달려 있어고 USB-C 커넥터가 붙어 있어서 작업이 편리한 보드가 눈에 뜨였다. 내가 보유한 MAX4410 보드는 출력용 폰잭만 붙어 있다.

항목 MAX97220 MAX4410
용도 저왜곡 헤드폰 앰프 저전압 헤드폰 앰프
전원 약 2.5–5.5 V 약 1.8–3.6 V 계열*
출력 방식 DirectDrive 계열, ground-referenced DirectDrive 계열
입력 차동 입력 가능 기본적으로 single-ended
출력 능력 비교적 강함 충분하지만 구형 설계
노이즈/왜곡 매우 낮음 양호
PSRR 우수 상대적으로 불리
PCM5102A와 조합 추천 사용 가능
세대 2011년 출시 2000년대 초반 출시

* 시중 MAX4410 모듈이 5–12 V 입력을 지원한다고 표시되어 있다면, 보드에 별도의 전압 레귤레이터가 포함되어 MAX4410의 실제 동작전압으로 낮추어 주는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보드가 그러하다.

성능은 비교적 최근 제품인 MAX97220이 더 나은 것 같다. 구입을 할까? 일단 하나를 주문한 다음, 작업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MAX4410 보드에 케이스와 커넥터를 연결하려고 책상 위에 부품을 늘어 놓고는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에이, 해 보자. 파일럿 LED는 보드의 레귤레이터에 붙여버렸다. Fluid Ardule의 핵심 부품인 라즈베리 파이 3B를 한때 품고 있었던 파랑 알루미늄 케이스의 일부를 사용했다. 사실 사진에서 보인 것은 상판이다. 하판은 라즈베이 3B의 마운팅용 보드가 되어 Fluid Ardule 내에 영구히 머물고 있다.


몇 달 전에 측면 구멍을 넓히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나쁘지 않다! 앰프의 볼륨을 올리니 피아노 소리가 이제야 좀 박력있게 느껴진다. 출력단자에 해당하는 듀폰 커넥터의 접촉이 약간 불량한데, 핀을 살짝 구부리든지 또는 납땜으로 직결을 해 버리면 된다.

이것을 매번 어댑터로 구동하려면 약간 성가시다. 보조배터리를 연결하면 좋을 것 같은데, 배터리의 USB-A 스타일 단자에서 단순히 VBUS와 GND를 뽑아서 일반적인 어댑터 단자를 통해 앰프를 연결하면 몇 초 후에 배터리가 자동으로 차단된다. 아마도 저전류가 흐를 때에는 보조배터리의 출력을 차단하는 너무나 스마트한 기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보조배터리의 USB-C 단자를 이용하되, 케이블 끝의 USB-C 단자에 다음과 같은 보드를 달아서 원하는 전압을 뽑으면 되지 않을까? USB-C 단자에서는 단순히 +5V/GND에서 선을 끌어다가 다른 기기를 구동하면 안 된다. USB-A 시절과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ChatGPT의 설명을 들어 보자.

USB-C에서는 CC1/CC2(Configuration Channel) 핀을 통해 전원을 공급하는 쪽(Source)과 받는 쪽(Sink)이 서로 연결 상태와 역할을 확인합니다. 정상적인 USB-C Sink 장치는 CC 핀에 Rd 저항(보통 5.1 kΩ)을 연결하여 “나는 전원을 받는 장치다”라고 Source에 알려줍니다. 이 절차가 성립해야 Source가 VBUS에 5 V를 공급하는 것이 USB-C의 정상적인 동작입니다.

따라서 USB-C 커넥터에서 VBUS와 GND만 납땜해서 빼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단순한 충전기는 우연히 5 V를 계속 내보낼 수도 있지만, 규격을 제대로 따르는 충전기나 보조배터리는 Sink가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아예 5 V를 켜지 않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출력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조배터리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CC 협상이 제대로 되어 5 V가 나왔다고 해도, 헤드폰 앰프처럼 소비전력이 매우 작은 장치는 보조배터리가 “부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자동으로 꺼질 수 있습니다. 어제 100 Ω 저항을 달고, 다시 91 Ω을 병렬로 추가했는데도 배터리가 꺼졌던 문제는 이 저부하 자동 차단과 관련된 별개의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보유 중이던 MAX4410 보드를 케이스에 넣었으니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MAX97220 앰플리파이어 보드는 결국 주문을 취소하였다. 

공작을 한동안 쉬면 감각이 줄어서 질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사실 어제 업무 스트레스를 삭이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납땜인두를 들었다가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었다. 온갖 부품과 잡동사니를 다 치워 버리고 더 이상 DIY를 하지 말까 생각도 했었다. 욕심을 버리고 차분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음 DIY 프로젝트는 KORG X2 Music Workstation의 망가진 2DD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대체할 에뮬레이터를 달아 보는 것. 이렇게 하면 USB 매체를 이용해서 X2와 PC 사이의 양방향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다. 현재는 SysEx를 이용한 느린 덤프만 겨우 가능한 상태이다. PCG 파일의 역엔지니어링이 충분히 가능하므로 플로피 에뮬레이터가 제대로 설치만 되면 X2를 Ardule 생태계에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9월 24일 업데이트

많은 보조배터리는 버튼을 더블클릭하면 저전류(소전류) 충전 모드로 진입한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니, 어쩌면 제조사측에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이미 만들어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필요한 부품을 또 쇼핑하여 자꾸 재고만 늘릴 것이 아니라 테스트를 먼저 해 보자.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제품의 경우 버튼을 길게 누르면 저전류 충전 모드로 들어간다. 2초 정도는 눌러야 하는 것 같다. 그 뒤에는 충전상태를 표시하는 LED가 주기적으로 다음 영상과 같이 흐르듯 작동한다.


저전류 충전 모드에서는 케이블을 뽑아서 부하를 제거해도 LED가 계속 켜진 상태이다. 이때는 버튼을 더블클릭하면 꺼진다. 인터넷 검색과 실험을 통해서 불필요한 부품 구입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헤드폰 앰프 작동에 사용한 배터리(아이리버 IWP-20)의 제품 겉면에 인쇄된 상세 정보.


2026년 9월 23일 수요일

바이오데이터를 공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Open Repository, Controlled Access, 그리고 Federation

※ 이 글은 다음 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제14차 GA4GH Plenary meeting 참석을 앞두고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 작성한 것이다. GA4GH의 개념과 관련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생성형 AI(ChatGPT)와 대화하면서 초안을 자동 생성하고,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정리하였다. 따라서 GA4GH나 소속기관의 공식 입장을 나타내는 글이 아니다.


연구데이터를 공유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제 큰 이견이 없다. Open Science와 FAIR Data가 연구정책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고, 공공 연구비로 생산한 데이터는 가능한 한 널리 재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도 강해졌다.

그러나 바이오데이터, 특히 사람의 유전체와 임상정보를 다루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금방 복잡해진다.

모든 데이터를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내려받게 하는 것이 과연 가장 바람직한 데이터 공유일까?

더 나아가 데이터를 반드시 한곳에 모아야 할까? 원자료를 분산해서 보관하더라도, 적어도 메타데이터만큼은 한곳에 모아야 제대로 검색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공유’를 너무 쉽게 한곳에 모으고, 한곳에서 검색하고, 필요한 데이터를 내려받는 것으로 생각해 온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바이오데이터 인프라를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 sharing architecture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1. Open-access repository
  2. Controlled-access repository / environment
  3. Federated data-sharing infrastructure

이 세 가지는 앞의 방식이 낡아서 뒤의 방식으로 대체되는 발전단계가 아니다. 데이터의 성격과 위험, 그리고 연구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이 필요하며 실제로는 함께 존재한다.

1.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모델: Open-access repository

생명정보학 연구자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공개 데이터 저장소이다.

연구자가 데이터를 생산하고 repository에 제출하면 accession이 부여되고, 다른 연구자는 검색하여 데이터를 내려받는다.

Researcher
    ↓ submit
Repository
    ↓ search / download
Research community

염기서열 데이터에서는 INSDC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GenBank, ENA, DDBJ가 데이터를 국제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연구자는 공개된 nucleotide sequence data를 전 세계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다.

이 모델은 현대 생명과학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논문에 염기서열 몇 줄을 싣는 대신 accession을 제시하면 전 세계 연구자가 동일한 원자료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연구데이터를 가능한 한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Open Access는 Open Science의 이상과도 매우 잘 맞는다.

Open Science의 이상과도 매우 잘 맞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필요하다.

Open Science가 반드시 모든 데이터를 Open Access, 즉 누구나 별도의 접근 승인을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하라는 뜻은 아니다.

개인정보, 임상정보, human genomic data처럼 공개함으로써 연구참여자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데이터에는 정당한 접근 제한이 필요하다. UNESCO의 Recommendation on Open Science도 scientific knowledge는 가능한 한 개방되어야 하지만 privacy, confidentiality, human subjects 보호 등의 이유로 정당화되고 비례적인 접근 제한을 둘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defined access criteria에 따른 mediated access를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Open Science의 반대말이 Controlled Access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Controlled Access 역시 책임 있는 Open Science를 구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2. 사람의 유전체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사람의 genome은 일반적인 연구데이터와 성격이 다르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제거했다고 해서 완전히 익명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Genotype이나 molecular sequence 자체가 개인 식별 가능성을 가질 수 있고, phenotype이나 clinical information과 결합되면 위험은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human genomic data에서는 다음과 같은 모델이 필요해졌다.

Researcher
    ↓ request
Data Access Committee
    ↓ review
Controlled-access repository
    ↓ approved access
Researcher

미국 NIH의 dbGaP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연구자는 단순히 회원가입을 하고 controlled data를 내려받는 것이 아니라 Data Use Certification을 포함한 access request를 제출한다. NIH Data Access Committee(DAC)는 제안된 연구목적이 연구참여자의 consent와 해당 dataset에 설정된 제한조건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한다.

따라서 핵심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한 availability가 아니다.

Can I find the data?

에 더하여

Am I allowed to use the data
for this particular purpose?

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것이 Controlled Access의 세계이다.

3. 하지만 Controlled-access repository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여기까지는 여전히 repository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승인을 받으면 데이터를 repository에서 연구자가 있는 곳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생각하기 쉽다.

Repository
     ↓
 approved download
     ↓
Researcher's environment

그러나 dataset이 수십 TB, 수백 TB가 되고 여러 병원과 국가에 분산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데이터를 하나의 중앙 repository로 옮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병원 A의 데이터는 병원 A에 있어야 하고, 병원 B의 데이터는 병원 B의 governance 아래 있어야 할 수 있다. 한국의 데이터와 싱가포르의 데이터에는 서로 다른 법률과 consent, access policy가 적용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지 않고도 하나의 연구 인프라처럼 사용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Federation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4. GA4GH가 풀려는 문제

GA4GH(Global Alliance for Genomics and Health)는 거대한 국제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려는 조직이 아니다.

GA4GH는 genomic and health community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technical standards와 regulatory·ethical policy tools를 개발한다. 그 목적은 서로 독립적으로 관리되는 genomic and health data infrastructure가 안전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함께 작동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먼저 데이터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한다.

                 Researcher
                     ↓
                   Beacon
                     ↓
          ┌─────┼─────┐
          ↓          ↓          ↓
        Korea    Singapore    Europe

Beacon은 관련 데이터가 존재하는지를 찾게 해준다. 데이터 자체를 연구자에게 곧바로 넘겨주는 서비스는 아니다.

그 다음에는 그 데이터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Dataset
   ↓
  DUO

DUO(Data Use Ontology)는 dataset의 permitted use를 machine-readable하게 표현하기 위한 ontology이다.

반대편에는 연구자가 있다.

Researcher
    ↓
Passport / Visa

연구자가 누구인지, 어떤 자격과 authorization을 가지고 있는지를 서로 다른 기관이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 data object를 표준적인 방식으로 가리키고 접근하기 위해 DRS(Data Repository Service)와 같은 interface를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기관이 반드시 같은 software나 같은 storage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더 나아가 데이터를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Federation에서 특히 흥미로운 변화는 분석 방식에서 나타난다.

전통적인 모델은 다음과 같다.

DATA
 ↓
Researcher

연구자가 데이터를 내려받아 자신의 compute environment에서 분석한다.

그러나 sensitive genomic data에서는 반대로 할 수 있다.

WORKFLOW
   ↓
 DATA

즉 연구자의 분석 workflow를 데이터가 존재하는 secure compute environment로 보내는 것이다. 흔히 compute-to-data 또는 bring the algorithms to the data라고 표현한다.

GA4GH의 WES(Workflow Execution Service)와 TES(Task Execution Service)는 이런 방식의 federated analysis를 지원할 수 있는 표준 interface를 제공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데이터 공유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는 흔히

데이터를 공유한다 = 파일을 전달한다

라고 생각했다.

Federation에서는 이를 다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데이터를 공유한다 = 허가된 연구자가 그 데이터로부터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한다.

파일 자체가 연구자의 컴퓨터로 전달되지 않아도 데이터는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

6. 세 가지 모델을 비교해 보자

Open-access repository Controlled-access repository Federated infrastructure
대표 질문 데이터가 공개되어 있는가? 내가 이 데이터를 이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기관의 데이터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가?
접근 방식 공개 검색·다운로드 신청·심의·승인 Discovery + authorization + interoperable access/compute
데이터 위치 Repository Controlled repository / secure environment 여러 기관에 분산 가능
연구자 인증 상대적으로 단순 중요 기관 간 신뢰 가능한 identity가 특히 중요
Data-use restriction 상대적으로 적음 핵심 요소 Machine-readable policy와 기관 간 trust가 중요
분석 방식 주로 다운로드 후 분석 승인 후 다운로드 또는 secure environment Compute-to-data 가능
대표 사례/개념 INSDC 등 dbGaP, EGA 등 GA4GH standards를 활용한 federated ecosystem
핵심 가치 Openness Responsible access Interoperability + Trust + Local control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세 모델을 우열관계로 보지 않는 것이다.

공개할 수 있는 nucleotide sequence를 굳이 복잡한 access-control system 안에 넣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identifiable human genomic data를 Open Science라는 이유만으로 unrestricted download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데이터가 여러 병원과 국가에 분산되어 있다면 하나의 controlled repository로 모두 복사하는 것보다 federation이 적절할 수 있다.

결국 데이터의 성격에 맞는 sharing architecture를 선택해야 한다.

7. Open과 Closed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 공유를

OPEN ←────────────────────────→ CLOSED

라는 한 축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실제 연구데이터 infrastructure에는 훨씬 다양한 access model이 존재한다.

Open download
      ↓
Registered access
      ↓
Controlled access
      ↓
Secure analysis environment
      ↓
Federated analysis

아래로 내려간다고 반드시 데이터가 덜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00,000명의 genome을 연구자에게 직접 다운로드하게 하는 것보다 secure environment 안에서 승인된 workflow를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개인정보를 더 잘 보호하면서도 실제 연구 활용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How open is the data?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How usable is the data under appropriate governance?

일 수 있다.

8. 결국 핵심은 Trust이다

Open repository에서는 trust 문제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누구나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Controlled access에서는 연구자를 신뢰해야 한다.

Federation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기관이 다른 기관을 신뢰해야 한다.

Can Hospital A trust
the identity issued by Institution B?

Can Singapore trust
an access authorization from Korea?

Can the data custodian trust
the workflow submitted by a foreign researcher?

따라서 API 몇 개를 연결한다고 federation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공부하면서 나는 federation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게 되었다.

Federation = Trust + Interoperability + Local control

9. 다시 Open Science로 돌아가면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Open Science는 모든 연구데이터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일까?

적어도 바이오데이터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Open Science가 추구해야 할 것을 반드시 unrestricted access라고 보기보다 maximum responsible reuse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공개 가능한 데이터는 open repository에 둔다.

민감하지만 연구가치가 높은 데이터는 controlled access로 제공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이동시키기 어렵거나 서로 다른 기관의 governance 아래 있어야 하는 데이터는 federation을 통해 발견하고, 허가받고, 분석한다.

OPEN-ACCESS REPOSITORY
          │
          │
  CONTROLLED ACCESS
          │
          │
FEDERATED ACCESS & ANALYSIS

이들은 서로 경쟁하는 모델이 아니다.

데이터를 가능한 한 많이 공유하면서도, 그 데이터가 요구하는 책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서로 다른 도구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GA4GH의 의미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GA4GH는 Open Science를 제한하기 위한 체계라기보다, 단순한 Open Access로는 공유할 수 없는 genomic and health data까지 책임 있는 재사용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기술적·governance적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GA4GH 스스로도 genomic and health-related data의 공유가 human health의 발전에 중요하다고 전제하면서, privacy, non-discrimination, procedural fairness와 human rights에 기반한 responsible data sharing을 강조한다.

다음 주 싱가포르에서 실제 GA4GH community의 사람들을 만나고 Plenary의 여러 발표를 들으면서, 오늘 공부하며 만들어 놓은 이 그림이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참고자료

  • UNESCO, Recommendation on Open Science
    https://www.unesco.org/en/legal-affairs/recommendation-open-science
  • GA4GH, Framework for Responsible Sharing of Genomic and Health-Related Data
    https://www.ga4gh.org/framework/
  • GA4GH, What We Do
    https://www.ga4gh.org/what-we-do/
  • GA4GH, About Us
    https://www.ga4gh.org/about-us/
  • NIH dbGaP, Requesting Controlled-Access Data
    https://www.ncbi.nlm.nih.gov/projects/gap/cgi-bin/about.html

2026년 9월 21일 월요일

이 롱우드(Longwood)는 그 롱우드가 아니었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보스턴에 약 두 달 넘게 가족과 함께 장기 출장을 나온 일이 있다. Harvard Medical School의 George M. Church 연구실에서 polony sequencing 기법을 통해 대장균 변이체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하는 임무를 띠고서. 실제로는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본격적인 시퀀싱 실험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었다. 이런 기회를 갖게 해 준 21C 프론티어 미생물유전체활용기술개발사업단에게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Church Lab에서 만났던 한국인 방두희 박사는 현재 연세대학교 화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고(웹사이트), Gautam Dantas(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Greg Porreca, Nicholas Reppas, Jay Shendure, Kun Zhang, Resmi Charalel 정도의 얼굴이 생각이 난다(Church Lab members 1989-2014). 나를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던 사람은 Sara Vassallo였다. Gautam은 그로부터 수년 뒤에 미국에서 열렸던 다른 학회에서 한번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기억나는 또 다른 과학자는 대만인인 Hsin-Hung (David) Chou. 그는 현재 국립대만대학교에서 재직 중이다(웹사이트1, 웹사이트2).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 시퀀싱을 할 샘플은 실험적 장기 진화 연구(Long-Term Evolution Experiment, LTEE, 꽤 최근까지는 Long-Term Experiment Evolution으로 불렸었음)의 대가인 Richard E. Lenski 교수(미시건 주립대)에게서 얻기로 한 것이었다. 시퀀싱용 샘플 균주가 왜 왜 하바드 대학교에 있는가? 2006년 당시 하바드 대학교 Department of Organismic and Evolutionary Biology에서 부교수로 있던 Christopher J. Marx는 Lenski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한 일이 있고, Marx는 바로 David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기 때문이다. David과 함께 케임브리지의 메인 캠퍼스 Marx 랩에 가서 진탕배양기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십개의 배양용 플라스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몸집이 매우 큰 친구였던 David과는 같이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다. 그 후에 몇 차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가 마지막 이메일을 보낸 것이 꼭 10년 전인 2016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생각이 나서 이메일을 보냈고, 반가운 답장을 받았다.

그 뒤로 보스턴을 들른 것은 2년 전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로건 국제 공항에 두어 시간 머문 것이 전부였다. Church Lab은 찰스 강 남쪽, 대형병원이 밀집한 롱우드 의료지구(Longwood Medical Area)에 있다. 반면 본교는 찰스강 북쪽, 케임브리지에 위치한다. 두 캠퍼스의 거리는 약 5 km. 20년 전에 내가 있었던 동네는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우리 가족은 Church Lab이 위치한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 Back Bay Manor라는 아파트에서 잠시 거주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폐쇄된 상태라고 한다. 아내는 근처 Stop & Shop(구글맵)에서 카트 가득 식료품을 구입하여 매번 집에서 요리를 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외식에 너무 인색했으니...

그로부터 꼭 20년이 지나서 보스턴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롱우드 거리(Longwood Avenue)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David이 이 던킨의 커피가 일품이라고 했었는데... 롱우드 갤러리아 안 푸드코에 있다.

롱우드 갤러리아는 아직도 건재하다.

Beth Israel Deaconess Medical Center.

롱우드 센터. Dana-Farber Cancer Institute와 Boston Children's Hospital이 여기에 입주해 있다.

Boston Children's Hospital에 근무하는 한국인 과학자를 만난 뒤 Green Line(T)을 타러 나섰다. 내가 뻔질나게 T를 탔던 역 이름이 Longwood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물어서 찾아갔는데 길거리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다. 지하철역을 조금만 넘어가면 가족과 같이 두 달 넘게 살았던 아파트가 나오는데, 역에 다가갈수록 점점 길거리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막상 찾아간 역은 굴다리 밑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이상하다? 절대로 이런 역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차도와 나란히 달리는 선로가 있었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길거리의 모습도 20년 전의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엥? 선로가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내가 기억하는 롱우드 역은 이렇지 않았는데...

T에 오른 뒤 Green Line 노선도를 확인해 보았다. 한 정거장만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Museum of Fine Arts, 그리고 Northeastern, Prudential 등 익숙한 역명이 나와야 하는데 왜 하나도 맞지를 않나? 노선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내가 T를 탔던 곳은 Longwood가 아니라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1마일 남짓 떨어진 Longwood Medical Area 역이었던 것이다. 즉 Galleria를 나와서 왼편이 아니라 정 반대편인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다.


MBTA(우리가 흔히 말하는 MBTA test가 아니라 Massachusetts Bay Transportation Authority임)에서 제공하는 노선도에 의하면 Longwood는 D 지선, Longwood Medical Area는 E 지선에 위치한다. 

T Green Line 노선도(출처).


기억이란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가! 겨우 20년 전에 살았던 곳도 이렇게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니. 

2026년 9월 11일 금요일

느린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인, PD, 가수이자 아나운서인 이상협 씨가 KBS 클래식 FM '당신의 밤과 음악(밤 10시~)'에서 종종 들려주는 멘트이다. 요즘 드럼 패턴학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면서 DIY synth인 Fluid Ardule의 운영 스크립트 개선은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화면 전환의 특정 위치에서만 반응이 너무 늦어서 왜 그런지 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코딩의 불완전함 때문이었다. 라즈베리 파이 3B, SPI로 연결한 3.5인치 TFT 디스플레이와 같은 '소박한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를 기다리게 만든 코드가 문제였다.

어제의 퇴근 후 개발에서는 작정하고 시간을 재기로 했다. 화면을 그리는 시간, framebuffer에 쓰는 시간, 이벤트가 들어온 뒤 실제 렌더링이 시작되는 시간을 나누어 측정했다. 

Home에서 Sound 서브메뉴로 진입하는 순간의 코드가 문제였다. 화면을 새로 그려야 한다는 dirty 상태가 설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렌더링 함수는 호출되었지만 새로 그릴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갔고, 나중에 다른 이벤트가 화면을 dirty 상태로 만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허망했다. 이제는 버튼을 누르면 거의 즉각적으로 화면이 바뀐다.

이것 외에도 사운드폰트를 다루는 방식 등 많은 개선을 하였다. Changelog에 260910u 버전으로 기록된 사항은 이것 외에도 상당히 많다.

다음은 개선 후의 사운드 서브메뉴 화면이다. 이제는 부팅 시 두 개의 사운드폰트를 기본적으로 메모리에 올려 둔다. 하나는 피아노 전용인 Salamander C5 Lite이고, 다른 하나는 범용으로 사용하는 Arachno GM-compliant SF2이다. 평상시에는 키보드가 연결된 채널 1에 Salamander를, 나머지 채널(CH2–16)에 Arachno를 할당한다. MID 파일 재생을 시작하면 채널 1도 Arachno로 전환되므로 전 채널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MIDI 파일 재생에도 문제가 없다. 범용 사운드폰트는 필요하면 FluidR3 GM으로 바꿀 수도 있다.

버전 260910u.


두 개의 사운드폰트를 동시에 로딩하므로 부팅 시간은 약간 길어졌지만, 일단 올라온 뒤에는 연주 모드를 바꿀 때마다 사운드폰트를 내렸다가 다시 올릴 필요가 크게 줄었다. 특히 Combi는 특정 사운드폰트에 종속되지 않고 현재 올라와 있는 범용 사운드폰트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바꾸어 운용 방식이 훨씬 간단해졌다.

스포츠 캐스터로도 잘 알려진 이재후 아나운서는 같은 방송국의 아침 방송인 '출발 FM과 함께(아침 7시~)'를 진행한다. 방송 시간대가 다르니 두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같은 시간에 듣기는 어렵다. 간혹 특집 방송이 편성되면 서로를 향한 장난기 넘치는 디스를 하기도 한다. 

"제 이름은 이재호가 아니고 이재후입니다. '후지다'의 '후'입니다."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있지 않다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런데 그 결정권자가 나였다면?

Sound 서브메뉴는 하루가 지나 다시 바뀌었다. 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꽤 많은 고민을 하여 합리적으로 고친 UI이다(버전 26091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