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4일 월요일

긴 휴식과 눈의 즐거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연말을 컴퓨터가 없는 곳에서 보내고 있다. 이메일은 휴대폰으로 겨우 확인하는 수준이나 글을 쓰기에는 매우 불리한 환경에 처한 것이다. 음식을 직접 챙겨먹고 세탁물을 처리하는 등 생활에 따르는 필수적인 일을 잠시 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자유 시간을 누리는 셈이다. 읽을 책이 가까운 곳에 마땅히 없다는 점은 불편하다(대형 서점에 가서 사면 된다). 어떤 사연으로 인해 이런 휴식 아닌 휴식을 누리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로 남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므로.

남는 시간에는 미술관을 다녔다. 눈이 제법 호강을 한다. 현대미술에 큰 발자욱을 남긴 마르셀 뒤샹, 그리고 뉴욕 이스트빌리의 예술인이었던 데이빗 워나로위츠. 이 두 사람의 생애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뒤샹은 항상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여성 이름을 가명으로 내세워 활동을 하기도 한 반면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물론 많은 아티스트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이 이스트빌리지의 예술활동을 위축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글도 보았다.

에로티시즘은 예술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예술 공간에서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강렬한 그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용기 있는 성적 소수자들은 이를 좀 더 공공연하게 표출하고자 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문란하다'고 비난하다.

성적 경향은 개인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선천적인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타고나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린 시절에 매체에서 이런 정보를 접하면 동성애 경향이 생겨난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자의 입장은 동성애는 옳지 않은 것이고 사회에서 이것이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가치 판단 기준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변방과 마이너리티는 변화의 공간이다' 신영복 선생이 남긴 말이다. 마이너리티의 속성은 무엇인가를 계속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 역시 다양성에 있다. 마이너리티의 투쟁 목표는 세상을 뒤엎어서 주류가 되고자 함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소수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권익을 찾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돠어야 한다고 믿는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