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구한 ECL86/PCL86 싱글 앰프용 회로도(diyAudio 링크; tubman813의 포스팅 - 로그인을 해야 첨부한 회로도 이미지 파일을 볼 수 있음)를 참조하여 며칠에 걸쳐 실체 배선도를 그렸다. 상판에 이미 진공관 소켓 고정용 구멍이 뚫려 있어서 고정 방향을 바꿀 수가 없었다. 이 앰프를 STC(super triode connection) 싱글 앰프로 만들어 주었던 제작자는 소켓 주변에 러그 단자를 전혀 쓰지 않고도 아주 간결하고 아름다운 부품 배치를 하였었다. 나는 진공관 하나에 대하여 5핀 러그 단자를 하나씩 세우는 배선 계획을 세웠는데, 소켓을 고정하는 각도가 정해진 상황에서는 최적의 실체 배선도를 그리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렸다가 고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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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L86 싱글 앰프의 배선도 |
여기에 보인 그림과 같이 계획한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신호 입력 경로에 위치한 0.22uF 커플링 캐패시터는 부품 구입을 빼먹은 터라 과감하게 생략하였고, 캐소드 저항은 기존에 장착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쓰느라 180R에서 220R로 바뀌었다. B전압도 제작 완료 후 실제 측정해 보면 260V에 가깝게 나온다.
저항을 전부 2와트급으로 마련했더니 리드가 두꺼워서 단자 구멍을 통과한 다음 한 두 차례 둘러 감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른 부품을 다 납땜한 상태에서 7번 단자(5극관 캐소드 + 서프레서 그리드)에 부품을 연결하려고 보니 인두 팁이 들어갈 공간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 이걸 히터 배선과 더불어 가장 먼저 연결하는 건데... 원본 회로도에는 저항의 와트 수는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앰프인 'Piccolo'(원본 글은 사라지고 인터넷에는 회로도가 유물처럼 돌아다님)에서 전부 2W 저항을 사용했기에 이걸 그대로 따라서 했는데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 제작자가 상당히 큰 전력을 감당할 수 있는 캐소드 저항과 바이패스 캐패시터를 별도의 위치에 설치해 두었기에 이를 그대로 사용하되 전선을 통해서 7번 단자에 연결하도록 만든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부품을 소켓에 직접 고정할 생각이었다면 자리가 나지 않아서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앞으로 같은 앰프를 한번 더 만든다면 그때는 오늘의 시행착오를 발판으로 삼아 매우 수월하고도 아름다운 배선을 하게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Point-to-point wiring이 이렇게 힘들구나! 만약 푸시풀 앰프를 이런 방식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아마도 며칠이고 씨름을 하다가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나는 앰프 자작의 한 방법으로 일컬어지는 하드 와이어링(hard wiring)이란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드 와이어링은 물리적인 배선을 실제로 했다는 뜻이고, 이것의 반대 개념이라면 무선을 통한 접속 또는 프로그래밍으로 구현된 소프트 와이어링, 또는 커넥터를 이용한 접속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앰프를 만드는 재래식 방법으로 여기는 '하드 와이어링'은 전선 피복을 벗겨서 부품 다리를 감은 뒤 납땜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뜻하는데, 내가 조사한 것에 따르면 영미권에서는 이를 point-to-point 와이어링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배선을 마무리하고 소스 기기와 전원을 넣었다. 히터는 빨갛게 달아 오르는데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멀티미터로 그라운드와 플레이트 사이에 걸리는 전압을 측정해 보았다. 전혀 전압이 잡히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 이건 필시 내가 만들지 않은 구역에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 원인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앰프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굵은 그라운드 동선과 전원회로의 그라운드가 전기적으로 도통된 상태가 아니었다. 당연히 전선을 통해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살펴 보아도 연결된 곳이 없었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나? 정류부의 그라운드는 러그 단자의 고정용 핀에서 끝나 있었다. 아니, 그러면 상판 전체를 그라운드로 쓰고 있었단 말인가? 이전 제작자가 만든 회로를 걷어낼 때, 진공관 소켓 하나의 본체에 전선이 납땜이 되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생각해보니 소켓과 상판이 닿는 곳에 납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출된 선이 그라운드용 동선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상판 전체를 그라운드로 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구성이다. 전도성 상판을 접지에 연결하는 것은 안전이나 잡음 방지를 위해 중요하지만, 이를 회로 전체의 그라운드로 삼아서 모든 전류가 되돌아가는 길로 쓰는 것은 썩 좋지는 않은 설계라고 생각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이 앰프는 무접지 전원 케이블을 사용하고 있다. 접지가 부착된 전원 케이블을 사용하고, 섀시는 전원 소켓의 접지에 연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 생각된다.
회로의 그라운드를 제대로 연결한 다음 다시 작동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비로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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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판 앞쪽에는 구멍을 뚫으려다 실패한 상처만 남았다. 상판의 재질은 아마도 페인트를 입한 스테인레스 스틸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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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을 가로지르는 그라운드 동선에 아래쪽으로 납땜된 부품부터가 이번에 새로 만들어 넣은 영역이다. 라이터가 없어서 수축튜브를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했다. 바깥쪽 소켓은 이전에 쓰던 것을 그냥 끼워 넣은 상태이다. |
이전에 만들어진 상태에 대한 나의 관찰과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내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태로 앰프를 다시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개작 전의 잡음 원인은 앞으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좌우 채널의 진공관을 바꾸어 끼워도 여전히 잡으미 한쪽에서 났다는 것은, 오늘 발견한 다소 납득이 되지 않는 접지 방식, 즉 어느 하나의 초단관(12DT8) 소켓 본체와 상판 결합 부위에 납땜을 하여 그라운드를 인출한 곳에서 접촉 불량 등의 상황이 발생한 것에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유리관 하나에 3극관과 5극관이 함께 들어 있으니 단 두 알이면 스테레오 앰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복합관의 장점이다. 내가 만든 싱글 앰프의 소리는 어떠한가? 전원을 넣는 순간 들리기 시작하는 험은 예전보다는 나은 것 같다. 이번에는 NFB도 걸지 않았으니 싱글 특유의 까실까실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차피 이전 앰프와 이번 개작 앰프의 소리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아직도 PCL86 관은 몇 개가 남아 있다. 이번에 개작을 하면서 새 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공관 앰프를 처음 장만하면서 언젠가는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여 교체용 관을 마련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심리이지만, 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가격은 약간 올랐어도 PCL86은 여전히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여분의 관을 써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기만 한다. 예비용으로 이베이에서 한꺼번에 10개나 샀다가 처분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번 개작을 하는 과정에서 여분의 관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동기가 되지 못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단순하다. 6LQ8(SE & PP)과 PCL86(SE)이나 유지 보수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련다. 어차피 거실의 주력 앰프는 인터M R150PLUS가 자리를 잡았으니... 43 SE 앰프는? 글쎄, 잘 모르겠다. 6P1 SE 앰프는? 이미 이 세상 물건이 아니다.
갖고 있는 여분의 부품을 이용해서 뭔가 해야 된다는 강박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