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 수요일

불평등이 건강과 수명에 남기는 흔적

처음 도서관에서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국가간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책등에 쓰인 제목만 보고 즉흥적으로 선택을 했다가 몰입해서 순식간에 읽은 뒤 정말 좋은 책을 골랐다는 만족감을 느낄 때도 있고, 인터넷 등에서 미리 책 소개를 보고 빌렸다가 정작 재미가 별로 없어서 읽다 만 책도 있다. 이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



알린 T. 제로니머스의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영문 원제: Weathering: The Extraordinary Stress of Ordinary Life in an Unjust Society)는 바로 미국의 실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건국 이념으로 삼는 미국에서 왜 백인과 흑인의 평균 수명에 현격한 격차가 존재하는가? 10대보다 20대에 아이를 낳은 흑인이 왜 더 빨리 사망하는가? 철이 없고 절제를 하지 못해서 10대에 임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20대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엄마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의료 인력이나 환자 중에 흑인이 얼마나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과연 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고 잘 전달될지 고민해야 하는 입장을 생각해보라. 

미국의 백인 청년 대다수는 자신이 장애 없이 살아서 50세 생일을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건강하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연구를 진행한 재정 지원이 끊긴 극빈곤지역 흑인 및 백인 집단에서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생존 기간 중 최대 30퍼센트를 장애인으로 살았다. (17쪽)

웨더링(weathering)이란 차별과 편견, 배제 등에 의하여 일어나는 반복적이고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신체에 점진적으로 영향을 끼쳐서 건강과 수명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19쪽의 설명에서는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차별에 의해 공격당하는 소외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생리학적 작용을 포괄하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불평등한 사회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심리적인 영향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스트레스 받지 마.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이고, 우리의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 의하면 건강과 수명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비난 또는 개인적 책임 내러티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 방식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한 사례로서 저자는 뉴욕시에서 추진하는 바이탈 브루클린(Vital Brooklyn)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이 사업에는 재생에너지 사회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경제 및 건강 형평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바이탈 브루클린의 웨더링을 고려한 공평한 사회 정책 지침은 다음과 같다.

  • 전체론적, 생태학적으로 생각하라
  • 억압받는 이해관계자를 지우지 마라.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
  • 노동연령 및 생식연령 성인의 필요에 관심을 가져라
  • 우리 모두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라

웨더링에 의한 만성 스트레스는 텔로미어의 길이를 줄이고 이는 세포 노화와 매우 연관이 깊다. 노화된 세포는 염증성 사이토카인을 분비하여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성 염증은 췌장 세포에 이상을 일으켜 당뇨병을 유발하거나 자가면역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소외집단의 구성원에게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일인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SLC6A4 유전자(세로토닌 수송체)의 프로모터 부위에 메틸화, 즉 후생유전학적 표지를 더 많이 축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뇌의 편도체 반응성을 높이고 공포 표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향후 우울 증세의 증가와 연계된다고 한다.

Poverty marks a gene, predicting depression Duke Today 2016년 5월 24일

스트레스가 일상인 한국 사회는 얼마나 건강한가? 최근 Nature Medicine에 실린 다음 논문에서는 BBAG(Biobehavioral Age Gap), 즉 보호 요인(건강, 인지, 기능, 교육)과 위험 요인(심혈관질환, 시각·청각장애 등)을 활용해 예측된 나이실제 나이 의 차이를 계산한 지표를 써서 각 국가의 가속 노화 정도를 산출하였다. 이에 의하면 유럽은 가장 건강하게 노화하고 있고 이집트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가장 빠르게, 그리고 아시아 및 라틴아메리카는 그 중간에 해당하였다. 이 연구에는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거의 선진국 수준에 다다른 한국은 높은 경제 수준에도 불구하고 환경적 요인, 사회 불평등, 대기 오염, 정치·사회 구조 등의 exposome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노화를 가속화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The exposome of healthy and accelerated aging across 40 countries Nature Medicine 2025년 7월

여기에서 새로운 개념이 또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엑스포좀(exposome). 이는 개인이 삶 전반에 걸쳐서 겪는 물리적·사회적 환경 요인의 총합을 의미한다. UK Biobank의 약 50만 명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exposome과 유전적 요인(다유전자 위험 점수 , PSR)이 사망 및 노화에 미치는 상대적 기여를 비유한 다음의 논문에서는 exposome에 의한 설명력이 훨씬 컸다고 한다(5.5-49.4% vs. 10.3-26.2%).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변경 가능한(modifiable) 환경 요인—흡연 여부, 신체활동, 사회·경제적 상태—에 대한 개입을 통해 이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점.

Integrating the environmental and genetic architectures of aging and mortality Nature Medicine 2025년 2월 

이상의 자료 분석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스트레스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빈곤이나 소외에 의한 스트레스는 그 자체가 세포를 늙고 병들게 만든다. 사회 구조적인 변혁을 통해 빈곤과 소외를 퇴치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 과정에서 반드시 당사자가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거대한 예산을 투입해 유전체를 해독하고 신약 개발의 실마리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조금 덜 먹고 좋은 음식을 고르며 꾸준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길이며, 비용 대비 효과도 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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