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1일 일요일

독서 기록 - [착한 기부 나쁜 기부] 외 다섯 권

약 2주 간격으로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열심히 읽고 주말 저녁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독서 기록을 적는다. 주로 책을 빌려온 주에 집중해서 거의 다 읽어버리고 나머지 한 주는 잘 읽히지 않는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한다. 요즘은 일부러 소설을 읽으려고 애를 쓰지만 항상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이번에 빌린 책 일곱 권 중에서 SF 작가 필립 K. 딕의 단편소설집은 아직 1/3도 읽지 못했다.

이번 주는 지력(智力)이 달려서 그런지 주말을 맞아서는 전혀 지적인 일을 하지 않았고, 독서 기록을 쓰는 것도 왠지 버겁게 느껴진다. '읽는 것만 즐기고 기록은 하지 말까?'하는 간사한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책을 반납하기 전에 포스트잇을 끼워둔 쪽을 다시 살피면서 짧게라도 기록을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다시 생각을 다잡아 본다.


(인도주의의 눈으로 바라본) 착한 기부 나쁜 기부


신상문 지음. 기부가 항상 착한 것만은 아니며 인도주의적 시각을 함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소개되고, 월 몇만원이면 바로 그 사람이 수혜자가 된다는 기부 독려 광고를 요즘 많이 보게 된다. 이 광고는 기부자를 불러모으는 데에는 꽤 효과가 좋지만 어떤 면에서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노출된 직접적 수혜자는 그 가족 혹은 집단에서 단순한 수입원으로 취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꼴찌의 함정'이다. 가장 어려운 대상을 선정하여 돕게 되면 그 대상자는 꼴찌를 면하게 되지만 결국 또 다른 새로운 꼴찌가 나타나게 된다. 지역사회의 동의와 공감이 없이 기부가 이루어지면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신영복은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고,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다... 기부는 일방향의 행위가 아니라 쌍방향의 교류이고, 목적 자체는 동일함을 지향해야 한다(75쪽).
기부금을 받아 그것을 여러가지의 형태로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비용이 든다. 그런데 기부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지역, 어떤 목적에 딱 맞추어서 자기가 기부한 돈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고, 이미지 개선이나 세제 혜택에 좀 더 관심이 많은 기업 또는 단체의 경우 이러한 입장을 강하게 고수하려 한다. 그러면 특정히 사용처를 지정하지 않은 기부자들의 돈이 운영비로 주로 들어가거나, 혹은 그런 용도의 매칭 기부자를 대리 기관이 만들어야 하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도와주려는 지역이 지금 우리의 기준에서 낙후되어 있으니 문명화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가 소해한 조현범의 [문명과 야만: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19세기 조선]이라는 책을 다음 기회에 읽어보아야 되겠다. 기부자는 익명성과 무대가성을, 대리기관은 전문성과 투명성을, 수혜자는 자립과 역량강화에 힘써야 인도주의에 입각한 올바른 기부 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세계화와 그 불만(부제: 전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송철복 옮김

노예의 길(부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김이석 옮김

두 책은 서로 상반된 내용을 다룬 책이다. 스티클리츠는 새'케인즈학파'의 경제학자이고, 그보다 앞세대의 사람인 하이에크는 케인즈와 치열한 대립 관계에 있던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이다. 두 저자 전부 노벨 경제학자를 받은 석학이기도 하다. 하이에크가 이 책을 출판했던 1944년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는 전쟁으로 이어진 실수를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독일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 체제를 일사불란하게 가동하고 있었고, 독일과 대결 중이었던 영국에서도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이상에 대한 인기가 높아가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즉,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직화된 사회·경제 체제를 평화시에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기대가 퍼지는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하이에크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독점, 계획 경제(명령 경제)는 불합리하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읽기 힘들었다. 번역이 너무 딱딱했기 때문이다. 원작의 표현을 지나치게 직역한 데서 온 문제라고 생각한다.

먼저 짚어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자유'라고 번역하는 단어는 freedom과 liberty로 분명히 나뉘며 그 뜻도 다르다는 점이다(Freedom과 Liberty의 차이를 아시나요?).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는 liberty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독 freedom(억압과 속박이 없는 상태)의 뜻으로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공부를 할 필요를 느낀다.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알아볼 생각이다.

개인이나 단체가 자유롭게 경제적 행위를 하는 것이 큰 범주에서는 세계화 또는 자유화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개발도상국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만드는 잠재력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하이에크가 믿은 대로 세상이 돌아갔다면 스티글리츠의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예외적인 국가를 제외하면 국가간의 장벽을 제거하는데 노력했던 여러 국제무역협정, 그리고 세계화 진행을 위해 개발도상국에게 가해졌던 정책이 오히려 이들 국가를 황폐하게 한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1. 자본시장 자유화의 위험 인정
  2. 파산개혁과 지불정지
  3. 구제금융에 대한 의존 축소
  4. 은행규제의 개선
  5. 위험관리 개선
  6. 안전망의 개선
  7. 위기관리 개선

성장 없는 번영(부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팀 잭슨 지음, 전광철 옮김. 이번에 읽은 책들은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고정관념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많았다. 네번째 책도 그러하다. 경제적 성장이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어느 사회도 의심할 여지 없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적 성장을 촉진하려면 혁신 과정, 즉 신상품('창조적 파괴')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기업조차 단지 비용 최소화를 통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글러스 부스가 말했듯이 '신상품과 지위 추구형 소비자와 독점 추구형 기업가는 서로 뒤얽히며 장기적인 경제성장의 토대를 구축'한다고도 하였다. 신상품에 대한 욕구는 소비주의 사회논리를 강화 → 소비주의 사회논리는 다시 신상품에 대한 욕구를 강화시키는 무한 사이클이 지금까지 경제성장을 부추겨왔다.

하지만 자원은 유한하다. 세계 인구가 90억 명이 되는 시점에 모두가 OECD 국가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풍요로움에 도달한다면 , 2050년까지 지금보다 15배 이상, 금세기말에 가서는 40배 이상의 경제 규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새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경제 파라다임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에 성장 속도가 둔화될 것임을 예측하였다.
  1. 생태 한계의 부과
  2. 경제가 서비스 기반 활동으로 구조적 이행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생산성 향상 속도가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음
  3. 생태투자가 실행된 부분으로 상당한 규모의 자원이 이동
결론적으로 새로운 경제에서는 다음과 같은 거시경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 서비스 기반 활동으로의 구조적 이행
  2. 생태적 자산에 대한 투자
  3. 안정화 메커니즘으로서의 노동시간 정책
이 책은 좌파적 경제학자가 개인 의견을 전제로 쓴 책이 아니다. 영국의 지속가능개발위원회가 지속가능성과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행한 연구의 결산에 해당한다. 부록에 의하면 이 연구는 위원회가 '번영 다시 정의하기'를 출간한 2003년에 착수되었다고 한다. 우리 정부가 한국형 녹색 뉴딜을 내세워서 전국적인 삽질을 시작한 4대강 사업을 시작한 것이 2008년이었다. 반면 영국 지속가능위원회에서는 2009년에 <성장 없는 번영>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우리가 삽질을 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번영을 다시 정의하고('Redefining Prosperity') 경제적 영향을 줄이며 구조에 맞서고 잘 사는(물질이 아닌 정신적 만족) 문제를 다루고 토론했던 것이다.

지성만이 무기다(부제: 읽기에서 시작하는 어른들의 공부법)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김해용 옮김. 성인이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단순히 교양을 쌓거나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성을 갖춘 인간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는 방법을 다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독서'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독서에만 전념하는 한, 사실 우리의 머리는 타인의 사상이 뛰노는 운동장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거의 통째로 하루를 다독에 허비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간다(131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양한 종류의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특정 책의 논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평가 기준을 자신의 평가 기준으로 삼지 말고, 사회성 편중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아라. 그리고 연구비를 받으면서 전문이라는 '가늘고 긴 구멍'속에서 여유있게 사는 소위 전문가가 되지 말고 - 현대는 전문가라는 것이 학자로서의 장사 도구가 되었다 - 구멍 밖의 밝은 지표에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라.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할까? 외국어, 철학사상, 그리고 종교에서 시작하라. 그리고 공부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어떻게 늘릴까? 좀 과격하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취미를 버려라. (2) 망상을 버려라. (3) 시간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심지어 주변 관계와의 일시적 격리(일주일 중 주말 이틀 동안이라도)라는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마터면 깨달을 뻔(부제: 인지심리학자가 본 에고의 진실게임)


크리스 나이바우어 지음/김윤종 옮김. 원제는 <신경증 환자를 위한 깨달음 회피하기 지침서(The Neurotic's Guide to Avoiding Enlightment)>이다. 표지에는 참선 중인 부처가 한쪽 눈만 감은 채 다른쪽 눈을 빤히 뜨고 있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놓았다. 마음을 통제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좌뇌라는 해석기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주는 60년대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의 연구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정상인의 좌뇌와 우뇌는 뇌교(pons)라는 신경섬유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를 절단할 경우 두 반구는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왼쪽 눈을 비롯하여 신체 왼쪽을 통하는 모든 입출력은 우뇌로 연결되고, 나머지 절반은 반대이다. 하지만 정상인에게서는 뇌가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이처럼 반씩 나뉘는 과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자니가 박사는 뇌교를 부득이하게 절단한 'split brain' 환자에게 좌뇌로는 닭발을, 우뇌로는 눈이 덮인 경치를 각각 보게 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보았던 영상에 가장 부합하는 그림을 고르도록 하였다. 우뇌는 (왼손을 사용하여) 눈 치우는 삽을, 좌뇌는 (오른손을 이용하여) 닭의 그림을 골랐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뇌의 각 반구는 자기가 입수한 초기의 시각적 정보에 충실한 두번째 그림을 고른 셈이다. 그런데 이 환자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왼손은 왜 삽을 골랐나요?" 언어중추는 좌뇌에 속하는 기능이다.

(정직한 좌뇌라면) 어, 글쎄요. 우뇌랑 이야기한지 너무 오래 되어서 왜 우뇌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실제 대답) 오, 그건 간단하죠. 닭발은 당연히 닭과 연관이 있고요. 삽은 닭똥을 치울 때 쓰는 거니까 역시 닭과 연관이 있지요.

좌뇌의 대답은 실제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매우 그럴싸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해석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아를 찾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어차피 부질없는 일이다. 저자는 이러한 노력이 덧없음을 누누이 지적해 왔고, 이를 반-자기계발 운동(anti-self-help movement)라 부르고 싶어한다.
오직 좌뇌만이 규칙을 필요로 한다. 에고적 마음에 투자할수록 더 많은 규칙이 필요해지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 점점 피곤해진다. 반면 에고적 마음의 규칙을 줄이면 규칙의 필요성도 함께 감소한다(271쪽).
해석하는 마음,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의 면면은 단순히 본연의 모습이 아닌 척하고 있는 우주일 뿐이고, 대립성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좌뇌는 이 놀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다. 겉으로 보기는 우주의 유순하고 자애로운 드라마와 그 배후에 있는 우주의 장난기 넘치고 악동 같은 본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275쪽).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와 앨런 왓츠(Alan Watts)라는 새로운 인물을 알게 되었다. 다음번 읽을 책을 고를 때 참고해야 되겠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공부를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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