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독서 기록(소설책 2권) - 밈:언어가 사라진 세상, 그 개와 같은 말

일부러라도 소설을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내가 주로 읽는 책은 과학기술, 사회과학, 자기계발 등에 심하게 편중되어서 순수문학에 해당하는 소설은 거의 펼치지 않는다. 어찌보면 등장인물, 복잡한 플롯, 문학적인 묘사 등에 내가 매우 약한지도 모르겠다. 외국 영화 한 편을 보아도 스토리가 헷갈리는데 소설은 오죽하겠는가.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로 메모를 하면서 읽어나가지 않는다면 서로 뒤엉켜서 전개되는 소설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전보다 드라마·영화·소설의 구조가 한층 복잡해진 것도 원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의 얼굴을 개인별로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듯이(외국인이 한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는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 링크),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펼쳐진다. 오로지 상상으로만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는 소설은 이러한 어려움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등장인물이 많고 전개 방식이 복잡하다면 말이다.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원제: Word Exchange)

앨리너 그래이든 지음, 황근하 옮김. 인터넷 광고를 보고 구입하여 단숨에 읽은 책이다. 500 쪽이 약간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인데, 위에서 설명한 나 특유의 어려운 점은 있었지만 긴장감을 놓지 않고 흥미롭게 읽었다. 밈(Meme)은 원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위키백과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 소설책에서 밈은 휴대폰이나 태블릿 PC 같은 최첨단 IT 기계로서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표시하고 인터넷으로도 연결을 하는 장비이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을 하면 저절로 택시가 와서 행선지가 선택되고 계좌로부터 요금을 자동으로 지불해 주는 기계이다. 잔고가 부족하면 이를 알려주고, 식당에 가도 그냥 마음으로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하면 디스플레이에 주문할 음식이 표시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사람들의 언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글을 쓰기는커녕 읽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그러니 어휘 실력이 부족해져서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 '워드 익스체인지'라는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한다. 사용자가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단어들을 뜻과 함께 나열하여 선택하게 하되 단어 몇십개에 몇 센트라는 요금을 받는 것이다. 워드 익스체인지는 궁극적으로 언어를 독점하기를 원한다.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전 편찬회사로부터 판권을 사들여서 오로지 워드 익스체인지를 통해서만 유료 서비스를 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신조어를 만들어서 멋진 뜻을 붙인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경연대회도 주최를 하여 '단어'를 시장화하고 독점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밈의 다음 버전은 이마에 어떤 장치를 부착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제 사람의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유전체 내에 잠들어있던 레트로바이러스 유전자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은 급격히 언어 능력이 상실되는 바이러스 질환에 걸린다...

이것이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허무맹랑한가? 아니, 충분히 있음직한 시나리오이다. 이미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글을 직접 손으로 쓰는 것은 물론 긴 글을 주의깊게 읽는 능력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단지 우리가 얕은 수준으로 읽어넘기는(손가락으로 쓸어넘기는...) 정보의 양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을 뿐, 정말로 깊게 생각하고 유용한 정보를 추려내고 심사숙고하여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이제 이러한 일은 인공지능(AI)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는가? 

얼마 전 힘겹게 마늘 한 접을 다듬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깐 마늘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데, 이 수고를 생각하면 그게 절대 비싼 것이 아니라고. 아는 이렇게 대꾸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직업을 빼앗아가도, 마늘 까기는 절대 자동화가 되기 어려운 일이니 계속 살아남을 직업이라고. 그렇다. 많은 지식에 기초한 엄정한 판단을 요하는 일과, 로봇이 대체 가능한 일을 제외하면 이제 인간에게 남은 일자리는 단순한 일뿐이다.

이 소설의 저자 앨리너 그래이든은 나도 읽었던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참조하였다고 했다. 니콜라스 카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당장 어제 서점에서 니콜라스 카의 2014년 작 <유리 감옥>을 구입하였다(인터뷰 기사).

레이 커즈와일이 내다보았듯이 특이점(singularity)으로 표현되는 미래는 과연 희망적일까? 아니면 이 소설과 니콜라스 카의 예측처럼 걱정스러울까? 우리의 손과 머리를 사용하여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남아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임현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소설가 임현은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하였다. 소설을 좀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서 고른 책이다. <가능한 세계>에서 시작하여 <불가능한 세계>로 끝나는  총 10편의 단편 소설 묶음인데 생각보다 어렵다. 쉽게 말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뒷편의 작품 해설을 살펴보고 다시 한번 읽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래서 나는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

책 뒤의 작품해설은 평론가 임현경이 쓴 것이다. 문학평론가가 이런 글을 쓸 때, 오직 작품을 읽은 것만으로 써 내려가는 것일까, 혹은 작가를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하기도 할까? 기자가 아닌 이상, 후자의 방법을 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면 된다. 작가가 인터뷰 등의 방법을 통해서 자기의 의도를 설명해야 한다면, 작품이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창작하여 전할. 평론가와 독자의 입장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 역시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고 비평적인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일반 독자를 위한 <해설>을 쓰는 것이 문학 평론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작품에 대한 철저한 해설을 위해서 작가를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평론가가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은 일반인이 작품을 읽는 방법과 판이하게 다른 도구를 통해서는 아닐 것 같다.

10편의 작품 중 어느 하나도 편안하고 쉬운 것이 없었다. 시간을 옮겨다니는 이야기 전개(<가능한 세계>), 2인칭 대상에게 이야기하듯 회상하는 구조의 <고두(叩頭)> 등. 작품해설을 보니 특히 <고두>는 문학동네의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1에 수록되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2016년 말 '문단 내 성폭력' 고발(관련 기사 링크)이 시작되기 직전 발표되어 많은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사건은 기성 작가의 성폭력 실태를 피해 여성들이 고발하면서 불거진 일이었다. 그런데 작품 <고두>에서 남교사와 학생의 부적절한 관계가 중요한 관계로 다루어지면서 공방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러한 공방이 독자와 평론가들 사이의 설전으로 끝났는지, 혹은 작가 임현까지 나서서 뭔가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은 '권력'을 가진 기성 작가가 상대적으로 약자인 신인 작가 또는 문학강좌 수강생을 상대로 저지른 불법적인 행동이 피해자의 고발을 통해서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불편한 내용을 가지고서 작가를 고발하고자 함은 아니다. 임현경이 쓴 작품 해설의 일부를 발췌해 본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이야기를 쓰는 짓은 그만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가... 재현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다. 포르노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섹스'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카메라' 앞에서 섹스를 하는지다...이런 소설을 썼다는 건 결국 평소에도 이런 상상을 하다는 것 아니겠냐고 말을 하고 싶은가. 그런 당신은 살인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가 막 당신을 죽일 올 것 같고 그런가.
소설을 읽자. 동시대에 나온 단편 소설을.

주1) 젊은작가상이란 문학동네에서 2010년에 제정한 상으로, 등단 10년 이내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중 일곱 편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것이다. 선정된 작품은 단행본으로 매년 출간된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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