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7일 일요일

약자에 대한 배려란

유소년 시절 나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교과목은 바로 '체육'이었다. 달리기를 잘 못하고 턱걸이를 하나도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공 몇개만 적당히 주고 피구를 하든 축구를 하든 혹은 발야구를 하든 알아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하게 하던 발야구 경기에서는 내 앞으로 뜬공이 날아오는 상황이 늘 공포스러웠고(제대로 잡을 자신이 없었고, 실책을 하면 쏟아지는 친구들의 비난이 견디기 어려웠다), 먼저 출루한 주자는 나중에 달려나온 타자주자보다 먼저 진루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규정인원보다 항상 훨씬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축구같은 경우는 핵심 플레이어들에 묻혀서 어차피 눈에 뜨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개인적인 기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농구같은 것은 아예 참여해 본 일이 없다. 대학 체육 수업 시간에는 맘대로 콘트롤되지 않는 테니스 공 앞에서 또다시 좌절을 겪어야 했다. 나에게 체육 혹은 운동 경기란, 경기 룰에 대한 지식이나 기초적인 운동 실력이 없음을 타인에게 적나라하게 보이고 부끄러움을 겪어야 했던 어두운 추억으로밖에는 남지 않았다.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던 유일한 운동은 성인이 되어서 약 반년간 다녔던 수영 강습과, 약 십여년 전 출퇴근 수단으로 몰두하였던 자전거 타기가 유일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관심을 갖고 연습을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면 되었을 일 아닌가?'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 패러다임과 다르지 않다. '성적이 나빠서 고민이세요? 열심히 해서 성적 올리면 되잖아요? 외로우세요? 나서서 친구들 사귀면 되잖아요? 왜 미래를 고민하세요? 열심히 학점 올리고 스펙 쌓으면 당연히 안정적이고 보수 좋은 대기업에 가게 되지 않나요?' 모든 문제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당연히 달성할 수 있는, 개인의 과제로 돌리는 것이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부제: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에서 비평하는 현실과 똑같다.

지난주에는 딸아이가 올해 입학한 고등학교의 1학년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명회가 있었다. 변하는 입시 제도에 대한 설명과 대전 지역에서 나름대로 이어온 학교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학교의 노력에 대한 다소 상투적인 다짐에 이어서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스쿨의 소개가 있었다. 이 학교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교과는 어학도, 과학도, 수학도 아닌 바로 <체육>이라고 하였다. 뭐라고, 체육? 나에게는 운동 기술이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를 극명하게 줄세우기를 하는 활동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 체육이 어떻게 가장 중점 교과가 된단 말인가? 학교장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체육 활동을 통해서 공정한 규칙 준수를 배우고,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고, 약자를 배려하고, 나아가서는 정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이어진다는.

아하, 그렇구나. 뛰어난 기량을 지닌 몇몇 스타 플레이어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체육 활동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인간됨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하여 체육 활동에 힘을 쓰는 것이었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잠시 낮잠에 빠진 토끼를 그대로 놔두고 경주를 지속하는, 이른바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하는(엄밀히 말하면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가 거북이보다 못한 약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지만) 이른바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남들이 잠시 쉬거나 실수를 할 때 재빨리 달음질치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것 아닌가? 더불어 사는 기쁨보다 이기는 방법만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동안 우리난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나가는 방법을 찾는 것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았을까? 약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같이 나아가는 것 - 그것이 비록 빠른 속도가 아니더라도 -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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