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지식을 얻는 것,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개하며 이를 요청할 수 있는 것,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미치는 것. 이는 모두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가져다 준 “혜택”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최근 읽은 두 권의 책은 이에 대한 매우 상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먼저 마크 W. 셰펴의 <슈퍼커넥터(원제: Return on Influence)>부터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은 소셜 네트워크 혹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이다. 인터넷을 통한 영향력을 지수화하여 서비스하는 회사 Klout를 소개하고, 어떻게 해야 클라우트 지수(소위 ‘소셜 스코어’)를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 굴곡이 많았던 클라우트의 연혁을 보니 아무리 창의적인 사업 아이디어라 하더라도 투자자를 끌어 모으고 본격적인 수익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클라우트 지수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측정 방법을 바꾸었을 때 점수가 순간적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엄청난 항의가 당연히 있었다고 한다. 클라우트는 페이스북 및 트위터를 사용하여 16개 항목으로 구성된 영향력 매트릭스 안에서 고객의 위치를 지정한다고 한다. 구체적인 점수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어떤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 선별자(curator), 활동가(activist), 네트워크 형성자(networker), 애호가(dabbler), 기호 창조자(taste maker), 사고의 리더(thought leader), 권위자(pundit) 및 유명인(celebrity)로 구별되기도 한다. 참고로 클라우트에서는 유명인을 가장 높은 수준의 영향력자로 본다. 물론 언어 장벽 때문에 비영어권 사용자는 클라우트 지수를 얻기가 매우 곤란할 것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에게는 클라우트 지수 자체가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가짜 계정이나 ‘좋아요’ 거래를 통해 얼마든지 소셜 영향력 수치를 조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은 재독 한국인 학자인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이다. 얇지만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은 절대로 아니다(이공계 출신의 얄팍한 인문학 지식이 장애가 되었다). ‘투명함’은 인터넷 기반의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투명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믿음 아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스스로 ‘디지털 통제사회’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투명성은 일종의 폭력이며, 서로를 파놉티콘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본문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개인의 자율성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을 자유를 전제한다. 리처드 세넷은 이렇게 말한다. “자율성은 이해의 평등, 즉 투명한 평등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이해되지 않는 바를 받아들인다는 것, 즉 불투명한 평등을 의미한다.” 게다가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잘 알려진 대로,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
개인적으로는 한병철 교수의 주장에 더욱 공감이 간다. 빅데이터, 정부 3.0... 의도했든 아니든 사람들이 흘리고 다니는 정보에서 더 큰 ‘경제적’ 가치를 발굴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것들이 사회적인 피로감을 높이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한 교수의 다른 저작 <피로사회>를 꼭 한번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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