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다시 만년필을 손에 잡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방치되어 왔던 리브라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더운물에 촉을 담가서 말라붙은 잉크를 녹여내고, 새 카트리지를 끼웠다. 예전 네이버 블로그를 찾아보니 2007년 무렵부터 만년필을 쓰기 시작한 기록이 있다. 난 처음부터 저가형 만년필을 주로 사용해 왔었고, 품질도 가격에 비례하여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부산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유일한 국산 만년필 제조사인 아피스 만년필도 사업을 접은 것 같다. 90년대에 제작된 펌프식 제품인 F-202 재고품이 옥션 등에서 1만원에 팔리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국산품이라는 이유로 처음 선택했던 '자바펜'의 아모레스. 도장이 들뜨고 급기야는 두동강이 나면서 버리게 되었다. 리브라는 도장이 부풀어 올라서 신품으로 교체를 받은 바 있다. 아모레스보다는 약간 더 고급이지만 필기감이 좀 거칠다는 것이 불만이다. 그 사이에 파커 저가품과 일회용인 프레피를 좀 쓰다가 점점 손글씨를 쓰지 않게 되면서 한동안 내 손을 떠나 있었다. 파커 벡터 스탠다드(스텐레스)를 써 본 일도 있는데, 내 손과는 잘 맞지 않았었다. 이 만년필은 나와 2008-2010년 기간 동안 같이 일했던 연구원 한 모 양이 한번 써 보겠다고 빌려갔다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날 리브라 캡에서 고리 모양의 검정색 플라스틱 부속이 빠져나왔다. 매우 두꺼운 반지 모양이라고 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두루마리 휴지 속심을 1/3 정도 잘라낸 모양에 더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다시 끼워 넣으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고,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부속이 빠진 이후로는 캡이 만년필 뒤쪽에 잘 끼워지지 않는다. 리브라 만년필을 취급하는 로고스코리아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서양에서는 만년필 필기시 대부분 뚜껑을 한손에 들고 쓰거나 ,뚜껑을 책상 위에 놓고 약25g 전후의 필압으로 필기를 합니다.

캡을 뒤로 꽂어 쓰면 캡의 무게가 펜에 가중되어 필기선이 굵어지며, 캡속의 플라스틱이 점점 늘어나 캡이 헐거워 질수 있고, 또, 배럴(body/축)에 스크래치가 생겨 라커도장의 수명이 단축될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필기시 캡을 분리하여 사용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만년필이라는 물건이 사실상 내구재나 다름이 없고, 항상 손에 쥐고 쓰는 물건이라서 품질이 좋아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족할 수준의 만년필을 쓰고 싶다면 최소한 6-7만원 이상은 하는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나 역시 자신을 위한 선물로서 조금은 가격이 나가는 만년필을 사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카트리지가 꽤 많이 남아있어서 당분간은 리브라를 써야 되겠다. 피에르 가르댕 브랜드를 구태여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파커 조터도 있는데..

만년필을 오래 쓰려면 가급적 잉크가 마르지 않도록 하루에 반 페이지라도 글을 써야 한다. 정성이 묻어나는 손글씨! 모바일 기기는 점점 스마트해지고 사람들은 게을러지는 요즘, 신년을 맞아 만년필을 조금 더 많이 써 보겠노라고 다짐한다. 남아있는 카트리지를 다 쓰려면 2년은 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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