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요일

다시 찾은 부여의 매력, 부여 왕릉원

부처님오신날 바로 전의 토요일(5/11), 오랜만에 부여를 찾았었다. 구글 포토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방문은 2020년 여름. 주된 목적은 무량사를 처음 가 보는 것이었고 몇 차례 방문했던 국립부여박물관 및 정림사터를 둘러 보기 위해 차를 몰고 부여군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부여 왕릉원으로 향하는 안내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관광지로 개발된 경주와는 달리 백제 문화권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규모가 매우 크고 매우 잘 알려진 경주 대릉원만큼 관광객을 빨아들이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부여 왕릉원 특유의 매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래에 보인 사진 모음은 5월 부여 방문 때 찍은 것이다. 무량사의 문화재는 여기를 참조할 것.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사천왕문을 지키는 지국천왕이 들고 있는 비파는 진짜 기타의 헤드머신을 달고 있다!

극락전 소조 아미타삼존불(보물). 미륵사가 보유한 미륵불 괘불탱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삼존불 뒤에 걸린 것 중에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 따로 잘 보존해 두었을 것이다.

극락전. 겉에서 보면 2층 같지만 내부는 그렇지 않다. 극락전도 보물이고 사진에는 나오지 않은 극락전 바로 앞(즉 사진을 찍는 나의 바로 뒤)에 위치한 오층석탑과 석등도 보물이다.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 원래는 1495년에 세웠던 것이나 현재 보이는 것은 2020년에 새로 만든 것. 생육신의 하나인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21세에 출가하여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가 입적하였다고 한다. 김시습의 초상 역시 보물.

매월당의 시 '가을밤에 달을 보며(中秋夜新月)‘. 원래 두 수로 이루어진 시로서 전체를 알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해 볼 것.

영화배우 유해진 씨를 연상시키는 나한상. 괴로운 표정일까, 긴 번뇌 끝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 표정일까?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립부여박물관 마당의 사비정. 사비라는 지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할 것.

정림사지 오층석탑. 신라를 도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앞에 서면 한동안 말을 잇기 어렵다. 석굴암 본존불처럼 뛰어난 조형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경주 영지 석불처럼 오랜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박하게 만들어진 머리와 보관은 나중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전해진다. 


6월에 접어들면서 기온은 점점 오르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습도는 높지 않아서 적당히 해를 가릴 도구만 있으면 돌아다니기에는 힘들지 않은 좋은 날씨가 이어졌던 오늘, 아내와 함께 부여 왕릉원을 찾았다. 과거에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1963년 사적 제14호로 지정)이라 불렀던 총 세 개의 고분군이 있는데, 그중에서 중앙에 위치한 일곱 기의 고분이 왕릉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부여군은 일제강점기 이후 약 100년 동안 진행된 관련 기록을 집대성하여 2017년에 능산리고분군 조사 기록화사업 보고서 발간한 바 있다(관련 기사 링크).

중앙고분군의 사진. 경주 노서동 일대에서 보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가장 동쪽 아래에 위치한 1호분(동하총). 벽화가 발견되어 백제 회화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철책을 둘러 놓아서 고분 사이를 호젓하게 거닐 수 없음이 아쉽다. 전부 원형 봉토분으로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고분군을 바라보고 왼쪽, 즉 서쪽으로 가면 능사지(능산리사지)와 나성을 만날 수 있다. 능사지는 1990년대 초 백제 금동대향로와 석조사리감이 출토되어 대 히트를 친 역사적 현장이다. 이들은 각각 국보 제287호와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능산리사지는 백제 위덕왕 14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비 천도는 성왕 16년(538)이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능사지쪽으로 향하는데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묘와 묘비가 보인다. 묘비의 명문을 살펴보니 부여융 및 의자왕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이곳에 백제국의 마지막 왕과 그 아들의 묘가 조성될 수 있었을까? 이 조성물의 정식 명칭은 설단(設壇).


백제부여융단비.

백제국의자대왕단비. 왕릉의 비석을 표방하고 있어서 부여융의 그것과는 달리 비신 위에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새긴 개석이 놓였다. 개석에 용이나 이무기가 새겨진 경우 '이수'라고 부른다(참고 자료 링크 - 압해정씨 대종회 부회장께서 쓰신 글).

설단사적기(設壇事蹟記)를 새긴 별도의 비석에 쓰인 글을 옮겨 본다. 휴대폰이 좋아져서 손으로 일일이 베끼지 않아도 알아서 글씨를 인식하여 텍스트로 바꾸어 주었다.

700년의 유구한 백제종묘사직이 무너지고 백제의자왕과 태자융. 그리고 문무백관을 비롯 백성  12,895명이 당나라에 끌려간 치욕적 사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어의 몸으로 이역 만리 당나라 북망산에 깊이 묻히셨으니 그 누가 유택을 찾아 향화를 올렸으리요. 그로부터 백제의 후예들이 백제의자왕 묘 찾기 사업을 펴 1995년 2월에 현지조사를 통하여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1996년 8월 부여군과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시 양 도시간에 문화교류사업을 위한 자매결연을 맺고 1999년 4월 부여융 묘지석 복제품을 기증받았습니다. 2000년 4월에 낙양시 북망산에서 의자왕 영토 반혼제를 올리고 영토를 모셔와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동년 9월 30일에 이곳 부여 능산리 선왕의 능원에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의자왕 및 부여융의 영혼을 위로 하고 깊이 추념코자 단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왕과 부여융을 상하로 모셔 의자왕의 단에는 주실과 전실로 구성된 석실을 마련하고 목관에 영토를 봉안했으며 의자왕의 출신과 품성, 생애 등을 기록한 지석, 설단의 의의와 장지 구입을 기록한 매지권을 매납하여 후세에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여융의 단은 의자왕을 따랐으며 내부에 낙양시에서 기증받은 묘지석 복각품을 매설하였습니다. 우리들 백제후예의 간절한 소망과 정성을 모아 의자왕이 하세하신지 1340여년만에 소부리땅 선왕의 능원에 모셔 영혼을 천추 만세까지 추모하고자 합니다.  2000년 9월 30일  

중국 하남성 박물관에 남아있는 부여융 묘지석의 실제 사진은 2006년 월간조선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자왕은 당에 끌려간 뒤 며칠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의자왕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부여융은 682년까지 살면서 웅진도독부 도독을 하기도 했다. 당나라가 구 백제의 도읍지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행정조직에서 일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과 대립해야 했다니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이 소나무 앞에 헌수비가 세워져 있다. 어떤 사연이?

일본 히라카타시와 나라시에서 심은 헌수.

능사쪽으로 향해 내려가면 벽화를 재현해 놓은 1호분 실물 크기 모형이 위치하고 있다.



서벽(왼쪽)의 백호도와 천장의 연화비운문. 이게 호랑이가 맞나 싶지만 상상 속의 동물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구글에서 '사신도 백호도'를 검색하여 나오는 이미지를 보라.

1호분 모형의 남쪽에 위치한 신암리 고분은 실물로서 직접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잠시 경건한 마음을 갖고 입장해 보았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에 들어갔던 신비한 경험을 떠올리며...

입구쪽에서 내부를 향해 찍은 모습.

마지막으로 능사를 둘러 보았다. 만약 목탑이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은 백제문화단지에서 복원한 목탑을 볼 수 있지만 고증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목탑지.

회랑지에서 바라본 나성. 다음 기회에는 나성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



굿뜨래 음식 특화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오늘의 나들이를 마감하였다. 무용가이자 시인인 이유나 님(기사 링크)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카페 '부여유'를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자개가 박힌 단아한 소반에 커피를 올려놓고 마시는 즐거움이란.




7월이 되면 연꽃이 가득 핀 궁남지를 방문하기 위해 다시 부여를 찾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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