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0일 목요일

손글씨 쪽지로 의도치 않게 남을 설레게 했던 사연

낭만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학술행사(2024 대한의료정보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오늘 있었던 일이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Omnibus Omnia Beyond Healthcare AI'. '옴니버스 옴니아'는 고 정진석 추기경의 사목 목표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한다. 심포지엄이 열린 건물의 이름 또한 옴니버스 파크(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규제혁신추진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던 시절, 디지털 헬스케어의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 문제의 개선에 관심을 갖고 관련 법령과 현장에서 불거지는 문제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산업적 활용과 정보 주체의 사생활 보호라는 서로 상반된 가치를 어떻게 조화롭게 충족할 수 있을까? 분자생물학과 미생물 유전체학 분야에서만 맴돌던 나에게 보건의료데이터의 활용이라는 새로운 주제는 새롭고도 제법 흥미를 끌었다. 2022년 9월에는 <디지털 헬스케어 연합포럼>(Digital Healthcare Alliance Forum, DHAF)에 참석하여 유익한 강연을 들었고, 주제발표를 했던 곽환희 변호사와는 그 후로도 이메일을 주고받은 일이 있다(당시 썼던 글 링크). 포럼 현장에서 서로 명함을 주고 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당시에는 리멤버라는 명함 및 인맥관리 앱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고, 바로 어제까지도 내 휴대폰에는 곽 변호사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그 후로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대한의료정보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내가 발표를 하게 되었다. 원래 다니던 학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연사로 속한 심포지엄 01('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만 끝난 뒤 서둘러 대전으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노력으로 잘 만들어진 파워포인트 자료를 발표하고 그런대로 무난하게 행사를 마쳤다. 

잠시 여유를 갖고 프로그램집을 펼쳐보니 대형언어모델(LLM)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정말 모든 학술 분야에서 높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심포지엄 04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방안: IRB와 DRB의 조화' 심포지엄에서는 규제혁신추진단에서 일하면서 세미나를 위해 초청했었던 서울아산병원의 유소영 교수와 위에서 언급한 곽환희 변호사가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느 방에서 심포지엄이 열리는지 금방 확인이 된다면 인사라도 하고 갈 수 있을 터인데... 아쉬운 마음으로 배낭을 들고 자리를 뜨려는데, 바로 같은 방(옴니버스 파크 컨벤션 홀) 헤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소영 교수가 눈에 뜨였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곳에서 심포지엄 04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새로 바뀐 내 명함을 건네면서 함께 인사를 나누고 중간에 편하게 나갈 수 있도록 뒤쪽의 빈 자리에 앉아서 강연을 들었다. 두 번째 발표인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에서 DRB의 역할'(순천향대학교 양현종 교수)에서는 외부의 요청에 의해 의료데이터를 가명처리한 뒤 제공해야 하는 의료기관 현장의 생생한 어려움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려고 한다. 

이어서 세 번째 발표자인 곽환희 변호사를 소개하는데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가방은 테이블 위에 둔 채 연단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 곽 변호사가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몰랐었구나... 하긴 포럼에서 한번 만나고 그 뒤로는 이메일 교신만 했으니 옆모습 만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반가운 마음으로 수첩을 꺼내서 쪽지 편지를 쓴 다음 내 명함과 함께 가방 위에 올려놓고 발표를 조금 듣다가 대전으로 오기 위해 중간에 자리를 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이틀 동안 대전-부산-서울-대전을 거치는 강행군을 펼치느라 피곤한 상태로 졸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곽 변호사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쪽지 받아서 오랜만에 설레었고 또 반가웠다고. 아, 그렇구나! 잠깐 자리를 비운 뒤 다시 돌아왔더니 누군가가 남긴 쪽지 편지가 남아 있다면 어떤 사연일지 기대를 갖고 열어 보지 않겠는가? 펼쳐 보기 전에는 누가 왜 이런 것을 남겼을지 즐거운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쪽지를 남긴 초로의 '아저씨'로서 그 기대를 여지없이 깬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 사실 문자 답신을 받기 전에는 내 쪽지 편지가 그러한 기대감을 갖게 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고전적이고도 아날로그적인 소통 방식이 오늘같이 무덥고 지치는 초여름 날에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한 에피소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설레었다는 그 리액션이 단지 유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연구 대상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안전한 데이터 제공을 위해 현 제도가 요구하는 IRB 및 DRB는 실제 현장에서 많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저 몇 편의 글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피상적으로만 문제 제기를 하던 나에게 오늘 심포지엄은 매우 유익하였다. 어쩌면 대전으로 돌아오기 위해 아예 듣는 것을 포기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택이 새로운 도전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고, 이 분야에 입문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더욱 좋았다.

셀피 놀이. 넥타이와 연자용 이름표 목줄의 두 색깔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KOBIC에서 (다시) 일하게 되면서 내 업무 스타일의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특히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짧은 글쓰기와 구두 발표를 자주 하게 되었다는 점이 과거와 다르다. 

내가 발표를 했던 옴니버스 파크 컨벤션홀은 정말 넓은 곳이었다. 2022년 완공된 최신식 건물로서 대규모 행사를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넓은 방에서 발표를 해 본 일은 내 기억으로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연자나 패널 입장으로는 약간 불편한 점이 있었다. 상당한 시간 지연을 두고 반향음이 들려서 내가 하는 말을 깨끗하게 알아듣기 어려웠다. 특히 패널 토론에서는 더욱 심했다. 패널들에게 나누어 준 무선 마이크가 행사를 위해 별도로 설치한 앰프 및 스피커로 재생이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플로어의 좌우 벽면에는 몇 대의 메인 스피커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청중을 향해 배치되어 있으니 청중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없지만, 모니터 스피커가 없었기 때문에 연단 위에서 말하는 사람은 메인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반향과 더불어 느껴야만 했다. 이상은 오디오에 민감한 사람의 불평이었다. 학술 행사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모니터 스피커의 필요성을 느끼고 오다니... 이건 거의 직업병이다! 아니, 취미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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