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3일 금요일

논문 심사 후 거절 의견을 보내면서

연구자로서 누구나 논문을 써서 좋은 학술지에 출판하기를 원하지만 리뷰어로서 논문 심사 부탁을 받는 것은 참 성가신 일이다. 분야에 잘 맞는다면 봉사를 한다는 의미에서 심사를 수락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말이다. 내가 힘겹게 작성한 논문이 게재 승인(보통 accept가 되었다고 표현한다)을 받았다는 것은 담당 편집인(editor)과 리뷰어가 뒤에서 숨은 수고를 했다는 뜻이 되니 내가 반대로 리뷰어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되도록이면 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학술지가 따르는 동료 심사(peer review)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주로 메일함을 어지럽히는 것은 리뷰 요청보다는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에서 논문을 금방 실어줄테니 원고를 보내달라는 메일이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이런 수준 이하의 '약탈적' 출판사 혹은 학회의 실상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던 WASET 학회 사태를 통해 이제 잘 알려진 상태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도 2018년 9월 약탈적 부실 학술지 및 학술대회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가이드를 배포하였다.

부실 학술지 및 학술대회 피해 예방 관련 해외자료 소개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다. 오늘 글을 쓰려는 것은 부실 저널이나 학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심사 의뢰를 받은 매우 부실한 국외 논문에 관한 것이다. 리뷰어는 자신이 심사한 논문의 내용에 대해서 기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저자나 논문 내용을 특정할 수 있는 민감한 사항을 제외하고 이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심사 요청을 받은 논문은 어떤 미생물 균주 4건의 유전체 해독 및 분석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이 원고의 영어 수준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대단히 적절치 않음은 잘 알지만, 워드프로세서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맞춤법 검사 기능도 전혀 작동시키지 않은 듯 철자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요즘 출판되는 유전체 논문의 수준에도 한참 못미치는 분석 방법과 해석 방법도 문제였다.

하지만 정작 나의 뚜껑(?)을 열리게 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미생물 균주를 배양하여 유전체 해독을 한 것이 주된 내용의 하나였다. 균주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쓰지 않은 것은 일단 논외로 하자. 당연히 NCBI에 유전체 염기서열을 제출하여 받은 accession number도 원고에 기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구글을 검색해 보니 똑같은 유전체 데이터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논문이 이미 2018년에 다른 저널에 출판되어 있었다. 그 논문을 보면 NCBI에서 genome data를 '입수'하여 분석을 한 것처럼 기술하였다. 균주 배양, DNA 분리, 라이브러리 제작, 시퀀싱 및 어셈블리는 마치 저자들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18년 논문과 이번에 내가 심사한 논문의 저자는 교신 저자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 일치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2018년에 논문에는 어떤 유전자군의 분석 결과를 실었는데, 이번 논문에는 그 유전자군의 한 서브셋을 가지고 또 비슷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내가 보기에 이는 내용상 자기 표절에 가깝다.

두 개의 논문이 별도의 논문으로 존재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NCBI에 유전체 정보를 등록하여 accession number가 발급되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sequencing and annotation에 해당되는 논문이 반드시 시기적으로 먼저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동일 연구자 그룹이 생산하여 등록한 데이터를 마치 공개된 유전체를 입수하여 분석만 한 것처럼 첫번째 논문을 내고, 일년이 지나서 유전체 시퀀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별도로 낸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두 논문의 교신 저자도 같다. 만약 두 논문이 내용적으로 별도의 논문으로 출판되기에 충분히 독립적인 일이라 한다면(균주 세트는 동일하다 해도), 두번째 논문은 첫 논문을 참고문헌으로서 인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번 논문에서 2018년의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결과를 낳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이미 2018년 논문에서 이 세균 균주들의 유전체 해독을 했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2018년 논문에서는 유전체 서열을 NCBI에서 입수해서 썼다고 했고, 유전체 해독은 이번 논문의 주된 결과 중 하나인 것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8년 논문을 누군가 본다면 '어라?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그때 이미 그림을 그렸었네?'하고 눈치를 챌 것이 뻔하다. 저자 역시 2018년 논문에 대해서는 이번 원고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문제의 2018년 논문 URL을 여기에 공개해버리고 싶은 열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리뷰어의 도의상 기밀은 지켜야 하므로 참기로 하였다. 단박에 reject의견을 날렸다. 한국의 학술단체에서 출판하는 논문이라 해서 우습게 알고 이런 수준 이하의 논문을 보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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