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4일 일요일

자정(子正)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늦은 시간, 차를 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식당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식당에는 LED 광고판이 붙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영업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영업시간: 오전 12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아마도 영업주는 낮 12시에 문을 열어서 밤 11시에 닫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 12시는 24시 시간 체계에서 0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광판에 표시된 문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 가게는 밤 12시(자정)에 문을 열어서 하루 종일 영업을 하다가 23 시간째인 밤 11시에 닫습니다'는 말이 된다.

하루를 12시간 단위인 오전과 오후로 나눌 때, 나머지 시각은 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단위의 경계가 되는 12시는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문제가 된다.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에서 한 주의 시작이 무슨 요일인가를 다루면서 이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링크). 이에 의하면 하루에 두 번 있는 12시는 오전이나 오후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낮 12시, 밤 12시'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오전과 오후의 경계가 아니라 하루의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오늘 밤 12시'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오후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난 시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이 시각은 내일(의 시작) 아닌가? '자정'이라는 표현도 '날'과 결합하면 종종 혼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 과제의 온라인 제출 마감은 6월 20일 자정까지입니다.
그러면 6월 20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6월 20일 24시(=21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상식적으로는 6월 20일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난 밤 12시를 의미할 것이지만, 6월 20일 0시가 아니냐는 반론도 나올법 하다. 대법원 판례에서는 24시, 즉 하루가 끝나는 시점을 자정으로 해석한 것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동을 막기 위해 뉴스 등에서는 자정(=오전 12시), 오후 12시(낮 12시)이라는 표현 대신 철저히 24시 체계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자정이라는 낱말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정이라는 낱말이 만들어지고 쓰이던 시절에는 하루가 바뀌는 경계과 자정은 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대단한 결심을 했어. 오늘 자정을 기하여 실행에 옮긴다!
자정을 0시로 정의한다면 이 말은 넌센스가 된다. 이미 0시는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 자정은 하루가 끝나는 밤 12시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딴지를 걸자면 오늘 밤 12시는 이미 내일의 시작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한국 대 멕시코의 경기가 6월 24일 0시에 열렸다. 이를 예고하는 뉴스를 직접 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제(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비록 자연스런 표현이기는 해도 말이다.
오늘 밤 12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우리의 언어 현실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표현이다. 하지만 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내일(24일) 새벽 0시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이 글은 24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작성하고 있다. 이미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는 다 끝난 과거의 사건이 되었는데, 뉴스 앵커는 이 시점에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렸었죠'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오늘 새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자동차 보험을 새로 들었을 때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오늘(6월 24일) 계약을 체결했다면 밤 12시부터이다. 계약서에는 6월 24일 24시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결국은 같은 시간이지만 6월 25일 0시부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휴대폰 시계에서 자정에 날짜가 바뀌는 것을 보라. PM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나면 정확히 다음날 AM 12:00 (혹은 00:00)으로 표시되지 않는가? 시계의 표현 방식을 12시에서 24시 체계로 바꾼다 한들 24:00이 표시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현실 생활에서는 한밤중이라는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지만, 하루의 경계를 이 사이에 심어서 둘로 나누는 것이 불가피하니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어쨌든 자료 조사와 내가 가진 상식을 종합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쓸 것을 제안한다.

  • 12시에는 '오전' '오후'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고 대신 '낮 12시', '밤 12시'라고 한다.
  • '자정'에는 가급적 '날'과 관련된 표현을 붙이지 않는다. 대신 몇일 0시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 오늘 밤 12시는 사실은 내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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