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방구석1열』에서는 두 편의 음악 관련 영화 『샤인』과 『위플래쉬』를 소개하였다. 높은 수준의 음악가를 만들어 내려는 모진 아버지(또는 스승)가 재능 있는 음악가를 계속 밀어붙여서 거의 파멸에 이를 정도의 순간까지 떨어뜨리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에서 철저히 계산된 플레처의 복수를 시원하게 되치는 앤드류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I'll cue you!
드러머인 내가 곡 시작 부분을 알려줄 터이니 지휘자인 당신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플레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화를 내는가 싶더니 너무나 세게 스틱으로 내리쳐서 쓰러지려는 심벌을 바로 잡아 주고 자리로 돌아가 체념을 한 듯 지휘를 재개한다
방구석1열에서 게스트로 나온 장기하는 이 장면을 두 사람이 음악적으로 화해(또는 조화라고 했던가?)를 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고 했다. 줄거리상으로는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복수를 한 것은 맞다. 그리고 앤드류가 더 우월한 위치에서 마지막을 마무리한 것도 맞다. 그러나 우격다짐이 아니라 음악으로 반격을 날렸고 플레처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본다. 이 둘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멋진 음악이었다. 음악가로서의 성취, 대중의 만족.. 이는 모두 음악에서 오는 것이다. 예술가 개인의 삶은 그 뒤에 위치한다.
예술가를 '조련'하는 악역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제자를 극한까지 몰면서 '자, 어디 살아남아 봐!'를 외치는 스승에게 좌절하지 않고 이를 결국 극복하면 위대한 천재 예술가가 1명 나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한 몇 명의 학생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음악계를 떠났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했다(영화에서). 실제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질 것이다.
혹독한 수련 끝에 탄생한 천재 예술가는 인류 전체에게 큰 축복이 된다. 자기 자신의 삶은 기억하기 싫을만큼 철저히 망가졌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와 경쟁하면서 도태된 많은 동료들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기억되는 사람은 천재 예술가 한 명이 전부일 것이다. 예술가의 모진 스승을 일반화시켜 '시련'이라고 하자. 시련이 없이는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기 어려운 것일까? 이런 상황에선는 꼭 영화 『서편제』생각이 난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최근에 읽은 책 『부정성 편향』에서는 무조건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 플레처가 그렇게 경멸하는 말 'Good job!' - 엄격하게 학생을 대할 때 더욱 높은 정도로 성취한다는 여러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더욱 강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불안을 이용해 이득을 꾀하는 '부정성 장사꾼'에게 속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가해지는 부정성의 효과를 잘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행복한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아낌 없는 후원을 받으며 성장하고, 단 몇 시간만에 히트곡을 써내고, 음반과 공연 수입으로 평생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삶을 마감한 행복한 천재 음악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조커가 말하기를 '너는 날 완성시킨다'고 하였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때로는 쉽지 않다. 둘이 뒤엉켜 투쟁을 하면서 그 결과물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남는다. 많은 경우 약하고 선한 사람이 무릎을 꿇는 일이 많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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