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6일 목요일

스포츠 리터러시(sports literacy)

참고: 영어권에서는 복수가 아닌 단수를 써서 sport literacy라고 한다.
"과거 스포츠는 신체활동만 중시했다. 스포츠를 신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과거 개념을 넘어 스포츠를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자질을 통틀어 스포츠 리터러시라고 정의한다. 스포츠 리터러시는 운동능, 운동지, 운동심으로 구성된다... 운동능은 기본적인 동작과 기술을 활용해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재능과 자질이다. 운동지는 운동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인지적 능력과 지성적 자질이다. 운동심은 운동하는 사람이 가지는 다양한 심성적 태도나 마음의 자질을 의미한다." 
지난 2월 2일 스포츠경향에 실린 서울대 최의창 교수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하였다. 기사 원문은 여기(서울대 최의창 교수 "영·유아  체육은 생애체육의 주춧돌...국가가 나서야")에 있다. 이 기사를 읽으니 체육 활동에 대해서는 평생 그늘로 남아 있었던 내 지난 인생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왜 나는 어려서 밖에 나가 땀흘려 뛰어노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였을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또는 다른 길을 갔더라면 더 나은 현재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을 수는 없다. 가령 남들처럼 학위를 마치고 외국으로 포스트닥 연수를 나가지 않은 일, 그리고 다소 경솔하게 택했던 첫 직장(삼개월이나 근무했었을까) 등. 물론 이런 선택을 한 것을 100% 후회하는 것은 아니며, 아직까지도 인생에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프게 후회가 되는 것은 바로 체육 활동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전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체육 수업 시간이란 그저 아이들에게 공 몇개를 나누어 주고 알아서 놀게 하는 것이었다. 운동 경기의 룰에 약하고 경쟁심이 부족했던 나는 어쩌다가 발야구 외야수라도 맡게 되면 그 시간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내 앞에 떨어지는 공을 잡지 못했을 때의 비난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잘 하는 아이 몇몇만이 돋보이는 체육시간은 나에겐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바로 얼마 전, 40년 만에 연락이 닿은 초등학교 동창생은 친구들과 축구하면서 운동장을 뛰어다닌 기억 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운동장은 별로 기억하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80년대가 되어 프로 스포츠가 시작되면서 체육이란 보는 스포츠, 엘리트 육성을 통해 국위선양을 위한 것, 또는 비즈니스라고만 여기는 부정적인 시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형편없는 체력의 소유자로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것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최의창 교수가 소개한 캐나다의 생애 체육 정책은 정말 놀라웠다. 스포츠를 모두가 해야 하는 기본적인 활동, 즉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초 소양의 하나로 정의한 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면서 나이가 들수록 경쟁적으로 운동할 그룹과 즐기면서 할 그룹으로 나누게 된다. 그러다가 노년층이 되면 자연스럽게 즐기는 그룹으로 대부분 옮겨가게 된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운동 또는 체육이라고 하지 말고 '신체 활동'이라고 여기자. 신체 활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신문 기사 하나가 나의 지난 생애 전체를 반추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최의창 교수가 2018년 출간한 책 [스포츠 리터러시]를 소개한 현직 체육 교사의 블로그를 소개한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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