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일요일

2019년 11월 첫 일요일의 네이버 그린팩토리

지난주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오래 네이버 그린팩토리에 오래 앉아있지를 못했었다. 그날은 잡지를 읽는 대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어제까지의 세계>를 가져와서 읽느라 시간을 보냈었다. 오늘은 날씨도 제법 포근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서가에서 몇 권의 잡지를 꺼내와서 읽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잡지들이다.

책('Chaeg'), 채널예스. 그리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책' 10월호에서는 에서는 이란에서 활동하는 멀티미디어 작가 마리얌 피루지(Maryam Firuzi. 웹사이트)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테헤란 거리에서 그녀는 책을 꺼내들고 스스로의 사진을 찍는다. 연극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가득하다. 신디 셔먼을 연상하게 하는 작업이지만 몇 편의 작품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따뜻한 느낌을 풍긴다.




'책'의 <방 안의 코끼리> 코너에서는 요즘 정치·사회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지혜 교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다루었다. 이 책은 최근 경향신문 기사에서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그러면 나도 차별주의자인가? 2007년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2013년에 철회가 되었다는 것은 문제이지만.

[커버스토리] "결정장애" 입에 달고 사는 당신도 차별주의자입니다.

외모나 출신, 말투 등으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카 비슷한 것을 입고 목소리도 자동적으로 기계음으로 변조해 주는 장치를 달고 다니도록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사회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만 하면 키가 차이나는 것이 그대로 보이니 신발 굽 높이를 달리 하여 전부 비슷한 키가 되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클론 군단처럼... 누구나 개성이 있고 취향이 있지만 이것이 차별인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차별인지 모른다'며 스스로를 지나치게 검열하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억압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월간 '책'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대하여 이야기한 네 명의 에디터들도 이 책의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나를 정말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일은, 속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뻔히 느낄 수 있는데 예쁘게 포장된 단어로 차별하지 않는 척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미국 흑인에게 흑인이란 말 대신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얼굴이 검은 것이 치욕스럽다는 전제를 이미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 황인, 흑인이라고 말하지, 그럼 뭐라고 말할까? 그 차이를 말하는게 왜 문제가 될까? - 에디터 지은경 
<포춘코리아> 10월호에서는 미국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RT)에서 지난 8월 19일 새롭게 발표한 (미국)기업의 새로운 소명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기업의 새로운 소명 A New Purpose for the Corporation, 원문 기사 링크; 포준코리아 웹사이트에서는 국문 기사의 링크를 찾을 수 없었음). 1970년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면 그건 이윤을 늘릴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이는 곧 주주들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의미했다. 이 '주주 우선주의(shareholder primacy)'는 기업 활동을 위한 당연한 신조처럼 여겨져 왔으나 이제 시대가 변하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더욱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기존 자본주의는 그 앞을 수식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9년 8월 19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이 발표한 기업 목표에 대한 성명문.
기사를 참조하자면 (주주가 아닌) 고객을 위한 가치 창출, 직원에 대한 투자, 다양성과 포용성 증진, 공급업체들을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대우하기, 소속 지역사회에 대한 지원 및 환경 보호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자유경제원(현 자유기업원)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사회주의 시대로 역행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직 더 배가 고파야 하고, 더 경쟁해야 하며,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서 나머지 인류가 먹고 살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어제도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를 휘둘렀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난드 기리다라다스(Anand Giridharadas)의 인터뷰 기사는 이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다(포춘코리아 기사 링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기업의 CEO들이 저마다 '착한 자본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으나, 선행을 하는 데만 집중할 뿐 해로운 활동을 줄이는 데에는 관심이 적다고 지적한다. 기리다라다스의 화제작 <엘리트 독식 사회>를 읽어 볼 필요가 있겠다.
그(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언론이 페이스북의 데이터 보안 문제를 금방 파악하지 못하면서, 마크 저커버그의 자선 활동에는 관심을 쏟는 모습을 예로 들었다.
좋은 가을이다. 딸아이의 수능 시험이라는 큰 일을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은 자꾸 길어진다.

다른 고민거리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젊음을 선호한다. 중년 이후에 나이를 말하는 것은 자신의 불리함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나이를 묻는 것을 실례로 여기며, 나이에 비해 젊은 건강과 외모는 권력이 된다. 분위기가 칙칙해진다면서 노인들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다. 수도권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복지 혜택에 대해서는 말이 참 많다. 노인은 과거에 집착하며, 시끄럽고, 냄새나며, 질서를 지키지 않고, 공연히 참견을 하는 성가신 사람들로 여겨진다. 심지어 No senior zone 요식업소가 등장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나도 곧 노인이 될 것이다. 건강 상태가 점점 좋아지니 법에서 정의하는 노인의 나이는 현재보다는 조금 더 늦추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노년 인구 비율 증가 속도는 아마 세계 최고일 것이다. 인구 구성 면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에 우리는 이미 접어들었다. 그리고 노인은 과거 어느때보다 더 많은 경제력을 소유한 세대가 되었다. 요즘의 중년은 아직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 부모 세대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 '어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찰스 황태자가 언제 왕위에 오르겠는가? 왕위에 오른다 해도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벗어난 때가 아닐까? 바로 다음 세대로 교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다리를 건너뛰는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멀쩡한 것 같은데, 곧 이것이 무너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 순간이 되면 이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아직 생존해있는 우리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풀기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돋보기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여러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안경을 휴대하는 것을 깜빡 잊고 외출했을 때 아직도 짜증이 난다. 준비성이 없는 나를 탓해야지 짜증을 낼 이유가 없다.

갑자기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고 하자. 내 블로그와 도메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인터넷 서비스가 실명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니, 사망신고와 같은 것을 할 방법이 없다. 그런 상황이 도래했을 때, 내 블로그는 즉시 폐쇄하는 것이 옳은가,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이를 알리고 닫을 것인가? 혹은 충분한 재원이 남아있다면 계속 남겨 놓을 것인가? 인터넷 상에 남긴 자료에 대한 상속 또는 정리 문제를 이제는 생각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이에 대한 고민과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내 블로그의 꾸준한 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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