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9일 월요일

기업의 일본 의존도 심화는 정부주도 R&D 비효율 때문인가?

정부가 주도하는 R&D 프로그램의 효율 문제를 논할 때마다 출연연 근무자의 하나인 나(현재는 기업에서 파견 근무 중)는 항상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미세먼지 등 국가적 이슈가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올 때에도 마찬가지다. 출연연은 그 많은 예산을 가지고 이런 문제에 진작 대처하지 않고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고 늘상 질타를 받는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연구자들은 그동안 연구 지원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위기를 기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쏟는다. 하지만 이 논리를 아주 조금만 뒤집으면 '출연연 무용론'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선진화, 혁신, 효율화, 구조조정, 거버넌스 개편 등 동원할 수 있는 좋은 말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결국 어르고 달래기와 겁주기 사이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있는 말일 뿐이다. '그곳에 투입되는 돈이 아깝다'의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어제 한겨레신문에는 정만기 전 산업자원부 차관(현 한국자동차산업협회 회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는 일본 의존도를 낮추고자 핵심 소재·부품의 국산화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만기 회장은 정부에서 투자하는 R&D 사업의 효율성을 제고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높은 강도의 '뼈 있는' 발언을 하였다.

정만기 전 차관 "매년 20조 R&D 지원 밑빠진 독 물붓기"

쉽게 말하여 엄청난 돈을 매년 쏟아붓고 있으나 국가 R&D의 생산성은 그야말로 바닥이라는 것이다. 연구개발 예산 중 절반 가량이 정부출연연구소와 국공립연구소에 지원되는데, 연구과제를 정부가 결정하므로 시장성이 떨어진다. 명목상으로는 정부 연구과제 성공률이 98%라는데, 실제 사업화까지 성공해야 진짜라는 것이다. 기왕이면 제품이 팔리기 시작하여 연구개발비를 모두 회수하고 이익을 내기 시작하면 비로소 성공한 것으로 평가해 주는 것이 타당하겠다.

한때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 모델을 따서 출연연(전부는 아니고 ETRI, KRICT 등 일부)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기사를 찾아보니 2015년, 박근혜 정권때의 일이었고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기업이 맡긴 위탁과제에서 예산의 1/3이 나오고, 이를 따내야만 연구소가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는 1/3의 추가 예산이 배정된다고 한다. 즉 정부출연금의 비중을 줄이고, 민간과 공공 수탁 연구를 통해 예산을 조달하여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사업화까지 이어나가는 연구를 하자는 것이다. 이 논리는 정만기 회장이 공직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주장해 온 것이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정 회장이 산업부 산업기반실장으로 있을 때 출연연을 프라운호퍼 방식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마련하였으나 실행에 이어지지는 못했다. 영국이 대처 총리 때 출연연을 모두 없애고 대학에 집중지원한 사례도 정 회장이 발표하거나 기고한 글에서 단골 메뉴로 떠오르는데, 그 결과가 정말 바람직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과제 공모에 제출할 발표자료를 만들어 주거나 과제 수주에 도움을 주는 컨설팅 회사가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물론 내 주위에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직 직접 보지를 못했다. 내 경험이나 네트워킹의 폭이 좁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출연연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으로서 과기정통부의 영향력 하에 있고, 약 1년여에 걸쳐서 역할과 책임(R&R) 재정립 작업이 마무리된 상태이다.

과학기술계 출연연 R&R 확정안 보니

그 다음으로 출연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원 조정이다. 그동안은 퇴직자로 인해 인원이 줄거나 신규 과제를 수주한 경우 출연연의 증원 요청이 대부분 받아들여졌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과기정통부, 출연연 정원 조정 착수...'적정 규모 산정해 관리'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 구조조정 본격화 - 출연연별 R&R(역할과 책임) 따른 예산·인력 재편

국가 R&D를 바라보는 시각은 칼자루를 준 주무부처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실제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기를 원하고, 과기정통부는 공공성이 강하고 원천적인 분야를 '연구'하기를 원한다. 요즘은 경제적 파급 효과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어서 과제를 따려는 사람은 구체적인 예측치를 가지고 수치를 만들어 내기에 바쁘다. CRISPR 유전자 가위 기술의 시장 규모를 산출할 수 있을까? 성공하는 사업에서 실제 '과학과 기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견해도 많은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두 가지 일이 겹치면 가장 좋겠지만)을 긍지를 느끼면서 하고 싶다고 주장하면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 하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것이 출연연 사람들의 현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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