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일 토요일

독서 기록 - [슬픈 옥수수]외 다섯 권

이번에는 문화에 대해서 매우 상반적인 시각을 지닌 책 두 권을 같이 읽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평소에 한국어에 대해 느끼고 있었던 나의 생각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2017년 7월 28일 작성 지나친 높임말을 참조하라)



한국어, 문화를 말하다

조현용 지음
문화는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이 있을 뿐이다(제1장 첫 쪽).
'한국어'라는 언어의 단면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룬 책이다. 한국어는 형용사 중심이라는 것(동사와 형용사의 구별이 쉽지 않은 것도 특징임), 반말과 높임말의 발달, 느낌과 감정이 중요한 언어, 고유어화 한자어 및 외래어의 조화, 맥락 중심의 언어라는 특징을 담고 있다. "보면 몰라?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들어?"라는 고맥락 사회에서는 언어란 정보의 최소한을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배우는 입장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문화에는 좋고 나쁨이 아니라 다름이 있을 뿐이라는 첫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번 독후감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나친 반말과 높임말은 자유로운 사상을 잉태하고 표출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순한 문화의 차이, 즉 '다름'이라고 해야 하는가, 혹은 극복해야 할 문화적 문제점인가? 간혹 다른나라 언어에도 높임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손아랫사람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북한 현지의 언어,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의 언어,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 및 중국 출신 교포('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는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의 언어, 그리고 이주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의 한국어 사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주 노동자는 한국어를 알아야 하는가? 과거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중동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아랍어를 배우게 하였었던가? 배우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 사는 한국인들은 한국어를 잊어서는 안되고,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한국어를 반드시 익히며 김치를 먹을 줄 알아야 하고... 이것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 문화경제의 힘

최연구 지음
앞에서는 문화에는 '차이'만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 이 책에서는 미래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문화가 중요함을 주장한다. 사무엘 헌팅턴과 로렌스 해리슨은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가나와 한국의 1960년대 초반 경제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매우 비슷하였는데 30년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비약적 발전이 한국에서는 이루어졌지만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문화'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이 글을 곱씹어 보자. '현재의 가나는 한국보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으니(GNP라는 기준에서) 가나 사람은 한국인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고,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차이가 벌어진 것은 그들의 문화가 한국에 비해서 우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발에 일절 흙을 뭍히지 않고 포장된 길을 자동차로 왕래하고, 한껏 가공이 된 비싼 음식을 먹고, 유럽의 특정 시기에 유행하던 음악을 듣고... 이것을 문화라고 한다면 미래자본주의사회에서는 팔릴 만한 문화를 적극 개발하여 산업화를 위한 성장 동력으로 삼자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기술과 문화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물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기술은 제품화하여 팔릴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전파되는 것이지 그 자체는 팔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도입하면서 부수적으로 어떤 소비행위가 이루어진다면 문화가 팔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전파가 되는가? 수준이 낮은 문화를 누리던 사람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경하여 결국 이를 들여옴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전파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문화에는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고, 좋은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퍼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쁜 문화도 급속하게 파급되는 사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집단 따돌림이나 비속어 사용 등이 그러하다.

가족끼리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인터넷에 무슨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는지, 내 글에 몇명이나 '좋아요'를 눌렀는지를 확인하는 우리의 모습이 휴대폰 및 SNS 소통이라는 '문화'에 아직 노출되지 않은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문화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땅에서는 더 많은 휴대폰이 팔리고 사람들은 이를 구입하고 통신비·소셜 네트워크 플랫폼 사용료를 지불하느라(개별 사용자는 직접적을 돈을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광고료를 내고 있으니 이런 서비스가 돌아가는 것이다) GNP 수치는 더 올라갈 것은 당연하다. 자, 이것이 소위 '성장 동력'이다. 상품화된 문화는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다. 하지만 문화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만들고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킴을 주된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다! 정의에 따르면 문화에 목적이 있을 이유가 없다. 문화에 고급이니 저급이니 하는 가치 기준을 씌우고 제품화 하려는 자본주의적 시각에서는 더 좋은 문화(상품화가 가능한)가 유리해 보일 뿐이다.

쓰다보니 이 책을 비판하는 쪽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지 못한 순진한 시민인가보다. 

슬픈 옥수수(우리의 음식, 땅, 미래에 대한 위협 GMO)

케이틀린 셰털리 지음|김은영 옮김
나처럼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GMO(유전자변형생물체 혹은 농산물)을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부담감을 늘 느낀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GMO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를 부르짖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어린 아들과 자기에게 나타난 원인 미상의 증세들 - 호흡 정지 증후군, 습진, 안면 발진, 낫지 않는 코감기, 과민성 대장 증후군, 손의 통증 - 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결국은 식품 산업에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GM 옥수수가 원인임을 알아내었다. 그녀는 농업인, 전 몬산토 연구자, 학계 종사자, 유럽의 양봉인 등 여러 사람을 직접 만나 심층적인 인터뷰를 하면서 GM 작물이 어떻게 환경을 황폐화하고 건강에 안좋은 영향을 미치며 가난한 농업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밝혔다.

유전자 변형 기술은 생명공학자에게는 벗어나기 어려운 '유혹'이다. 유전 가능한 생물체의 본질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조물주의 영역에 접근한다는 성취감 비슷한 것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만 한다면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목표의식도 주어진다. 그리고 GM 작물의 위험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유포된다는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살충 단백질 결정인 Bt 독소(Cry protein)를 만들어내는 옥수수를 생각해 보자. 원칙적으로는 Bt 독소는 잎에서만 발현되어 이를 갉아먹는 해충만을 선별적으로 죽여야 한다. 그러나 유전자 발현 기구는 on-off가 완벽한 것이 아니다. 낱알에서 소량 발현된 Bt 독소는 인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혹자는 소수의 사람이 계란이나 벌독에 알레르기를 보이듯이, 대다수의 사람은 Bt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일부 과민한 사람은 Bt 옥수수로 만들어진 식품만 피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눈으로 보아서 알아볼 수 있는 옥수수를 식재료에서 제외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종류의 식품, 심지어는 아세트이미노펜(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의 약효 성분이다)과 종이컵 코팅 등에도 옥수수 추출물이 들어있다. 원재료로서 옥수수 추출물 성분을 쓰지 않은 식품·약품·생활용품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GMO가 해로울지도 모르기에 두려워한다. 실제로 GMO 자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지는 않으며,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과민한 반응(이는 종종 치명적일 수도 있다)을 유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 과민한 사람이 GMO를 피할 방법이 별로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공업화된 모든 제품에 성분표가 제대로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 해도 GMO가 들어있지 않은 제품을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다는 것이다. GMO를 허용함으로 인해서 얻는 경제적 이득이 일부 과민한 사람이 접할 위험에 비해서 현저하게 높으니 전면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면? 이건 경제만을 생각하는 전체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GMO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은 GMO가 내포한 기술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어쩌면 이를 퍼뜨림으로 인해여 이득을 얻는 자본의 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GMO가 아니면 현재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식량을 도저히 생산할 수 없는가? 보조금에 힘입어 생태 다양성을 해쳐가며 한 가지 작물만을 심는 기업형 농업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 GMO를 판매하려는 거대 자본은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연구 결과를 내는 과학자들을 탄압하고 있지는 않는가? 과학자들의 주도하여 좋은 의도로 만들어지는 GM 작물도 물론 존재함을 알아두자(예: 비타민 A를 생산하는 golden rice).

이 책의 두번째 파트는 벌에 관한 것이다. 벌이 없으면 농업도 존재하지 못한다. 최근 들어서 벌이 갑작스럽게 떼죽음을 하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어쩌면 GM 작물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래 Bt 독소는 특정 곤충에만 독소로 작용하는데, 벌이 흡수한 Bt 독소가 장 내벽 조직에 영향을 주어서 다른 곰팡이나 세균에 취약하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다. 

벌꿀이 GM 식품인가? 벌 자체가 GMO가 아니므로 벌꿀에 이와 관한 규정을 지키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벌은 벌꿀의 '주요' 원료가 아니다. 벌은 꿀을 먹었다가 토해내서 저장하므로 벌의 몸에서 유래한 성분이나 생화학적 작용이 약간은 개입할 것이다. 그러나 주성분은 당연히 꽃의 꿀이고, 벌이 GMO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꿀을 채집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이렇게 만들어지는 벌꿀 역시 GMO와 관련된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UC 버클리의 미생물 생태학 및 균학 교수인 Ignacio Chapela(1959~, 링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멕시코 오악사카 고원의 옥수수에 미국의 GMO 유래 유전자가 유입되었음을 밝힌 논문을 2001년 Nature에 발표하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GMO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GMO 찬성론자들은 차펠라의 연구가 잘못되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게다가 차펠라는 거대 생명공학 기업인 노바티스와 대학 간에 맺은 계약 - 대학의 연구 결과를 누구보다 먼저 접근하여 권리를 가져가는 대신 거액을 기부하는 5년짜리 계약 - 을 반대하면서 종신 재직권(tenure)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를 확인해 보니 이러한 차펠라의 이야기는 독일에서 Scientist Under Attack: Genetic Engineering in the Magnetic Field of Mone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서 과제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를 했더니 무조건적인 GMO 반대론자의 선동적이고 비이성적인 운동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학자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실제 학술 자료에 근거하여 좀 더 알아볼 생각이다.

2018년 3월 5일에 추가한 글 [BRIC 바이오토픽] GMO, 정말 괜찮을까? 링크 이탈리아 연구진은 1996-2016년 발표된 유전자변형 옥수수에 관한 peer-review 논문 6,006편에 대하여 메타분석을 시도한 결과 유전자변홍 옥수수는 생산성이 증대되었으며 곰팡이 유래 독소의 함유량도 적다는 결론을 내려 이를 Scientific Reports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저자들의 기준을 통과하여 분석에 쓰인 논문은 한 논문은 6,006편 중에서 76편에 불과하였다. 또한 다른 선행연구에서는 GM 작물이 수확량을 증가시키지 않는다고 보고하였으며, 2016년 뉴욕타임즈에도 이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실은 바 있다고 한다. 보다 엄격한 해석이 필요한 연구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숙한 시민을 위한 교양 수업)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짜우포충 지음|남혜선 옮김
이 책의 원제는 <정치적 도덕>이다. 배신과 협잡이 횡행하는 정치적 현실을 생각한다면 정치가 도덕과는 원래 관계가 있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이상적인 정치 - 즉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평등한 지위를 갖는 자주적인 개체로 보고 이런 바탕 위에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 제도를 만드는 - 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독재체제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liberty)에 대하여 정통적이지 못한 시각이 팽배해 있다. 저자 짜우포충은 홍콩중문대학의 정치철학과 교수인데, 홍콩의 민주화 시위인 우산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과의 온라인 토론에서 일부는 현 시민의 수준으로 볼 때 혼란이 초래될지도 모르니 지나친 자유·권리를 아직은 보장할 시기가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짜우포충은 이를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모든 시민은 국가에 공정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 시민은 불복할 수 있다. 국가라는 제도가 어떻게 하여 국민의 생활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는 강제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정당성은 오로지 도덕적 이유, 즉 모든 시민이 성찰을 거쳐서 합리적으로 승인한 것에서 기인한다.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의 저작을 읽어봐야 되겠다.

오늘은 독후감이 좀 길어지고 있다. 여기까지 쓰느라 다소 지쳐서 나머지 두 권에 대한 독서 기록은 원하는 분량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 지음
가정 폭력 생존자인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만나보자. 마지막 연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정에서 남편의 폭력에 고통받는 아내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페미니즘 입문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아직까지는...?)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 가정의 현 주소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온도

김병수 지음
이 책은 인터넷 교보문고의 <자기계발> 카테고리에 들어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정신건강의학 및 심리학 범주의 책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강박적 태도를 많이 갖고 있다고 본다. 감정을 올바로 느끼고 이를 제대로 표현하며,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감정의 온도를 올림으로써 자존감을 높여나가는 방법을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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