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요일

부부는 닮는다는 가설을 입증하다

이 가설은 꽤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비슷한 생활환경을 공유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 취향 등등이 어느 한 점으로 수렴하는 수렴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다. 우리 부부도 이러한 말을 꽤 많이 드는 편이다. 물론 얼룩말의 줄무늬에서 보듯이 극명하게 다른 두 색깔이 한데 만나서 최고의 조화와 기능을 만들어내는 사례도 있다. 사실 얼룩말 줄무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금 서울공예박물관(SeMoCA)에서는 한국-오스트리아 현대장신구 교류전인 '장식 너머 발언'이라는 기획 전시가 진행 중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품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대 장신구의 도발적이고도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시공간 내에서는 관람객의 전신 사진을 찍어서 전시물 중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신구를 선정, 포스터를 만들어 주는 체험 행사도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아내가 두 번을 촬영해 보았는데 전부 유사한 분위기의 장신구를 제안해 주었다. 스크린에서는 스캔 밎 작업 중인 모습부터 최종 포스터까지를 만들어 보여 주었는데, 마지막에는 결과물 원본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QR 코드까지 보여 주었다.

마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장신구를 추천하였다.

두 번째 시도의 결과물도 유사하다. 


호기심이 당겨서 나도 촬영을 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가 첫 번째 촬영을 했을 때 제시한 것과 같은 장신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알고리즘이 촬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신구를 제시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구가 닮는다는 명제가 참임을 어느 정도는 증명하는 결과라고 하겠다.



큰 키의 마른 체형을 가진 외국인 여성 관람객이 사진을 찍고 나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흥미롭게 지켜 보았다. 정육면체 모양의 장신구가 제시되었고, 관람객과 그 동행자는 무슨 박스가 나왔다면서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장신구 - 의복/신발 - 타투 - 화장. 기능과 더불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러 가지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평소에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메시지 자체, 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일상적이지 않아서 차별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타투를 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별다른 의견을 갖고 있지만 않지만, 쉽게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정말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발을 갈아 신거나 화장을 지우듯이 쉽게 원상복구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논문과 연구노트 사이

우연히 접한 어떤 사건으로부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강력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끼고 둘 사이를 아우르는 '그 무엇인가'를 좀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 조사를 하고 궁리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서울대 전주홍 교수의 연구윤리 특강(관련 글 링크)과 거의 20년 전의 연구노트를 들추어서 대장균 B 균주의 유전체 해독 스토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그렇다. 

전주홍의 책 <과학하는 마음>. 출장길까지 따라온 좋은 동반자가 되었다.

과학이란 연구 현장에서 복잡하게 뒤엉킨 상태로 존재하는 온갖 가설과 연구 결과, 동료 과학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 중 취할 만한 것을 우리가 '과학'이라 믿는 사고 체계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결론 중 하나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다른 활동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예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꽤 오랜 기간 동안의 바깥 활동(기업 연구소와 정부 파견)을 거쳐서 연구소로 돌아와 관리자의 입장이 된 지금은 개인 차원의 연구 활동을 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K-BDS에 등록할 '유물' 수준의 데이터를 정리하기 위해 예전에 작성한 연구노트를 다시 들추어 보면서 당시 열심히 몰두했던 업무가 과연 올바른 자세와 방법을 통한 것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K-BDS에 등록한 바이오프로젝트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부 올해 등록한 것이다.

내가 K-BDS에 등록하려는 것은 논문을 내기 위해 GenBank에 등록했던 최종 자료(이것은 이미 전 세계에 공개된 것이니 재등록할 필요가 없다)와 sequencing raw data 사이를 잇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물론 일차적인 목표는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서버 속 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만 머물러 있던 raw data에 적당한 설명 문서를 달아서 등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Sanger나 454 등 구식 시퀀싱 기술에 관심이 있는 그 누군가가 이를 다운로드하여 이리저리 조립하고 뜯어 보면서 '아, 과거에는 이런 방식으로 유전체 연구를 했구나'하고 체험해 보기를 기대한다. 즉 내가 등록하는 자료가 일종의 유전체 박물관의 전시품 또는 소장품 역할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Raw data 등록과 더불어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raw data를 매만져서 논문 발표를 하기 위한 최종 성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야기'와 중간 결과물도 등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전 연구 노트를 살펴 보고는 있으나, 그 때에는 꽤 자세하게 서술식으로 기록을 하였지만 이제 와서 다시 이를 참조하여 줄거리를 만들어 보려니 쉽지가 않다. 연구 노트 역시 일종의 날 것으로서 정리가 필요한 자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줄거리가 잘 쓰여지지 않는 답답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할 업무도 많은데 괜한 데 너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KOBIC에 다시 합류하지 않고('다시'라는 표현을 쓴 것은 2013년 2월부터 23개월 동안 여기에서 일한 적이 있기 떄문이다) 예전의 연구조직으로 돌아갔다면 연구 데이터 등록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일에 대한 의미를 찾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면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사무용 컴퓨터의 폴더를 뒤져 보았다. 혹시 당시에 랩 세미나를 하면서 몇 달 간격으로 업무 진척 상황을 정리한 발표 문서를 발견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렇다! 보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미나 발표용 문서뿐만 아니라 논문과 연구노트 사이를 채울 단계별로 정리된 문서가 사무용 컴퓨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보물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전체 주석화 및 oligo chip 설명 자료와 같이 연구 커뮤니티에 배포하기 위해 만든 소중한 문서가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메일까지 되살릴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웃룩 또는 모질라 썬더버드의 데이터 파일을 주기적으로 백업하여 보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감사나 수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수준으로까지 조사를 하려면, 과거에 이 연구를 하는데 쓴 시간 혹은 그 이상을 지금 다시 들여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렇게까지 과거에 매몰되어 일을 할 수는 없다.

뒤늦게 찾은 이 문서를 보면서 나 혼자만 연구에 몰두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과학이란 동료 간의 자연스런 교류와 치열한 토론의 결과여야 하는데, 연구노트를 보면 마치 독백을 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를 중간 정리하여 주변에 나누고 다시 피드백을 받은 과정이 남은 다른 문서를 뜻하지 않게 발견하게 되어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런 거 뭐하러 등록해요?'

아직도 이런 비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새롭게 등장한 분석 장비나 기술(특히 인공지능)을 잘 받아들여서 발전과 혁신을 잘 이룬 연구자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이들로부터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아직 나는 이를 반박할 누를 완벽한 논리를 개발하거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나 자신을 무장하지 못하였다. 사이드 뷰 미러나 백미러만를 보면서 차를 앞으로 가도록 운전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마주쳤다가 뒤로 지나가 버린 위험한 찰나를 백미러로 주시하면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만약 그러했다면 그 직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값진 참고 사항을 얻을 수 있다.

즉 과학적 혁신은 개별 아이디어에 익숙하고 다른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후속 세대 과학자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말이다. 

1946년 이후 발표된 의생명과학 분야의 논문을 분석해 보니, 실제 젊은 과학자들이 훨씬 더 혁신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기서 젊음의 기준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연구에 종사해 온 경력 나이(career age)를 말한다. 경력이 쌓일수록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반한 연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줄어든다는 분석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고, 젊은 과학자 입장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과학자와의 협업이 중요하다.

이상은 <과학하는 마음> 115~116쪽에 있는 내용을 일부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 데이터라는 건조한 용어를 쓰는 대신 경험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하면 된다. 7월엔에는 대장균 B와 W strain의 연구 경험을 문서로 정리하여 등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과학은 반드시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화요일,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윤리교육이 있었다. 'ChatGPT와 연구윤리'라는 제목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초교실의 전주홍 교수(랩 홈페이지)가 강연을 하였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기 때문에 구글에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김박사넷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줄평에 대해서 전 교수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김박사넷'이 예비 대학원생에게 얼마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연구윤리교육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ChatGPT를 이용하여 무성의하게 논문을 쓰고, 심지어 논문 심사까지도 여기에 맡기는 작금의 실태는 비판적으로 볼 만하다. ChatGPT에게 학습된 데이터를 이용하여 어떤 주제에 대한 간단한 글을 쓰게 한다거나, 또는 영문 번역 및 다듬기('윤문'이라고 함)를 시키는 것은 연구윤리 또는 연구진실성 관점에서 금지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ChatGPT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한 곳에 치우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사람에 의한 최종 점검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정말 성의의 문제이다. 

"저는 2021년까지 공개된 데이터로 학습을 했기 때문에 최신 자료에 근거한 정확한 설명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논문 한복판에 이런 문장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이는 실제 사례였다. 전 교수는 ChatGPT가 쏟아낸 텍스트를 그대로 긁어다가 논문으로 투고하고, 심지어 리뷰어조차 이를 걸러내지 못한 채 정식 출판이 되어서 공개되는 어이가 없는 사례를 여럿 소개하였다. 그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으며, 이와 같이 AI가 써 준 부실 논문이 점차 증가하여 2023년 한 해에 무려 1만 건의 논문이 철회되는 대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특히 약탈적 저널이 많아지면서 전 세계적인 논문의 투고량이 급증하고(이쯤 되면 유통량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 그 틈을 타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아주 부실하게 만든 논문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출판사는 게재료를 받아서 좋고, 논문 저자는 성과로 인정받으니 좋지 아니한가? 

More than 10,000 research papers were retracted in 2023 - a new record (Nature 2023년 12월 12일)

논문이란 결국 과학 연구를 마무리하여 전문가 집단에게 인정을 받는 행위이다. 그런데 AI와 같이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과학을 하는 방법 자체가 변하고 있다. 소위 키트화-분업화-협업화-외주화-대규모화를 핵심 인자로 하는 'rapid science'를 추구하게 되면서 우리는 데이터를 사 오는 연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Rapid science 시대.


실험 설계를 하고 생물학적 시료를 모아서 회사에 전달한 뒤 연구비를 이용하여 분석 비용을 지불하고 데이터를 받아 오는 것으로(심지어 데이터 분석과 도표 작성, 더 심하게는 논문의 상당 부분을 써 주기도 함)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살지 않는가? 바로 이전 글 '20년은 역사를 논하기에는 긴 기간이 아니다'를 쓰면서 2009년 논문으로 발표된 대장균 BL21(DE3)의 유전체 해독은 누가 한 일로 보아야 하는지 심각한 철학적 고민을 해 보았다. 분명히 모든 실험 자료(크로마토그램, SFF file 등)를 가져다가 나름대로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서열 단편을 조립하고 finishing read를 이어 붙여서 하나의 원형 염색체를 만들고, 이를 K-12의 유전체와 손과 눈으로 하나씩 비교하다시피 분석하면서 도표를 만든 것은 내가 맞는데, 그런 이유로 인해 이 일에 대한 공이 전적으로 나에게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즘 과학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업화가 되지 않았던가.

강연 후반부는 주로 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나는 여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 '과학'이라면 무엇을 떠올리는가? 객관성, 논리,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 실험 결과에 의한 가설의 변경 및 이를 수용하는 개방적인 자세 등. 그러나 우리가 논문을 써 나가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자. 논문은 겉보기에 매우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스토리가 있다. 어떤 계기로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설을 세우며, 실험을 거쳐서 이를 입증하는 등 전체적인 과정이 매우 잘 설계된 선형적 경로를 따라서 순조롭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경우 논문의 작성 과정에서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했었다. 우연과 직관을 통해 얻어낸, 복잡한 그물과 같은 구조를 통해 도출된 결과 중 적당한 스토리 라인 과 잘 어울리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그럴싸하게 재배치하는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전주홍 교수의 저서인 과학하는 마음(2021)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솔직하게 소개하였다고 한다. 발표 슬라이드에서 딴 글귀를 옮겨 보겠다.

재구성된 결과로서의 과학. "과학은 무수히 많고 흥미롭지 않은 사실의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만족스러운 패턴으로 정리하려는 우리 마음의 시도입니다." - 시릴 힌셜우드(1956년 노벨 화학상)

실제 연구와 논문에 제시된 연구 사이의 간극. "논문은 과학적 발견에 이르는 사고의 과정을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 피터 메다와(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

선형적이지도 정형적이지도 않은 과학 연구. "과학은 내가 직관적으로 알아낸 어떤 것을 과학의 틀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 바바라 매클린톡(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

브루노 라투르는 1975년부터 로저 기유맹(77 노벨 생리의학상)의 실험실에서 직접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실험에 참여한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보다 그들이 벌인 치열한 논쟁과 타협, 그리고 합의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포착했다.

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더 상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전주홍 교수의 책을 쿠팡에서 주문하였다. 전 교수는 먼 대전까지 와서 강연을 한 목적의 최소한 2%는 달성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20년은 역사를 논하기에는 긴 기간이 아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내가 경험한 일, 혹은 내가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해 온 일. 그 어느 것도 역사라는 측면에서 논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20년 전이라는 과거는 충분히 오래 전도 아니고, 20년이라는 기간은 대단한 경험과 실력을 축적할 만큼 긴 세월도 아니다.

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K-BDS)에 꾸역꾸역 밀어 넣을 과거 연구 자료를 정리하면서 설명문을 작성하는 것이 큰 일이 되고 있다. 단지 컴퓨터에 남은 자료 자체나 기억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전에 근무하던 사무실에서 총 11권의 수기 연구 노트를 들고 왔다. 작성 일자는 2003년 1월 29일부터 2007년 10월 22일까지였다. 연구 노트 관리 제도가 시행된 후부터는 과제 번호가 찍힌 노트를 수령하여 작성한 뒤, 과제 종료 후에는 제출을 해는 것이 의무가 되어서 더 이상 보유하지 못하였다. 전자 연구 노트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등록 데이터의 유형 또한 '기타'로 한정해야 한다는 점이 K-BDS에 다소 미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Sequencing raw data file, sequence with annotation... 이러한 방식으로 정해진 양식(예: sequence reads, array, 일반적인 서열 자료, proteomics, metabolocis, 화합물, 이미지, 전임상)을 써서는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등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ZenodoFigshare와 같이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료를 등록할 수 있는 리포지토리를 매우 좋아한다. 

2003년 1월부터 손으로 쓴 열 권의 연구 노트. 관리 시스템이 적용되기 전에 쓴 것이라서 연구소에 공식 제출도 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글씨는 내 평생의 콤플렉스이다. 

나는 연구 노트를 마치 일기를 쓰듯 상세하게 문장으로 풀어서 쓰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량은 많아지지만 나중에 다시 들추어 보았을 때 이해하기가 쉽다. 요즘은 대장균 BL21(DE3)의 유전체 해독 자료를 정리하는 중인데, 지금까지 수행한 어떤 유전체 프로젝트보다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과거의 연구 노트를 들추어 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논문(J. Mol. Biol. 2009, PubMed)의 Materials and Methods 섹션에서는 워낙 개략적으로 작성을 해 놓아서 이것만 참조해서는 컴퓨터의 자료를 정리하여 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에 그대로 넣기가 어렵다. 단순하게 'sequencing raw data file'이라고 해 버리면 아주 무책임하고도 쉽게 등록할 수 있지만, 기록이 본능인 '나'라는 동물은 그게 잘 허락되지 않는다.

먼저 대장균 REL606의 closed chromosome sequence가 기반이 되었다. REL606은 미국 미시간 주립대의 리처드 렌스키 교수가 1988년부터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long-term experimental evolution 연구의 첫 세대에 해당하는 균주이다. 50 ml 삼각플라스크에 10 ml의 액체 배지를 담고 REL606을 접종하여 배양한다. 솜으로 만든 마개도 아닌, 작은 비커를 뒤집어 씌운 것이 뚜껑에 해당한다. 이것 수십 개가 shaking incubator에서 돌아간다고 상상해 보라. 유리 '뚜껑'이 플라스크에 부딛히는 소리가 꽤 시끄럽다.

다음날 같은 시각에 1%(V/V)를 취하여 새 배지로 옮겨 접종한다. 이렇게 하면 하루에 약 6.64 세대가 지나는 것에 해당한다. 매일같이 계대배양을 하여 1천 세대, 2천 세대... 그리하여 2010년에는 5만 세대가 되었다. 물론 플라스크는 패러랠하게 여러 개를 사용한다. 그러면 각 용기 안에서는 나름대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 진다. 

원 균주와 진화를 거친 균주의 fitness는 어떻게 비교할까? 이미 멸종한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을 서로 싸움을 시켜서 누가 더 힘이 센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생물은 조상님을 냉동고에 잘 보존했다가 다시 꺼내 녹이면 그대로 살아난다. 아라비노스 이용능 유전자를 표지로 삼았기 때문에 동일 agar plate에서 조상(님)과 현 세대의 균주를 같이 깔아서 색깔에 따른 콜로니를 각각 세어서 직접적인 fitness 비교가 가능하다.

원래 KRIBB에서는 렌스키 교수와 교류를 통해서 직접 균주를 받아서 유전체 해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 균주가 프랑스 Genoscope(National Center of Sequencing)로 전파되어 그곳에서 상당한 진도로 유전체 해독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과제 책임자였던 김지현 교수(현 연세대학교)께서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관련 연구자들을 모두 만났고, REL606 균주의 유전체 해독 마무리는 Genoscope에서 완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염기서열을 받아서 수작업으로 annotation을 실시하여 GenBank에 등록하였었다.

REL606의 유전체 염기서열은 BL21(DE3) 유전체 프로젝트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이것을 reference로 하여 지금은 잊혀진 기술인 NimbleGen의 comparative genome sequencing(CGS, chip-based)을 수행하였고, Roche/454 pyrosequencing(이것 역시 잊혀진 기술)으로 assembly도 같이 진행하였다. 이 결과를 종합하여 107개의 high quality contig를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fosmid library의 end sequencing 결과를 그 위에 얹어서 scaffold를 구성한 뒤, 남은 gap을 메꾸어서 완성된 염기서열을 얻었다. BL21(DE3)의 유전체 해독을 위해 컴퓨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업은 내가 하였다. 모두 열심히 노력한 결과 2009년의 J. Mol. Biol. 논문에는 이 두 가지의 대장균 B strain에 대한 유전체 해독 및 분석 결과가 같이 실렸다. 그 후에 engineered phage인 DE3를 갖고 있지 않은 BL21(Takara에서 구입)의 유전체 해독도 실시하여 짤막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PubMed).

NimbleGen에 CGS 서비스를 맡기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REL606의 유전체 염기서열은 'minor revision'을 거쳤다. 그래서 SNP가 확인된 위치를 수 bp 바꾸어야 했었다. 또한 GS 20으로 만든 데이터로는 de novo assembly와 reference-based assembly를 같이 수행하여 서로를 비교한 뒤 불일치한 부분은 PCR/Sanger sequencing으로 확인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를 설명 문서로 재작성한 뒤 당시에 사용했던 복잡한 ace file을 포함한 데이터 파일과 함께 K-BDS에 제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거의 20년 전에 기록한 연구 노트를 다시 찾아보는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 아니,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2006년의 노트를 뒤적거리면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쓰면서도 이런 의문이 계속 남는다.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고민을 해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경주의 어느 유적지에서 열심히 흙을 파는 문화재(요즘은 '국가유산'이라 부른다) 발굴단원의 심정도 나와 비슷할지 모른다. 아니다! 발굴단원은 훨씬 분명한 자부심과 목표 의식을 가지고 땅을 파면서 유물을 수습하고 있을 것이다.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자.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은 명백하고도 관찰 가능한 실체와 사실이 아니다. 인지 활동을 통해 뇌에서 재구성되는 믿음이 세상의 실체일 것이다.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세포들이 도파민에 젖어 있는 상태 아닌가? 세상은 뇌에서 재구성한 그 '무엇'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심지어 정의감까지!)은 호르몬이 지배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파란 약이 만들어 주는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연구 노트 사진으로 시작한 글이 영 이상한 결말로 끝났다.


2024년 7월 1일 업데이트

추억의 이미지를 하나 소개한다. 대장균 K-12와 B strain의 유전자 발현에 같이 쓸 수 있게 만든 microarray(GPL7395) 제작 후 시험적으로 생산한 파일이다. 프로브 설계를 위한 기본 데이터는 21C 프론티어 미생물유전체활용기술개발사업단에서 제공하였고 칩 제작 및 실험은 디지털지노믹스에서 수행하였다. 


꽤 많은 칩을 제작하여 커뮤니티에 배포하였었는데 정작 GEO에 등록된 것은 현 건국대학교 윤성호 교수와 내가 관여한 것 30 샘플이 전부다. 데이터는 다 어디로 갔는가?

2024년 6월 20일 목요일

손글씨 쪽지로 의도치 않게 남을 설레게 했던 사연

낭만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학술행사(2024 대한의료정보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오늘 있었던 일이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Omnibus Omnia Beyond Healthcare AI'. '옴니버스 옴니아'는 고 정진석 추기경의 사목 목표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한다. 심포지엄이 열린 건물의 이름 또한 옴니버스 파크(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규제혁신추진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던 시절, 디지털 헬스케어의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 문제의 개선에 관심을 갖고 관련 법령과 현장에서 불거지는 문제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산업적 활용과 정보 주체의 사생활 보호라는 서로 상반된 가치를 어떻게 조화롭게 충족할 수 있을까? 분자생물학과 미생물 유전체학 분야에서만 맴돌던 나에게 보건의료데이터의 활용이라는 새로운 주제는 새롭고도 제법 흥미를 끌었다. 2022년 9월에는 <디지털 헬스케어 연합포럼>(Digital Healthcare Alliance Forum, DHAF)에 참석하여 유익한 강연을 들었고, 주제발표를 했던 곽환희 변호사와는 그 후로도 이메일을 주고받은 일이 있다(당시 썼던 글 링크). 포럼 현장에서 서로 명함을 주고 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당시에는 리멤버라는 명함 및 인맥관리 앱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고, 바로 어제까지도 내 휴대폰에는 곽 변호사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그 후로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대한의료정보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내가 발표를 하게 되었다. 원래 다니던 학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연사로 속한 심포지엄 01('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만 끝난 뒤 서둘러 대전으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노력으로 잘 만들어진 파워포인트 자료를 발표하고 그런대로 무난하게 행사를 마쳤다. 

잠시 여유를 갖고 프로그램집을 펼쳐보니 대형언어모델(LLM)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정말 모든 학술 분야에서 높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심포지엄 04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방안: IRB와 DRB의 조화' 심포지엄에서는 규제혁신추진단에서 일하면서 세미나를 위해 초청했었던 서울아산병원의 유소영 교수와 위에서 언급한 곽환희 변호사가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느 방에서 심포지엄이 열리는지 금방 확인이 된다면 인사라도 하고 갈 수 있을 터인데... 아쉬운 마음으로 배낭을 들고 자리를 뜨려는데, 바로 같은 방(옴니버스 파크 컨벤션 홀) 헤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소영 교수가 눈에 뜨였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곳에서 심포지엄 04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새로 바뀐 내 명함을 건네면서 함께 인사를 나누고 중간에 편하게 나갈 수 있도록 뒤쪽의 빈 자리에 앉아서 강연을 들었다. 두 번째 발표인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에서 DRB의 역할'(순천향대학교 양현종 교수)에서는 외부의 요청에 의해 의료데이터를 가명처리한 뒤 제공해야 하는 의료기관 현장의 생생한 어려움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려고 한다. 

이어서 세 번째 발표자인 곽환희 변호사를 소개하는데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가방은 테이블 위에 둔 채 연단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 곽 변호사가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몰랐었구나... 하긴 포럼에서 한번 만나고 그 뒤로는 이메일 교신만 했으니 옆모습 만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반가운 마음으로 수첩을 꺼내서 쪽지 편지를 쓴 다음 내 명함과 함께 가방 위에 올려놓고 발표를 조금 듣다가 대전으로 오기 위해 중간에 자리를 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이틀 동안 대전-부산-서울-대전을 거치는 강행군을 펼치느라 피곤한 상태로 졸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곽 변호사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쪽지 받아서 오랜만에 설레었고 또 반가웠다고. 아, 그렇구나! 잠깐 자리를 비운 뒤 다시 돌아왔더니 누군가가 남긴 쪽지 편지가 남아 있다면 어떤 사연일지 기대를 갖고 열어 보지 않겠는가? 펼쳐 보기 전에는 누가 왜 이런 것을 남겼을지 즐거운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쪽지를 남긴 초로의 '아저씨'로서 그 기대를 여지없이 깬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 사실 문자 답신을 받기 전에는 내 쪽지 편지가 그러한 기대감을 갖게 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고전적이고도 아날로그적인 소통 방식이 오늘같이 무덥고 지치는 초여름 날에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한 에피소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설레었다는 그 리액션이 단지 유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연구 대상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안전한 데이터 제공을 위해 현 제도가 요구하는 IRB 및 DRB는 실제 현장에서 많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저 몇 편의 글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피상적으로만 문제 제기를 하던 나에게 오늘 심포지엄은 매우 유익하였다. 어쩌면 대전으로 돌아오기 위해 아예 듣는 것을 포기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택이 새로운 도전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고, 이 분야에 입문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더욱 좋았다.

셀피 놀이. 넥타이와 연자용 이름표 목줄의 두 색깔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KOBIC에서 (다시) 일하게 되면서 내 업무 스타일의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특히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짧은 글쓰기와 구두 발표를 자주 하게 되었다는 점이 과거와 다르다. 

내가 발표를 했던 옴니버스 파크 컨벤션홀은 정말 넓은 곳이었다. 2022년 완공된 최신식 건물로서 대규모 행사를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넓은 방에서 발표를 해 본 일은 내 기억으로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연자나 패널 입장으로는 약간 불편한 점이 있었다. 상당한 시간 지연을 두고 반향음이 들려서 내가 하는 말을 깨끗하게 알아듣기 어려웠다. 특히 패널 토론에서는 더욱 심했다. 패널들에게 나누어 준 무선 마이크가 행사를 위해 별도로 설치한 앰프 및 스피커로 재생이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플로어의 좌우 벽면에는 몇 대의 메인 스피커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청중을 향해 배치되어 있으니 청중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없지만, 모니터 스피커가 없었기 때문에 연단 위에서 말하는 사람은 메인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반향과 더불어 느껴야만 했다. 이상은 오디오에 민감한 사람의 불평이었다. 학술 행사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모니터 스피커의 필요성을 느끼고 오다니... 이건 거의 직업병이다! 아니, 취미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 서울로, 학회 1박 찍고 다시 다른 학회로...

2021년 부산 BEXCO에서 열렸던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정기 학술대회 및 국제 심포지엄이 이번에도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2021년 여름은 2019년 4월부터 2년 동안의 기업 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고, 2022년 8월부터 올 1월 말까지 다시 1년 반 동안 정부 조직(국무조정실 규제혁신추진단)에 파견 근무를 나가느라 사실 최근 사오 년 정도는 학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차피 나는 사람 사귀는 데에는 별로 소질이 없어서 학회를 인적 교류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잘 활용하지는 못한다. 내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분야가 최근에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 하지만 바로 이틀째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대한의료정보학회 춘계학술대회의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 심포지엄에서 유전체 등 오믹스 데이터 생산·분석 정책지정과제에 대한 발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부산역 앞에 숙소를 잡은 뒤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는 하루만 참석하고 둘째 날 아침 서울로 이동하기로 했다. 비싼 학회 등록비를 내고도 충분한 시간을 머물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어제(2024년 6월 19일) 낮 부산에 도착한 직후.

BEXCO를 편하게 가려면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벡스코역'이 아니라 '센텀시티역'에서 내려야 한다. 혼란을 주는 역명 때문에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전에 갔었던 벡스코 앞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건 내가 벡스코역에 내렸기 때문. 3년 전에 똑같은 곳을 찾아서 며칠을 보냈던 기억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엉뚱한 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한 정거장을 걸어야 했다. 



평의원회가 열렸던 광안리 어느 횟집의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 족히 90 dB SPL이 넘는 수준으로 왁자지껄한 평의원회에서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힘들어서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떴다.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폭염은 부산이라고 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광안리 해변가에서 열렸던 평의원회에 잠시 참석하여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각에 부산역 앞으로 돌아오니 제법 선선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의 좋은 점이 아닐런지?

숙소의 수준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부산역에서 가깝고 쌀 것'이라는 조건을 겨우 만족하는, 이름만 호텔인 숙박업소의 수준이 오죽하겠는가? 오후에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의 발표 준비를 좀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실은 별로 좋지 못한 숙소의 환경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잠이 일찍 깬 것이 맞다. 간단히 차려먹을 수 있는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1층에 내려가 보니 수많은 파리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환영 비행을 하고 있었다. 오, 과연 여기가 2024년 대한민국 제2의 도시가 맞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비용을 조금 더 지불하고 부산역 바로 옆에 붙은 토요코인에서 묵을 것을.

서울로 향하는 KTX에서는 또 노트북 컴퓨터를 펼쳐 놓고 발표자료를 검토하면서 입 속으로 연습을 하고 온라인 결재를 했다. 어제도 학회장에 머무는 동안 부처에서 오는 전화를 받느라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이래서 여름 휴가라도 제대로 갈 수는 있을지? 앞으로 3년 동안은 개인 생활이나 '고요함'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가? 

그 3년이라는 기간이 '곱하기 2'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주어진 일은 기대 수준에 맞게 해야 될 것이다. 어서 짐을 챙겨서 부산역으로 나가야 되겠다. 오랜만에 찾은 학회에서 마음 속에 쉼표를 좀 찍어보려 했으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

숙소 탈출! 이 골목을 따라서 죽 가면 바로 오른편이 부산역, 왼편은 역 광장이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1213-3.



2024년 6월 17일 월요일

주말의 변산반도 나들이

주말에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나들이를 나갈 때 특별히 꼼꼼하게 목적지를 선정하는 성격은 아니다. 대개 당일치기 코스를 고르면서 전날이나 심지어는 당일 아침에 어디를 갈지 정하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넣고 가기 일쑤이다. 지난 주말(6/15)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변산반도쪽으로 가기로 하고 목적지 근처의 적당한 식당 이름을 찾아 넣은 뒤 대전당진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다.

첫 목적지는 변산해수욕장이었다. 간단히 해물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아직 개장 전이라서 사람은 많지 않았고, 가족 단위로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관광객이 더러 있었다. 여기에서 채석강이 그렇게 멀지 않을 텐데...



바로 정면 바다 건너에 보이는 섬은 비안도와 두리도 및 부속 도서가 아닐까 싶다.



아, 그렇구나!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해수욕장은 격포해수욕장으로 변산해수욕장에서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더 가야 한다. 가는 길에는 고사포해수욕장을 만날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내소사였다. 꽤 오래전에 아이들과 함께 내소사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입구의 식당가를 지나치는데 어느 식당 주인이 갑자기 구운 전어를 들이밀면서 머리부터 꼭꼭 씹어 먹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 생선을 이런 식으로는 먹지 않아서 다소 놀랐지만, 생각보다 먹을 만하였다. 

내소사는 입구의 전나무숲길이 유명하다. 부도밭을 지나고 봉래루를 만나면서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하였다.


'능가산 내소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 앞에서. 내소사(來蘇寺)는 '소래사(蘇來寺)'에서 개칭된 절로, '이곳에 오면 소생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산사를 방문하여 천왕문을 지날 때에는 항상 동방지국천왕의 플레이 스타일(?)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한다. 동방지국천왕이 연주하는 악기는 비파지만 내가 요즘 연습하고 있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닮았기 때문. F-홀에 해당하는 긴 구멍에는 바깥을 매섭게 내다보는 눈이 보인다. 


봉래루. 제멋대로(?)의 크기를 자랑하는 주춧돌과 기둥의 묘한 조화가 이채롭다.

대웅보전(보물).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문은 너무나 유명하다.

수령 1천년이 넘는다는 느티나무.

국보로 지정된 동종. 고려시대에 주조되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군산에 들렀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관계로 정작 군산에 와서는 옛날식 팥빙수를 한 그릇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군산 내항 쪽에는 대규모의 수제 맥주집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회가 되면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차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형편 때문에 일정을 아주 잘 짜지 않으면 어렵다. 마침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2024 군산 수제맥주 & 블루스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하니 관심을 가져 보도록 하자(행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