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4일 수요일

거버넌스(governance)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쓰기, 그리고 데이터 거버넌스 이야기

'거버넌스'라는 영단어의 뜻을 찾아 보았더니 '협치'라는 풀이가 튀어나와서 적잖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govern'이 '통치하다, 지배하다' 정도의 뜻을 갖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와 유사한 뜻의 명사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goven'에서 유래한 명사는 'governance'뿐만이 아니라 'government'(정부)도 있다. 미리암-웹스터 사전에서는 governanc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governance the act or process of governing or overseeing the control and direction of something (such as a country or an organization)

어떤 조직의 '지배구조'라고 해야 할 곳에 그저 '거버넌스'라는 낱말을 넣어서 멋있게 보이는 글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거버넌스'가 무엇인가? 공법학연구 제22권 제2호에 실린 양천수의 2021년 논문 데이터법-형성과 발전 그리고 과제-를 읽다가 225쪽에서 이와 관련한 글이 있어서 원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굵은 글씨와 밑줄은 내가 추가한 것이다.

데이터법은 최근 데이터에 관해 논의의 초점이 되는 데이터 거버넌스(data governance)를 구현하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여기서 데이터 거버넌스는 간략하게 말하면 데이터를 관리 또는 규율하는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데이터 거버넌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는 이에 전제가 되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거버넌스는 보통 정부를 뜻하는 ‘거번먼트’(government)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폐쇄적인 관료제로 구성되는 거번먼트와는 달리 거버넌스는 외부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열린 조직을 추구한다. 그 때문에 상명하달 형식의 수직적인 소통이 주류를 이루는 거번먼트와는 달리 거버넌스에서는 상호이해와 참여,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소통이 중심이 된다. 요컨대 전통적인 거번먼트가 팽팽하고 경직된 조직과 수직적 소통에 바탕을 둔다면 거버넌스는 느슨하고 탄력적인 조직과 수평적 소통에 바탕을 둔다.

거버넌스를 지배구조라는 용어와 동일시하게 된 것은 corporate governance(기업 지배구조)라는 용어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의 지배구조는 기업을 운영하고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주주/이사회 중심의 통제 구조를 뜻한다. 반면 거버넌스는 어떠한 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 참여까지 포함하는 열린 개념이다. 그러니 이를 '협치'라고 뜻풀이를 해 놓은 것은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되는 셈이다. 그렇다 해도 '데이터 협치'라고 해 놓으면 너무 어색하다. 어쩔 수 없이 영단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한글로 옮겨서 적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한글의 발전과 확장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ChatGPT에 따르면 지배구조는 governance as control이고, 거버넌스는 governance as process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오늘날 거버넌스의 올바른 의미는 어떤 조직, 시스템, 네트워크가 의사결정하고, 책임을 지며, 자원을 배분하고, 규범을 따르는 방식 전체를 말한다.

2014년 포브스에 실렸던 Jacob Morgan의 글 'Privacy is completely and utterly dead, and we killed it'을 음미하다가 이번에는 Personal Genome Project(PGP)로 대표되는 '정보를 공유할 권리(right ti share)'에 매료되어 본다. 아, 지조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스윙'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이번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언론 매체를 통해 '스윙(보터)'이라는 표현을 많이 보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다듬고 쓰임새를 늘림과 동시에 새로운 낱말을 갈고 다듬으면 안 되나?

2025년 6월 2일 월요일

ChatGPT에서 PDF를 만들기에 적합한 한글 TTF 글꼴은?

최근 읽은 책 <사생활의 역사>와 <리커넥트>. 오른쪽 짹은 '은둔'과는 또 다른 문제인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두 책이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사뭇 다르다. <리커넥트>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나는 세상을 잘못 산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정보화 사회가 AI 기술을 만나면서 데이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워낙 대중화되어서 더 이상 사생활은 없고, 누구나 경제적 가치와 교환할 수 있다면 자기의 데이터를 넘길 자세가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규제가 심하다는 논조의 글을 나 역시 종종 써 왔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여기에 얼마나 개입을 해야 할까? 안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감시해도 될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데이비드 빈센트의 <사생활의 역사>(원제: PRIVACY: A Short History)를 읽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맨 마지막 장인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에서 인용한 몇 편의 참고문헌을 찾아서 한글 번역을 시도하였다. 당연히 작업 도구는 ChatGPT이다. 회색으로 표시한 글은 공백을 포함하여 약 310자 이내로 작성한 요지이다.

William L. Prosser. Privacy. California Law Review 48(3):383, 1960.

사생활 침해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가 법적 체계 내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분석합니다. Prosser는 네 가지 유형(사생활 침입, 공개된 사실, 허위조명, 사적 이익의 무단 이용)으로 사생활 침해를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명확한 법적 보호 체계를 정립하려 시도합니다.

A. Michael Froomkin. The Death of Privacy? Stanford Law Review 52:1461, 2000.

정보기술과 감시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 정보 보호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일상적 감시, 생체인식, 온라인 추적 등 기술이 사생활을 침식하고 있으며, 기존의 법률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다만 다양한 기술적·법적 조치를 통해 완전한 붕괴는 막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Jacob Morgan. Privacy is Complely And Utterly Dead. And We Killed It. Forbes 2014년 8월 19일.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공유하며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초래했다는 논지를 전개합니다. 감시의 주체는 정부뿐 아니라 개인 자신이며, '죽은 프라이버시'는 단순히 피해자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선택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이 분야에서는 매우 유명한 논문(마지막 것은 논문은 아님)인 것 같다. 독후감과 더불어 이 자료를 음미한 바에 대한 글은 나중에 생각을 더욱 정리한 다음 별로로 작성해 보겠다.

ChatGPT에 PDF 파일을 각각 밀어 넣은 뒤 한글 번역본을 역시 PDF로 제공하라고 하였더니, 어떤 문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잘 만들어 내다가 또 어떤 문서는 한글이 아예 표시되지를 않았다. 왜 그런지를 물었더니 다음의 조건을 만족하는 글꼴을 직접 밀어 넣어야 된다는 것이다.

  • TrueType Font(.ttf) 형식
  • 유니코드 범위가 완전하고
  • 단순한 글꼴 구조(복잡한 OpenType 기능이나 CID 맵핑 없음... 무슨 소리인지?)
  • 라이선스가 자유롭고 경량화된 들꼴

ChatGPT에서 한글을 포함하는 PDF 문서를 만들려면 FPDF(단순 문서, 요약 등 간단하고 빠른 작업)이나 ReportLab(논문, 서식지, 다단 문서, 표 포함 문서 등)이라는 것을 써야 하는데, 그 성능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둘 다 파이썬에서 PDF를 생성해 주는 것으로, 앞의 것이 매우 가볍고 빠른 경량 라이브러리이고(원래 PHP용으로 개발) 뒤의 것은 전문적인 PDF 문서를 생성하는 강력한 엔진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윈도우 기본 한글 글꼴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무료 글꼴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권장 글꼴 조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워드 클라우드를 만들 때에는 파이썬 라이브러리를 직접 업로드해야 했는데, 이번 PDF 문서 생성 작업에서는 그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글꼴은 넣으라고 한다. ChatGPT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라이선스 문제가 있으니 사용자가 중간 과정을 처리해 줘야 하는 것 같다.

다음은 나눔고딕(Regular/Bold)를 적용하여 ReportLab으로 만든 문서의 스크린샷이다. 처음 시도했던 결과물에서는 줄바꿈이 되지 않고 줄 간격이 16pt로 다소 좁아서 이를 개선해 달라고 하였다. 줄 간격은 24pt로 늘렸고, 문단 사이 간격도 더욱 늘려서 가독성을 좋게 하였다.



ChatGPT에 작업을 요구할 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2025년 6월 1일 일요일

[KORG X2] 드럼킷과 관련한 궁금증

KORG X2/X3에는 총 4개의 편집 가능한 드럼킷(Drum Kit)이 존재한다. A09(Total Kit), A69(ProducrKit), B09(Rave Kit), 그리고 B69(VeloGated)이다. GM 뱅크의 129번-136번에 해당하는 8개의 킷은 편집을 할 수 없다.

X2/X3 Basic Guide 48쪽에는 다음과 같이 4개 킷의 음색 배열이 수록되어 있다.


각 킷에서는 60개의 키 인덱스에 000(Fat Kick)부터 163(Metronome2)까지 총 164개의 드럼 사운드를 매핑해 놓았다. 그런데 나의 X2를 X2P internal preload data로 재설정해 놓은 뒤 실제로 드럼 소리를 들어 보니 여기에서 소개한 배열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X3보다 나중에 출시된 X2에서 분명히 변화를 준 것은 맞는데, 어떤 점이 더 강화되었는지는 문서 등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Reference manual 170쪽에 의하면 드럼킷 설정은 Global 7A(Drum Kit Setup1)과 7B(Drum Kit Setup2)에서 다루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왜 설정 메뉴가 두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7A-1 모드에서 A1, A2, B1 및 B2를 전부 로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구한 X2/X3용 음색 설정 디스크 중에서 여러 악기로 구성된 완전한 곡이 아니라 드럼 패턴만 수록한 것은 XSD-15 Power Disk가 유일하다. 이 디스크 안에서 X3DRUMS 설정을 로드한 뒤, X3DRUMS.SNG를 시퀀서로 로드하면 S0-S9의 10개 곡 데이터를 얻게 된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망가졌으므로 .PCG 및 .SNG("X3DRUMS.SNG") 파일을 SysEx로 전환한 뒤 MIDI 케이블을 통해 전송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렇게 설정을 바꾼 상태에서 9개의 곡을 차례로 재생하여 녹음해 보았다.


그러면 이 시퀀스 데이터는 XFD-02 Internal Preload Data 디스크의 X3P_LOAD 설정과 잘 맞는가? 이것으로 설정을 되돌린 뒤, X3DRUMS.SNG를 다시 전송하여 각 곡을 재생해 보면 S1-S5는 소리가 맞지 않는다. 이 시퀀스를 제작한 사람은 X3의 기본 드럼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KORG X2가 드럼 머신으로서 탁월한 장비는 아니다. 만약 내가 '손가락 드럼'에 진정 관심이 있다면, 이미 보유하고 있는 AKAI MPK mini를 공부하는 것이 투입한 노력 대비 성과의 측면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구식 장비이기는 하나 음원으로부터 내장 시퀀서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Music Workstation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시퀀스 데이터에서 드럼 패턴을 복사에서 재사용 가능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

2025년 5월 30일 금요일

KORG X2의 팝업 노이즈 및 전원 공급 시퀀스의 기록

오디오 앰프의 전원을 넣거나 끌 때 들리는 '퍽' 소리를 팝업 노이즈(pop noise) 또는 파워 온/오프 노이즈라고 한다. 요즘은 앰프 칩 자체에 보호 및 anti-pop noise 기능이 내장된 경우가 많다.

KORG X2 신시사이저의 전원 회로를 내 마음대로 개조해 놓았더니 전에는 없던 팝업 노이즈가 발생하고 있다. 이를 오실로스코프로 기록해 보았다. 볼륨 슬라이더는 최대로 한 상태이다.


파형은 매번 모양이 다르다. 동영상으로도 기록해 보았다.


X2의 아날로그 보드에는 뮤트 드라이브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 파워 온 직후 전원 전압이 일정 수준으로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출력을 내보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리지널 전원 회로에서는 디지털 회로용 5V와 op amp용 +/-12V가 같은 SMPS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의 동시에 두 그룹의 전원 전압이 공급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올해 이를 개조하면서 SMPS 및 리니어 회로를 섞어 놓았으니 공급 시간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 

5V와 op amp용 +/-12V 중 어느 것이 먼저 공급될까? ChatGPT에 물어보니 SMPS가 만드는 5V는 거의 즉각적으로 출력될 것이고, 리니어 전원 회로의 것이 약간 늦게 나올 것이다. 개조하여 넣은 회로가 원래 설계된 뮤트 드라이브와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X2 뒷판을 열고 오실로스코프를 연결해 보면 된다.

회로의 종류가 다르므로 동시 공급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팝업 노이즈를 줄이려면 어느 것을 먼저 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ChatGPT에 의하면 op amp가 먼저 작동한 뒤 그 앞의 DAC에 전원이 들어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전원 공급 시퀀스의 비밀이 풀리다

30년 가까이 묵은 오실로스코프 프로브의 상태를 보라. 후크 커버를 분리하였더니 팁이 커버 속으로 쏙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 이것도 플라스틱이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 열화되면서 부러진 것 같다. 이런 작은 사건을 겪고 나니 X2를 비롯하여 낡은 오디오 관련 기기를 계속 유지보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오른쪽 검정색 프로브의 상태를 보라.

검색을 해 보니 'probe tip'이라는 액세사리가 있다는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찾기는 어렵다. 중국산 오실로스코프 프로브 자체가 비싸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전체를 바꾸는 것이 낫겠다. 

최근 구입한 저가 오실로스코프의 2개 채널을 전부 동원하여 X2의 전원(5V 및 12V)가 어떤 순서로 들어오는지 점검해 보았다. 오리지널 전원회로에서는 아마 거의 동시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5V가 먼저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Power on과 off 전부 12V가 먼저 들어오고 나갔다. 이어서 약 200~600msec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5V가 동작한다. ChatGPT는 X2와 같은 회로 구성에서는 +/-12V가 먼저 들어와서 후단의 op amp가 안정화된 다음, DAC에 5V가 공급되어야 팝업 노이즈가 적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전원장치가 개조된 나의 X2에서는 이미 이러한 시퀀스를 갖추고 있었다. 

ChatGPT의 답변이 틀렸을 수도 있다. 다른 대화형 AI에서는 전혀 반대 순서를 권장하였으니까 말이다. 또한 일반적인 오디오 기기의 연결에서도 소스 기기를 먼저 켠 뒤에 앰프를 켜라고 하지 않던가. 위에서 촬영한 기록으로 판단하자면, '앰프'가 먼저 켜진 다음 그 앞의 소스 기기가 펴지는 것과 같다. 

그동안 가졌던 기본 가정을 바꾸어야 되겠다. 5V를 12V보다 먼저 들어오게 하면 팝업 노이즈가 나지 않을 것이다. 

NE555를 사용한 시간 지연 릴레이 보드를 벌써 알리익스프레스에 주문해 놓았는데, 이것은 12V로 동작하는 것이다. ChatGPT의 답변을 너무 믿었다! 5V로 동작하는 것으로 주문했어야 한다. NE555는 동작전압의 범위가 4.5~16V로 매우 광범위하므로, 릴레이만 교체하면 사용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원 투입 순서를 바꾸어도 여전히 팝업 노이즈가 난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종류의 직류 전압 파형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 12V의 리플이 매우 심하였다. 시간축을 확대하니 더욱 극명하게 전원의 품질이 드러났다. 이러니 험이 그렇게 심했지... LM317/337을 사용한 전압 조정기 보드를 또 주문해 놓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험은 X2의 무신호 출력을 Audacity에서 녹음한 다음 50dB 증폭을 했을 때에 헤드폰으로 들리는 정도였다.

대충 눈으로 살펴본 노란색 파형(12V)의 리플 주기는 8msec, 즉 120Hz이다. 전파정류를 한 뒤 남는 전형적인 리플이다. 5V에 비하여 대단히 불량한 상태이다. WaveSpectra에서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보자. X2의 개조를 왜 시작했나? 우선 tactile switch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어서 전면 교체가 필요했었다. 이 수리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전원부 개조는? Hiss noise의 원인이 전원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엉뚱한 짓을 벌였다. 220V를 110V로 낮추는 강압 트랜스를 쓰지 않게 된 것은 정말 좋았다. 그러나 팝업 노이즈가 생겼고, 실용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어쨌든 성가신 험이 발생하게 되었다.

X2의 완벽한 개조는 여름을 훌쩍 넘길 것 같다.

2025년 5월 25일 일요일

SCO2 오실로스코프로 전원 어댑터의 품질을 측정해 보다

KORG X2 신시사이저의 잡음 문제를 토의하는 과정 중에 오디오퍼브에서는 전원의 품질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링크). X2의 아날로그 및 디지털 회로의 전원을 공급하는 보드는 얼마 전에 전부 최신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체용 보드를 중고로 구해서 교체한 것이 아니라 +5V(스위칭) 및 +/-12V(리니어)를 출력하는 범용 전원 공급용 보드를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별도로 구해서 넣은 것이다. X2의 메인보드에 위치한 DAC 및 이로부터 나오는 출력을 직접 받는 op amp(IVC 역할)는 매우 깨끗한 DC 5V가 필요하므로, 보드 내에 78L05UA를 이용하여 12V를 5V로 만들어 공급하는 별도의 회로가 존재한다. 

KORG X2 메인보드(KLM-939)의 확대 사진.

정전압을 얻기 위하여 흔히 쓰는 레귤레이터는 내부 출력 임피던스가 인덕티브한 특성을 지니므로 출력 커패시터와 공진을 일으켜 특정 주파수에서 노이즈 피크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레귤레이터 IC 및 그 주변의 소자가 열화되었다면 노이즈가 더 생길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에 나열하였다.

오실로스코프를 구입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근처의 전원 품질을 측정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배송이 완료된 후 며칠 동안 텍트로닉스 TDS 210을 사용했던 기억을 되살려 기본적인 사용법을 익혔다. 

오늘은 갖고 있는 몇 개의 전원 어댑터 품질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출력 파형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살피기 위함이다. 사실 오늘의 실험은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수행한 것이다. 다음에는 텔레다인 르크로이의 어플리케이션 노트 노이즈가 많은 전원 장치 출력 측정하기를 꼼꼼하게 읽어 보아야 되겠다. 

프로브는 1X로 맞춘 뒤 AC 커플링으로 측정을 시작하였다. AUTO 기능은 쓰지 않고 직접 X축(시간)과 Y축(전압) 간격을 조정하였다.

왼쪽부터 12V 3A, 9V 650mA, 12V 1A 출력의 어댑터. 내부는 어떤 회로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먼저 가장 왼쪽의 어댑터부터 측정해 보았다. X축은 1ms/div, Y축은 20mV/div로 하였다. 10X 프로브를 사용했다면 100mV/dev이 최소의 범위라서 작은 신호의 변화를 보기 어렵다. 그런대로 준수한 수준이다. 주파수는 약 1.14kHz.

Hold 버튼을 눌렀더니 파형이 두껍게 나타난다(화면 오른쪽 아래의 주황색 'STOP' 표시를 보라). Auto 버튼을 눌러도 정지된 모습으로 파형을 잘 잡지 못한다.

다음은 가운데의 것. 이것은 StudioLogic SL-990 키보드 컨트롤러에 연결해 쓰던 것이다. 톱니 모양의 리플에 더하여 전체가 출렁거린다. 출렁거림을 화면에 담기 위해 X축 단위를 더 긴 시간인 100mS/div로 늘려 보았다.


다음은 X축을 확대하여 5mS/div로 맞춘 후 측정한 것.

Hold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파형이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상태에서 그대로 화면을 촬영하였다.

다음은 세 번째 어댑터에 대한 결과이다. 톱니와 같은 파형의 주기가 훨씬 짧고, 진폭도 좁다. 시간축 간격을 200uS/div로 확대하였다.


7800 시리즈보다 노이즈 억제력이 훨씬 좋다는 LDO(low-dropout regulator)를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노이즈가 극히 적은 오디오 기기의 전원부에 널리 쓰인다는 LT3045 모듈을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가장 전원 품질이 나빴던 두 번째 어댑터의 출력을 LT3045 모듈에 공급한 다음, 그 결과를 측정해 보았다. 2채널 오실로스코프라서 레귤레이터 투입 전후의 신호 상태를 비교해 볼 수 있어 좋다. 아래의 노란색 톱니 파형이 레귤레이터 투입 전, 위의 파란색의 평탄한 파형이 투입 후이다. LDO의 효과가 극명히 나타난다.


아직 KORG X2의 노이즈를 오실로스코프로 측정해 보지는 않았다. 수 kHz의 주파수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것이 hiss 노이즈의 특징이니, 단순히 오실로스코프 화면으로 나타내기는 어려우며 아마도 WaveSpectra에서 FFT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SCO2의 다음 버전 업데이트에서는 FFT 기능이 추가된다고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실제 X2 뒷뚜껑을 열고 메인보드 내에서 공급되는 78L05UA 유래 5V 전압을 오실로스코프로 측정해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바라지 않았던 원인, 즉 DAC나 여기에 연결된 op amp가 문제였을지도... SMD 부품을 어렵사리 구한다고 해도 나의 장비와 실력으로는 보드에서 이를 떼어낸 뒤 새 것을 붙이는 일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다.

어제 겪은 필름 커패시터의 폭발 사고를 생각해 본다면, 제조 후 30년 가까이 지난 전자제품을 계속 유지보수하여 쓰려는 노력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하러 이렇게 낡은 신시사이저를 고쳐 보려고 애쓰는 것일까? 차라리 12~15년 이내의 주기로 새 물건을 들이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씩 배워 나가면서 DIYer는 보람을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2025년 5월 24일 토요일

SCO2 오실로스코프를 테스트하다 함수발생기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SCO2 테스트. 전원 트랜스포머 2차에서 얻은 60Hz의 파형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KORG X2 Music Workstation의 잡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한 저가 디지털 오실로스코프(모델명 SCO2 또는 SCO_2_10M, 제품 소개 웹사이트)가 5일 만에 도착하였다. 제품 설명은 '듀얼 채널 디지털 핸드 헬드 오실로스코프 PWM 50M 10Mhz 샘플링 속도 2.5KSa/S 전자 수리 도구 용 아날로그 대역폭'이다. Nyquist 이론(샘플링 속도 ≥ 2 × 신호의 최대 주파수)에 따르면 사실 이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 10MHz 대역폭에 2.5KSa/s 샘플링 속도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 판매 사이트의 본문에는 'current sampling rate: 2.4KSa/s'라고 되어 있다. 이 제품은 최대 6A의 전류 측정 기능도 있으니, 어쩌면 이에 대한 설명을 잘못 기재했는지도 모른다. 최소 그리드 간격은 100mV(10X 프로브), 50nS이므로 수 kHz의 신호만 측정 가능하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판매 사이트에 게시된 공식적인 제품 사양은 다음과 같다.

  • Model: SCO _ 2 _ 10M
  • Sampling rate: 50M/channel
  • Number of channels: 2
  • Analog bandwidth: 10MHz (per channel)
  • Measuring voltage: X1/+40V X10/ soil 400V
  • Input Impedance: 1MQ
  • Storage depth: 20Kb
  • Parameter Display: 12 kids
  • Current measurement: 0~6A
  • Minimum accuracy: 2mA
  • Current sampling rate: 2.5KSa/S
  • Display: 3.2 inch LCD
  • Resolution: 320*240
  • Charging voltage: 5V
  • Battery capacity: 2500mAh
  • Continuous working time: 4.5-6h
  • Host computer: to be updated
  • Firmware upgrade: support

상자에 붙어 있었던 라벨. 공식 모델명은 SCO_2_10M이었다.


테스트를 하기 위해 거의 30년을 묵힌 함수 발생기(function generator, METEX MXG-9802)를 연결하여 보았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금이 갈 정도로 낡은 상태이다. 충전식 초소형 오실로스코프라서 몇 개 되지 않는 버튼으로 조작을 하게 만들어 놓으니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시행착오 끝에 예쁜 사인파가 나오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함수발생기에서 폭발음이 나면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전원부의 전해 커패시터가 폭발한 것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오실로스코프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전자제품에게 30년 가까운 세월은 정말 가혹하다. 무엇이 터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함수발생기를 열기 시작하였다. 분해하는 방법을 몰라서 무척 애를 먹었다. 밑면에 있는 네 개의 다리에 붙은 쿠션을 뜯어내고 그 속에 숨은 볼트를 풀어야만 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무엇인가 터진 잔해가 쏟아지는데 외견상 전해 커패시터는 멀쩡하다. 기판 하나를 들어냈더니 바닥쪽 기판의 필름 커패시터가 터진 것이었다. 옆에 있던 레귤레이터는 내용물을 뒤집어썼다. 터진 부품은 X2 안전 커패시터라는 것이다. X2 신시사이저를 고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데 X2 커패시터가 터졌다. X2 커패시터는 교류 전원라인(L-N 사이)에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는 안전 인증된 필름 커패시터로서, 전원 라인에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커패시터 중 하나라고 한다.

RIFA PME271M 메탈라이즈드 폴리에틸렌 필름 커패시터. 폭발 당시의 힘에 의해 저 두꺼운 리드가 옆면을 뚫고 튀어나온 것을 보라.

위에서 본 모습.

커패시터 내용물을 뒤집어쓴 이 레귤레이터도 교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챗GPT의 설명에 의하면 수분 흡수로 인한 팽창 및 폭발 사고로 유명하다고 한다. 삼화 MPX2 시리즈나 Pilkor PCX2 339 시리즈와 같은 국산품이 있으니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 폭발사고 후에도 함수발생기의 디스플레이는 잘 표시되는 것을 보니 일단은 고쳐서 쓸 수 있을 것으로 본다.

SCO2 오실로스코프와 웹사이트에는 이런 표시가 있다.



安捷尼尔('안제니얼'로 읽음)은 바로 Engineer의 음차에 해당한다. 제품에 동봉된 매뉴얼의 PDF 파일도 웹사이트에서 받아볼 수 있는데(링크), 영문을 제공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소프트웨어를 V2.50(2025/03/17)로 업데이트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CH340 USB 드라이버가 Windows 11에 설치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더 나중 버전을 다운로드하여 겨우 설치하였다. 아두이노 호환 보드를 쓰면서 이 드라이버를 알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질 뻔하였다. SCO2 소프트웨어의 3월 버전에서는 파형 표시 알고리즘을 최적화하였고 화면 새로 고침 속도를 향상하였으며, UI가 최적화되었다. 다음 버전에는 파형 연산(A+B, A-B, AxB, A/B) 및 FFT(고속 푸리에 변환)이 추가될 것이라고 한다.

함수 발생기가 고장났으니 오실로스코프를 테스트할 파형을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한다. WaveSpectra와 WaveGen이라는 프로그램 덕분에 컴퓨터에서 원하는 파형을 만들 수가 있다! 이는 오디오 퍼브의 소개(링크)로 알게 되었다. 

악어 클립 케이블(1X)로 연결하여 WaveGen의 출력을 측정하는 모습. 

과연 이 장난감 같은 디지털 오실로스코프로 KORG X2의 잡음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까? 히스 노이즈는 여러 주파수의 파형이 섞인 것이라서 FFT를 하지 않으면 파악이 어렵다. 또한 직류 전원의 품질(특히 리플 수준)을 측정하려면 오실로스코프의 성능이 좋아야 한다. 인터넷에 자료가 많이 있으니 차차 공부해 나가도록 하자.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


2025년 5월 26일 업데이트

X2의 볼륨을 최대로 한 뒤 헤드폰 출력(R)을 Mackie Onyx Pdoucer 2·2 오디오 인터페이스로 연결한 뒤 WaveSpectra에서 FFT를 해 보았다. 아무 건반도 누르지 않은 상태의 분석 결과이다. 


수치 상으로는 noise floor가 별로 나쁘지 않다. 건반 하나를 눌러 보았다. 


오실로스코프를 연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가청 주파수, 즉 악기가 만들어 내는 저주파 영역에서 무음 시에 나타나는 노이즈와 직류 전원의 노이즈를 구별하여 이를 제대로 측정하는 방법을 익혀야 되겠다. 오실로스코프와 WaveSpectra는 전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오디오퍼브의 제안처럼 직류 전원에 커플링 커패시터를 연결한 뒤 오디오 인터페이스로 입력하여 WaveSpectra로 어떤 주파수의 노이즈가 섞여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2025년 5월 22일 목요일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삼엽충

이번에도 아들은 독특한 생일 선물을 보내 주었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를 보니 책이 분명한데 다른 것이 같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삼엽충('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그리고 진짜 삼엽충의 화석 2점. 이 책의 원제는 <Trilobite: Eyewitness to evoution>이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방어 자세를 취한 Austerops sp.(왼쪽)와 Flexicalymene ouzregui. 오른쪽 것(아쉽게도 라벨지에 인쇄된 학명 철자가 틀렸음)은 오르도비스기의 지표 화석이라고 한다. 판매처는 루페우스 코리아.

저자인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1946-2025)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수석 고생물학자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었으며, 과학의 대중화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 지난 3월 <가디언>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였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른 책을 읽느라 아들이 보내준 <삼엽충>은 지난 화요일 부산 BEXCO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KTX에 밀려서 대전-부산을 오가는 고속버스가 없어진 지금(도태 또는 멸종?), 전세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였다. 오늘 행사 참석을 위해 부산을 또 다녀 왔으니 이것 또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문학적이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푸른 눈동자(A Pair of Blue Eyes)>의 주인공이 영국 콘월(Cornwall) 지역의 해안가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위태롭게 매달렸다가 시야에 들어온 점판암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매달린 채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릴 때 주변세계의 익숙한 것들이 서서히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이트의 눈에 암석에서 약간 튀어나와 있는 박힌 화석 하나가 보였다. 눈이 달린 생물이었다. 죽어서 돌로 변했음에도 그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엽충이라고 하는 초기 갑각류의 일종이었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나이트와 이 하등생물은 죽음의 장소에서 마주친 듯했다. 마치 지금 그 자신이 그러하듯이, 손이 닿는 곳에 한때 살아 있었고 구해야 할 몸을 지니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29쪽).

하디는 이 지역에서 젊은 시절 건축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리처드 포티는 이 소설에 나오는 해안 지형을 답사하면서 소설의 이 구절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열 네살 때 삼엽충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들이 여자친구를 찾던 시기에 남웨일스 지방의 세인트데이비스 반도 절벽에서.

화석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서 치약과 함께 솔로 문질러 닦았더니 조각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세척하면 안된다!

포티는 이렇게 삼엽충에 매료되어 3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가 처음 박물관 직원이 되어 고생물학과에 배정되었을 때, '삼엽충에 관한 연구를 하는'이라고 적힌 직무설명서를 받아 들고 '즐기면서 돈을 번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77쪽). 그리고 평생을 삼엽충을 보러 다녔다. 새로운 삼엽충의 종을 찾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새로운 생물의 종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삼엽충이 얼마다 다양하고 정교한 생명체였으며, 어떻게 번성하고 사라졌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방해석으로 이루어진 삼엽충의 눈은 정밀하고도 독특하다. 이러한 멋진 특성을 이어받은 현생생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꿈과 같은 상상이지만 만약 삼엽충의 DNA를 지금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삼엽충 진화가 단속적으로 이루짐을 선구적으로 발견한 루돌프 카우프만(1909-1941?, 위키백과)의 비극적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저미게 한다(198~203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2018년 흑백 영화 <콜드 워>를 몇 번이나 연상했는지 모른다. 1991년 우표 경매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편지와 엽서 묶음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슬픈 인생 결말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PubMed에서 리처드 포티의 논문을 찾아 보았다(검색 결과). 놀랍게도 매우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 Natl. Acad. Sci. USA)에 삼지창 모양의 구조를 머리에 달고 있는 새로운 삼엽충 Walliserops trifurcatus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었다. 이 내용은 302쪽에 나온다.

Trilobite tridents demonstrate sexual combat at 400 Mya. Gishlick AD, Fortey RA. Proc Natl Acad Sci U S A. 2023 Jan 24;120(4):e2119970120. doi: 10.1073/pnas.2119970120. Epub 2023 Jan 17. PMID: 36649420 (원문 링크) 보도자료 국내 기사

이 별난 삼엽충의 삼지창은 성적 경쟁을 위한 무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공작 수컷의 화려하고 거대한 장식 깃이나 사슴 수컷의 뿔을 연상해 보라. 출처: 그림 1(링크).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지금(인공지능의 파급력은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도대체 삼엽충이라니? 그리고 고생물학이라니?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은 10장 <눈이 있는자, 보라!>를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적으로 삼엽충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애써도 삼엽충학이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동원되는 시나리오를 짜낼 수가 없다. 이렇게 외롭고 무해하며 연구비를 따기 어려운 분야이지만. 그러다가 갑자가 어떤 연결이 이루어지면서 최첨단에 영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핵물리학이나 생리학(요즘 말로 이야기하자면 '바이오')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삼엽충 분야는 역사 전체를 살펴볼 여유가 있다.

탐구에 끝이란 없으며, 우리는 다음 절벽 뒤나 다음 셰일 조각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내 삼지창 삼엽충은 하나의 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키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했다.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더 메마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되리라고 예견한다... 앞으로 지식의 그물에 어떤 연결이 이루어질지 헤아리기는 더 어렵다. 그것은 다른 10겨 개 과학 분야의 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결이 계속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하며, 그것은 앞서 그런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303쪽).

고생물학은 장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한다. 한때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절멸한 생물을 탐구하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고, 환경·기후·지질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일례로 우리는도시화된 곳에 밀집해 살면서 지리적 여건과 심지어 기후까지도 기술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른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BEXCO에서 있었던 학술 행사에서 L박사는 합성생물학의 밝은 미래를 소개하였다. 발표가 끝난 뒤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생명체가 이런 공학적 원리에 저항하지 않던가요? (K대) L교수님 발표를 들으면 정말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러 군데 유전자를 한꺼번에 조작하면 수십 세대만 지나도 그 형질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이에 대해 L박사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챗GPT에 의하면 고생물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대한 시간의 거울에 비춰보게 하는 지적 자극'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포티의 글 중 Nature 2016년 9월 15일자에 발표한 신간 서평이 매우 인상깊었다('Dendrology: The community of trees', PubMed). Nature는 구독하지 않으면 전문을 접근할 수 없어서 내 맘대로 이 글의 번역을 여기에 올리지는 못한다. 짧게 소개하자면 이는 독일의 삼림 관리인 Peter Wohlleben의 책 <The Hidden Life of Trees: What They Feel, How They Communicate — Discoveries from a Secret World>에 대한 서평이다. 저자는 숲을 매우 정교하게 얽인 다층적 네트워크로 묘사하였음을 포티는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충분히 흥미로운 접근이지만, 이는 마무를 껴안으려 더 깊은 실재와 연결된다고 믿는 행위와 멀지 않다고 하였다. 즉, 나무는 엔트(Ents)가 아니라고 하였다. 엔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 생명체라고 한다. 포티의 글을 완벽하게 음미하려면 토마스 하디에 이어서 J. R. R. 톨킨의 책도 읽어 봐야 될 것 같다. 국내에도 소개된 포티의 또다른 저서 <나무에서 숲을 보다(원제: The Wood for the Trees)>도 구해서 읽어봄직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16년, 즉 포티가 Nature에 서평을 쓴 바로 그 해이다.

파손 방지를 위해 앞으로는 화석을 솔로 문질러 세척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되겠다. 

삼엽충 외골격의 상세 구조. 출처: British Geological Suervey(링크).


삼엽충 모양의 마우스 디자인. 출처: ATEC-DAB UTDallas 블로그에 게시된 Ashley D. Goodenough의 작품(링크).


무수한 화석으로 남은 삼엽충 앞에서 우리는 보다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달이나 다른 행성으로 자원을 찾으러 떠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AI가 발달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뜻하지 않은 아들의 선물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챗GPT에게 부탁하여 그린 그림.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드디어 달을 파먹기 시작할 것이다. 삼엽충 모양의 우주선에 달에서 채취한 광물자원을 싣고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삼엽충은 언젠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지도 모르는 우리 인류의 문명을 암시한다.

저자가 185쪽('박물관' 장)에서 인용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경구를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희망에 부푼 여행이 도착보다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