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새로운 만년필, 3·OYSTERS HUNTERS

2-3만원 정도의 만년필을 1년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구입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큰 사치를 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년 이맘때에 구입한 파커 IM - 이것은 5만원이 넘는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는 여전히 손에 잘 익지를 않고, 지난 가을부터 쓰던 워터맨 Expert 만년필은 떨어뜨려서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Expert를 수리하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부담 없이 쓸 만년필을 하나 더 구입하고 싶어졌다. 사실은 그런 목적으로 Sheaffer VFM을 샀었던 것이었으나...

광화문 핫트랙스에서 국산 브랜드인 3·오이스터스의 헌터스 모델(제조국은 대만)을 하나 구입하였다. 브랜드의 의미, 제품 소개 등은 네이버의 블로그(링크)에 소개가 되어 있는데 포장용 상자에는 http://www.firstmate.co.kr이 인쇄되어 있다. 여기를 클릭해 들어가면 3·오이스터스에 대한 정보는 없다.

헌터스 만년필(제품 소개 링크)에는 다음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중간의 포레스트 그린이다. 일부러 흔하지 않은 색깔을 고른 것이다. 닙은 F(0.6 mm) 단일 사이즈이다. 크기와 손에 잡히는 느낌은 꽤 오래전에 쓰던 자바펜의 아모레스를 연상시킨다. 지금은 업그레이드 버전인 아모레스II로 바뀌었다. 자바펜의 만년필에는 여분의 카트리지를 하나 더 넣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헌터스는 그렇질 못하다. 이는 쉐퍼 VFM도 마찬가지이다. 필기구도 소형 경량화를 추구하다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자료 출처: 3·OYSTERS 블로그
행사 중이라서 찬란한 색상의 10색 카트리지를 덤으로 얻었다. 기본 구성으로는 검정색 카트리지와 컨버터가 각각 하나씩 들어 있다. 3·오이스터스는 I·COLOR·U나 훈민정음 등 한국 독자 브랜드의 병잉크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매장에서는 비슷한 가격대의 제품으로 대만 IWI의 핸드스크립트라는 제품도 보여주었다. 이것은 헌터스보다 조금 더 짧아서 캡을 뒤에 꽂아서 써야 하고, 촉도 더 가늘며, 무엇보다도 인조가죽 마감이 얼마 쓰지 못하고 벗겨질 것만 같았다. 3·오이스터스 헌터스를 고른 것에 일단 만족한다. 손에 적당히 잘 잡히고 필기감도 좋다. 

독일제 이리듐 닙이다.
본체 끝에는 'TAIWAN'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매장 직원이 새로 나온 Parker Jotter도 소개해 주었다. Jotter 예전 모델과 Vector Standard는 오래 사용했더니 배럴이 플라스틱이라서 돌려서 닫는 나사 부분에 금이 가고는 했었다. Jotter 신상품은 금속 배럴 모델도 있는 것 같았다. 

독일 KAWECO라는 브랜드의 만년필도 만져 보았다. 오늘은 전혀 모르던 만년필 브랜드를 세 종류나 접한 셈이다. 언젠가는 본체 가득 잉크가 들어가는 펠리칸 M205를 써 보고 싶다.


2018년 12월 13일 목요일

독서 기록 - [소수의견을 외치는 당신이 세상을 바꾼다] 외 두 권


소수의견을 외치는 당신이 세상을 바꾼다

  • "무조건 다수의 편에 서는 당신은 비겁하다!"
  • 아케다 기요히코 저/이정은 역
동조압력의 문제점을 고발한 책. 혁신은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혁신은 내부에서 올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돌연변이야말로 내부에서 발생하는 가장 원초적인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지만, 유리한 변이는 집단 내에 퍼진다. 그러려면 다양한 '변이'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 가장 노력을 적게 들이는 혁신 방법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사상·인물·기술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적은 것은 책에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트

  • "엘리트는 어떻게 사회를 기만하는가"
  • 야스토미 아유미 저/박솔바로 역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인 저자는 내면의 여성성을 자각하면서 여장을 하고 다니면서 이름도 '아유무'에서 '아유미'로 바꾸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용기 있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안전이나 효율보다 자신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전문가들이 구사하는 기만적인 화법(도쿄대식 화법)을 고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장'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자기가 속한 조직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의 다른 책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중국이 아닙니다(원제: Young lives in new China)

  • "모두가 착각했던 중국 청춘들의 삶"
  • 알렉 애쉬 저/박여진 역
마오쩌둥 정권 이후 태어나서 천안문 시위를 겪지 않은 젊은 중국인들의 삶을 그린 책이다. 영국 출신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현재 중국에서 살면서 직접 만난 중국 젊은이의 생애를 가까이에서 듣고 기록하여 전지적 시점으로 쓴 책이다. 넷플릭스에 본 영화 [먼 훗날 우리]를 생각나게 하였다.

도서관 신간코너 한쪽을 장식했던 [4차 산업혁명 도서]라는 안내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이 벌써 끝났는가? 아니면 벌써 그 열기가 식었는가?

43번 오극관(43 power pentode) 싱글 앰프 프로젝트 - [12] 케익팬에 앰프 꾸미기

언제까지 나무판 위에 얼기설기 배선한 상태의 앰프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다시 앰프를 꾸미기로 하였다. 오늘로써 [43번 오극관 싱글 앰프 프로젝트] 글이 12회째가 되는데, 과연 끝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소한 개량을 거치면서 몇 년이 지날 수도?

마트에서 구입한 케익팬. 고행의 시작이었다. 이때가 약 보름 전의 일이다.


30 mm 홀쏘로 구멍 뚫기. 홀쏘는 무척 위험한 물건임을 깨달았다.


부품 고정을 시작하였다. 위 사진에서는 출력관 소켓을 내부에서 고정하는 것으로 임시 배치를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바깥쪽에 부착하였다. 초단관도 소켓을 섀시에 고정하고 하드와이어링을 하면 보기는 훨씬 좋았을 것이다. 제작 편의상의 문제 때문에 초단관 회로는 소켓을 통해서 만능기판에 직접 고정하게 되었고 결국은 아래 사진과 같이 매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드러난 배선에 감전이 되지 않도록 적당히 가리는 일이 숙제이다. 작동 전압은 150 V 수준이다.


임시 배선을 하여 소리가 잘 나는지 확인하였다. 아래의 사진은 어젯밤에 찍은 것이다. 회로는 케익틀에 꾸미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소리가 훨씬 커진 느낌이다.


퇴근 후에만 조금씩 작업을 하다보니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케익팬을 쓰도록 영감을 준 것은 다음의 사이트("A Cake Tin Makes A Great Tube Amp Chassis")였다.

출처: https://hackaday.com/2016/06/05/a-cake-tin-makes-a-great-tube-amp-chassis/
보기에도 독특하고 구하기도 쉬운 재료라고 생각하여 케익팬을 선택했는데 실제로 완성을 앞둔 지금의 심경은? 글쎄,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은 재료이다. 가공은 쉬운 편이다. 전동 드릴로 구멍을 내거나 실톱으로 큰 면적을 잘라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드릴로 구멍을 뚫으면 테두리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성질이 강해서 손을 다치기 쉽다. 실제로 손가락을 꽤 깊이 찔려서 피를 좀 보았다. 그리고 표면에 코팅이 된 상태여서 테이프나 핫멜트가 잘 붙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사진에서 보인 배전압 정류부를 아직도 고정을 하지 못하였다. 나무판이라면 핫멜트로 붙여버리면 되겠지만.


다음으로는 히터의 접지를 통해서 험을 제거해야 한다. 출력관은 직류 점화이니 별다른 처리를 할 것이 없다. 정석대로라면 초단관 히터 전원의 중점에 해당하는 탭을 접지를 해야 한다. 중간에 해당하는 탭이 없다면 아래 그림의 방법 중 적당한 것을 택하면 된다.

출처: The Valve Wizard
오른쪽 중간의 그림에서 10R 저항을 넣는 것은 애노드와 히터 핀 사이에 단락이 일어났을 때 일종의 퓨즈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음은 내가 사용한 전원트랜스이다. 이것은 순전히 히터 점화만을 위한 것이다. 플레이트 공급용 고전압은 12 V 어댑터 => DC-DC boost converter를 통해서 만들어지며, 케익틀 내부에 숨어있다.


히터 전압을 6 V로 한다면(9 - 15 V) 적당한 중간탭(12 V)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12 V로 점화를 하려면 마땅한 중간탭이 없다. 여기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다섯개의 탭 중 아무거나 접지를 하면 어떻게 될까? 저항을 경유하지 않고 전선을 이용하여 실험을 해 보았다. 험이 사라졌다! 다섯개의 탭 중 그 어느것을 접지하든지 효과는 마찬가지였다. 꼭 히터의 중간 전압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선을 뽑아내어 접지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대단히 위험한 시도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정확히 중간지점에서 접지를 하는 것에 비해서는 험 제거 효율이 떨어질까? 실용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본다.

2018년 12월 10일 월요일

Waterman 만년필, 망가지다

지난 9월부터 쓰던 Waterman 만년필(관련 글 링크)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이후로 닙 상태가 아주 불량해졌다.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다가 캡을 벗긴 상태에서 떨어뜨렸는데 닙 부분이 바닥에 그대로 부딛히면서 눈에 뜨일 정도로 닙이 휜 것이다. 처음에는 글씨가 잘 써지질 않았다. 휜 곳을 편다고 종이 딱딱한 곳에 대고 이리저리 누른 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글씨가 너무 굵게 써지면서 남은 잉크가 놀라울만큼 빠른 속도로 줄어들더니 이제는 잉크가 방울져 흐를 정도가 되었다.

가장 만족스럽게 쓰던 만년필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망가지게 되어서 허탈하기만 하다. 전적으로 사용자의 실수이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잘 관리하면 대를 물려서 쓸 수도 있지만, 부주의에 의해서 쉽게 망가지기도 하는 것이 만년필이다.

워터맨 만년필 서비스 센터(링크)에 보낼까? 내가 직접 구입한 것이 아니라서 보증서나 구입 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데 서비스 접수가 될지 궁금하여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음.. 왜 안받지?

'삐~'

이런, 팩시밀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홈페이지를 보고 (주)항소 고객지원실에 다시 제대로 전화를 걸어서 문의하니 보증서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구입처를 통해 서비스를 맡길 때에는 아마도 그곳에서 샀음을 입증할 수 있는 영수증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문제를 겪기 싫다면 저가형 만년필의 최강자인 프레피를 구입하여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약간은 거친 필기감, 고급스럽지 않은 닙... 그러나 가격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값이 싸지만 늘 새것을 쓰는 '일회용'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비싸고 관리가 힘들지만 내 손에 맞추어져 가면서 나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 물건을 쓸 것인가? 선택과 취향의 문제이다.

당분간은 파커 IM Premium Vacumatic Pink를 다시 쓰기로 한다(관련 글 링크). 지난 가을 이후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말라붙었던 닙을 따뜻한 수돗물에 담가서 잉크가 다시 나오게 만들었다. 이 미끄덩거리는 만년필은 구입한지 1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손에 익숙하게 잡히지를 않는다.

펜을 쥐는 방법과 글씨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는 손가락의 문제가 아니고 뇌의 문제일 것이다. 운동처럼 훈련을 통한 근육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발끝으로 흙 위에 글을 쓰거나 손바닥 전체로 작대기를 쥐듯 필기구를 쥐고 글씨를 써도 그 사람의 원래 글씨체에 가깝게 써 지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요즘 뇌의 가소성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언젠가는 뇌를 자극(혹은 조작?)하여 순식간에 글씨체를 바꿀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쉽게 말해서 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식한다 해도 내 글씨체는 그대로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목소리는? 사람마다 고유한 목소리는 성대가 전부 달라서 그런 것일까, 혹은 뇌에서 보내는 신호가 사람마다 달라서 그런 것일까? 발성기구를 통째로 다른 사람의 머리에 이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실험을 해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구글링을 조금 해 보니 사람마다 고유한 목소리는 성대 구조가 전부 달라서 그렇다는 글이 있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는 누구나 다 비슷하다. 이 경우에는 남아 여아를 불문하고 성대 구조가 비슷하지만, 일단 성별에 따라서 성대 주름막 부분이 자라는 속도가 달라지고, 성인이 되면 지문처럼 전부 다른 목소리를 갖고록 변한다고 한다(사람마다 목소리가 다 다른 이유는?). 아, 그렇구나...

2018년 12월 8일 토요일

독서 기록 - 인듀어(Endure)

알렉스 허친슨 지음, 서유라 옮김. 서문은 <티핑 포인트> <아웃라이어>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윌이 썼다. 제목을 <지구력> 또는 <인내력>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했을 터인데 영문 원제는 명사형 Endurance가 아니고 Endure이다. 그렇다면 명령어로서 <참아라> 정도의 뜻인가?



이 글은 휴대폰에서 블로거 앱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책 표지 사진을 찍어서 크기 조정까지 하였는데 정작 이미지를 글 중에 삽입하는 기능을 찾지 못하겠다. 일단 글을 올린 다음 나중에 PC에서 삽입해야 되겠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최근 경험하거나 접한 정보가 묘하게도 이 책과 연관성이 있다. 얼마 전에 모 기업에서 발표를 하면서 서론 부분에서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우주선 Endurance호를 언급한 일이 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남극에서 발견된 10가지 기이한 것>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는데, 이에 따르면 탐험가 섀클턴이 배를 이끌고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1915년 1월 꽁꽁 얼어버린 바다에 갖히고 마침내 배가 부서지면서 이를 포기하고 나오게 되는데 이 배의 이름이 바로 인듀어런스호다. 이 일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탈출로 일컬어지며 오늘 읽은 책 <Endure>의 앞부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공교롭게도 극심한 추위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사건인 장진호 전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본 것도 엊그제의 일인데, 요 며칠 동안 강추위가 몰아치면서 남극 탐험대의 처절한 탈출과 흥남 철수로 이어지는 장진호 전투의 기록 영상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여담이지만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공격과 혹독한 추위를 뚫고 흥남을 통한 미국의 철수 역시 됭케르크 철수에 버금가는 성공적인 철수작전이었다 한다. 그러나 됭케르크 철수에서는 병사들만이 철수하였지만 흥남 철수에서는 군인과 상당한 물량의 군수물자와 더불어 많은 인원의 민간인도 같이 탈출시켰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물론 됭케르크 작전에서는 민간인 선박이 군인들의 탈출에 참여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탐험가나 운동선수와 같이 극한의 상황까지 체력을 소모하면서도 결국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소개하였다. '막판 스퍼트'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저자 자신이 달리기 선수 출신의 물리학 박사이자 칼럼니스트라서 자신이 겪은 경험담을 매우 생생하게 소개하였다. 젖산의 축적, 산소 공급의 한계 및 에너지의 고갈, 탈수, 심부체온 상승 등 생리학적인 면에서 육체의 능력을 소진시키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육체적 피로란 더 이상 몸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뇌가 느끼고 지령을 내리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신체의 한계는 지속적인 운동 또는 극한 상황(잠수, 오지에서 탈출하기 등)에서 우리가 죽을 것 같이 느끼는 순간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라톤을 마치고도 국기를 들고 트랙을 한바퀴 더 돌 수 있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도저히 더 힘을 쓰지 못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도 연료통은 아직 절반 혹은 그 이상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뇌는 한계상황이 오기 훨씬 전에 피로감 또는 고통으로 경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며, 학습 또는 뇌를 잠깐 속이는(?) 것으로 그 한계를 더욱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 지구력을 측정하는 시험에서 눈으로 보고 결정해야 하는 작업을 같이 부과하면 지구력이 훨씬 떨어진다고 한다. 이는 기존의 상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를 역이용하면 신체적 지구력을 더 키우는 훈련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분위기는 신체의 한계는 운동생리학적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는 극단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극단 사이에 있다.

뇌를 자극하는 전극을 단 헤드폰 비슷한 도구(경두개직류자극 tDSC)가 상업화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효과가 완벽하게 입증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언젠가는 운동선수나 육체를 쓰는 사람을 착취하기 위한 것으로 팔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이런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Genomics 전공자로서 빠지기 쉬운 오류는 생명체의 능력이 유전체에 새겨진 정보의 범위에 갖혀있다고 보는 것이다. 환경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전체라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환경 요인을 거론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체의 능력, 특히 뇌는 매우 유연하며 신비로운 기관이다. 섣부르게 '나의 능력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휴대폰으로 글을 쓴다는 것

예상하지 못한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면서 주말을 타지역에서 당분간 보내게 되었다. 꼭 이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12월에 접어들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빈도 또한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분산되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글은 휴대폰에서 블로거 앱을 통해서 쓰고 있다.

휴대폰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손가락 두 개만을 써야 하니 입력 작업의 속도가 오르지 않고 오타가 잦다. 화면 자체가 작으니 글 전체를 띄워놓고 분량이나 균형을 맞추기도 어렵고, 스타일이나 링크를 마음대로 지정하는 것도 어렵다. 더구나 컴퓨터라는 것 자체가 글을 쓰는 방법을 많이 바꾼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을 통해 찾은 다른 근거를 인용하거나 링크를 거는 일이 거의 필수가 되면서 멀티 태스킹이 불편한 휴대폰에서는 오로지 내가 작성하는 텍스트에만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창을 하나 더 띄우고 맞춤법(특히 띄어쓰기) 점검을 수월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흠이다. 구글 플레이에서 멀티 태스킹용 앱을 하나 받아서 설치해 보았으나 잘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공책에 필기구로 직접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외부에서 인용한 그림이나 링크 같은 것이 난잡하게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렇게 작성한 글이 학술적 용도의 글로 최종 완성된다면 온갖 주석과 참고문헌 인용으로 범벅이 되긴 하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주석을 맞닥뜨리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과연 하이퍼텍스트가 문서의 구조를 고도화하고 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있는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인터넷을 매체로 전달되는 문서에는 아무래도 이미지가 있어야 독자의 시선을 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감상 후기 - 전문적인 평론가가 아닌 일반인이 쓴 것 - 를 예를 들어 찾아보자. 중간 중간에 영화 장면이나 동영상이 삽입되지 않은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대표 이미지가 될만한 것을 삽입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휴대폰만을 가지고 글을 쓰다보니 독자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 그러한 노력이 다 덧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창을 하나 열어놓고 내가 작성하는 글과 관련된 사실이 정확한지, 다른 인용할 자료는 없는지 찾아보는데 상당한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는 쓰는 글의 목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기사나 학술문서를 쓴다면 이러한 행위가 당연하지만, 만약 시를 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넷 + 모바일 기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바꾸어 놓았다. 여유 시간을 보내는 방식, 질문과 대답하는 방식, 글을 쓰는 방식, 정보를 입수하는 방식.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혹시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동차 뒷자리에 있던 아들의 대답은 '잠깐만요 (휴대폰으로) 찾아볼께요'였다. 내가 질문을 누구에게 던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의견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정보 검색의 중재자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

검색하는 인간을 Homo 무엇이라 해야 할까?

검색이 아니라 능동적 학습과 사고, 그리고 체계적인 글쓰기라는 고전적인 활동 - 여기에 '인문학적'이라는 양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 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늘 기차 안에서 읽은 책의 독후감도 휴대폰을 통해서 써야 한다. 외부 자료의 도움 없이 양손가락 타이핑으로 완성해 보겠다.

2018년 12월 4일 화요일

CLC Genomics Workbench 12.0 발표

CLC Genomics Workbench 12.0이 공개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서 파일을 받아서 설치를 완료하였다.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 처음에 잠깐 떴다가 사라지는 화면(이를 스플래시 화면이라고 하던가?)이 좀 더 신선하게 바뀌었다.


아무 작업을 띄우지 않은 메인 화면("View Area")에는 클릭을 할 수 있는 항목이 늘어났다. 약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를 Welcome Center라고 부른다. 편집을 하여 항목을 줄이거나 늘리지는 못한다.


공식 출시일은 2018년 11월 28일이었다. Reference data manager 도구가 생겼고, Workflow Role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몇몇 기능의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Track 개념도 아직 유용하게 쓰지 못하고 있는데 Workflow에 이어서 Workflow Role이라니!

새 버전의 특징은 다음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하다. 웹페이지 상단에 Current line, Previous line 및 Archive라는 항목이 있으니 여기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이전 버전의 기능 및 특징 일람표를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qiagenbioinformatics.com/products/clc-genomics-workbench/latest-improvements/current-line/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상당히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command line interface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Sanger sequencing data를 다룰 때에는 phred-phrap-consed가 아직도 손에 착착 달라붙는 것은 물론이다.

Galaxy에 대한 약간의 경험이 있지만 데이터 구조에 대한 개념이 아직 잘 잡히지를 않는다. 뇌는 갈수록 노화하는데 익힐 것은 여전히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