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6일 일요일

[독서 기록] 『유교 탄생의 비밀』과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20년쯤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던 김경일 교수의  2013년도 저술 '갑골문·청동문·죽간으로 밝혀낸' 『유교 탄생의 비밀』을 읽었다. 유교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 의식을 가져 보고자 일부러 고른 책이다. 사서삼경은 고사하고 『논어』조차 제대로 읽어 보지 않은 내가 과연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사상 기조를 제대로 알고 난 다음에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혹은 배척?)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남은 인생을 다 걸어도 모자랄 것이다. 부모님에게 받은 은혜를 다 갚은 다음 비로소 세상에 나가서 뜻을 펼치겠다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아주 오래 전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 또는 사상 체계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유학(또는 유교)에서 정말 중요시하는 것은 조상을 '신'으로 여기고 섬기는 행위, 즉 제사라는 것을 이번 독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현대에 받아들여지는 유교는 흔히 공자에 의해 정립된 사상이라고들 여기지만, 이 책에서는 유교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경전을 주요 텍스트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갑골문 등 유교의 근본에 더 가까운 고대 기록을 파헤쳐 가면서 유교란 결국 자연을 숭배하던 원시 종교가 왕족의 조상에 대한 숭배로 정형화되고, 그것이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오면서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것으로 보았다. 약간 과격하게 말하자면 조상신(정확하게는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었던 왕의 조상들)에 대한 숭배 의식이 일반 가정에 퍼져 살아있는 부모에게 투사한 것이 '효'인 셈이다. 국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부자 관계('효')를 군신 관계('충')로 확대 해석하도록 만들어 어린이를 가르치면 권력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시작이야 어떠했던간에 우리가 지금 유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름지게 만드는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르려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유교에서 제사 의식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국립고궁박물관에 갔을 때, 종묘 제례에서 쓰이던 엄청난 규모의 제기를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최근 경복궁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한 태원전(궁에서 이루어지는 장례와 관련된 일을 보는 곳) 입구에서 임금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짧게 소개한 글을 접했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장엄함이나 엄숙함보다는 답답함을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돌아가신 임금의 몸을 싸는 수십 겹의 옷과 같은...

유교에서 제사를 빼면 절반 정도가 남을 것이다. 그 다음에 옛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빼면 아마도 10% 미만이 남을 것 같다. 인간이 자연을 소유물로 여기고 정복 또는 파괴하려는 욕심을 견제하려는 뜻이라면 좋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교는 과거의 질서를 지키려는 정신적 도구로 이미 이념화가 된 것이 아니었던가?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 개인의 권리, 도전의식, 창의성, 개성...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깃들일 곳이 보이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서운(=무식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얄팍한 비판의식에 머물지 않도록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엉뚱한 대안으로 구입한 책이 최진석 교수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이다. 노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큰 메시지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교과서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도덕경』 첫 구절을 놓고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한자 쓰임새가 지금과 같지 않다는 것도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것을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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