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신의료기술평가(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nHTA)는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용어인가?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오늘 쓴 글은 얼마든지 틀렸을 수도 있음을 미리 고백해 둔다.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옛말이 있다. 의료법에 '의료행위'가 정의되어 있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은 그런대로 돌아가는 중이다. 심지어 대한민국 헌법에도 표현 및 맞춤법 등 234건이나 되는 오류가 있다고 한다(링크). 헌법도 이러할진대 내가 나서서 특정 분야 법령에서 사용한 용어의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아도 나라의 시스템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학자의 특성 상 사소한 것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은 충동을 막을 길이 없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태초에 의료기술평가(health technology assessment, HTA)라는 말이 있었다. 이 용어는 1960-70년대 미 의회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평가('assessment', 보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사정査定이 맞겠지만)의 대상인 medical technology 또는 health(care) technology라는 용어는 누가 처음 사용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가천대 이선희 교수가 2018년 보건행정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신의료기술평가제도 운영의 개선현황과 발전방향"의 서론을 인용하여 HTA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자.

근거중심의 의사결정을 위해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 중 HTA가 수행되는데 이는 1960년대 말 미국의회에서 공식 사용된 것이다. 당시에는 'HTA를 기술의 적용과 사용으로 인한 단기 및 장기 사회적 결과를 평가하는 포괄적 형태의 정책연구'라 하였다. HTA의 주요 목적은 보건의료기술 관련 정책결정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바꾼다면 '의료기술평가의 주요 목적은 국민건강보험 급여 여부 결정에 필요한 정보(안전성 및 유효성)를 제공하는 것이다'가 될 것이다(하지만 의료법에서는 나타낸 신의료기술평가의 목적은 더 고상하고 아름답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영어로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또는 줄여서 nHTA라고 쓰기도 한다. 하지만 HTA가 아닌 nHTA라는 용어는 국외에서 널리 쓰이던 것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구글 검색 결과 때문이다.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또는 nHTA)라는 영문 용어를 쓰는 웹사이트 혹은 문서는 전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PubMed에서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를 검색어로 넣으면 81,901건의 문헌이 나온다. 그런데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로 검색하면 나오는 것은 겨우 26건에 지나지 않는다. 얼핏 살펴보니 대부분 '새로운 HTA'라는 의미로 쓰였고, 우리나라에서 발표한 논문에서만 '새로운 의료기술(new health technology)에 대한 평가'라는 의미로 쓰인 것 같았다. 차라리 nHTA가 아니라 K-HTA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뻔하였다.

WHO나 EU의 관련 문서를 보아도 HTA는 있지만 nHTA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약어든 풀어서 쓴 낱말이든 전부 통틀어서 그러하다. EU에서 발간한 Regulation (EU) 2021/2282 of the European Parliament and of the Council ... on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and amending directive 2011/24/EU라는 문서에서 HTA의 정의를 찾아 보았다.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HTA) is a scientific evidence-based process that allows competent authorities to determine the relative effectiveness of new or existing health technologies. HTA focuses specifically on the added value of a health technology in comparison with other new or existing health technologies.

그렇다. 반드시 최근에 개발된 기술만이 의료기술평가의 대상이 되라는 법은 없다.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오래 된 의료기술이라고 해서 전부 HTA 절차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기존 의료기술도 얼마든지 HTA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HTA의 개념도 변한다. Announcing the New Definition of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라는 논문(보다 정확하게는 Letters to Editor임)에서는 의료기술평가 관련 여러 국제단체가 모여서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HTA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음을 밝혔다. 내가 보기에는 의료기술의 수명 주기 어느 단계에서도 HTA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HTA is a multidisciplinary process that uses explicit methods to determine the value of a health technology at different points in its lifecycle. The purpose is to inform decision making in order to promote an equitable, efficient, and high-quality health system.

참고로 이 논문에서는 health technology의 정의도 수록하였다.

A health technology is an intervention developed to prevent, diagnose, or treat medical conditions; promote health; provide rehabilitation; or organize healthcare delivery. The intervention can be a test, device, medicine, vaccine, procedure, program, or system.

알아보는 김에 위키피디아에서 health technology를 찾아 보았다. 여기에 수록한 정의는 WHO에서 내린 것이라고 한다.

Health technology is the application of organized knowledge and skills in the form of devices, medicines, vaccines, procedures, and systems developed to solve a health problem and improve quality of life. This includes pharmaceuticals, devices, procedures, and organization systems used in the healthcare industry, as well as computer-supported information systems.

과거에는 medical technology라는 용어를 썼었다고 한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의료기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 놓으면 의사가 시행하는 기술로만 제한되므로, health(care) technology라는 용어가 요즘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시류에 따라 영어권에서는 용어 자체가 바뀌었으나 우리말은 그대로 남아 있다. Health technology를 그대로 번역한 건강기술이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현 시점에서 (health technology) = (의료기술)은 약간 어색한 등식이다.

그러면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는 다음 중 어느 것에 해당할까?

  1.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 new + {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
  2.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 { new health technology } + assessment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문서의 맥락에서 본다면 (2)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신의료기술평가에 관여하는 기관에서 발간하는 모든 안내서가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링크)에서는 아예 제목에 'New Health Technology' assessment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 생겨난 HTA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2)의 의미로 활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에서 연달아 사용한 4개의 단어 중 technology assessment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어구로서 서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도 (2)와 같이 {...technology}와 assessment를 끊어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보여준다.

새로 개발된 의료기술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보편적 진료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안전성과 유효성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신의료기술평가 제도이다. 여기에는 '체계적 문헌고찰'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근본 목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민건강보험 급여대상이 될 수준의 의료기술을 걸러내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의료기술은 비급여로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의료법 제53조(신의료기술의 평가)제1조에서 '국민건강을 보호하고...'라는 신의료기술평가의 목적과 그런대로 잘 부합한다. 그런데 통제 위주의 현 정책 때문에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의료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라는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신의료기술평가의 법적 근거.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웹사이트의 「의료법」. 빨간색 밑줄친 부분 바로 다음에 나오는 '대통령령' 링크를 클릭하면 "조문에서 위임한 사항을 규정한 하위법령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왜?


물론 안전성과 유효성을 갖춘 것만으로 요양급여 대상이 되지는 않으며, 경제성 평가(대체 가능성과 비용효과성), 급여 적정성 등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국외 문서에서 nHTA는 거의 전적으로 (1)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았다. 'HTA의 새로운 방법'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nHTA와 동일한 목적의 평가를 수행한다. HTA의 목표는 주로 정책과 관련된 의사 결정 과정에 도움을 줄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의사 결정 중에서 보험 급여 여부를 따지는 것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100%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부르는 이름은 여전히 HTA이지, nHTA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HTA란 개념을 들여와서 새로 개발된 의료기술을 평가하는 것으로 사용하면서 의료기술평가(nHTA)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런 맥락을 모르고 이 단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래? 그러면 신의료기술은 뭔데?"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의문은 신의료기술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기고 나서 이를 평가하는 것이 신의료기술평가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들기 때문이다. 국어의 구조 역시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만든다. 신의료기술평가라는 단어 자체도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신의료기술을 평가하겠다는 것인지(즉 평가 대상), 신의료기술을 가려내기 위해 평가를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신의료기술'은 (1) 평가의 대상인가, 또는 (2) 평가 결과 중의 하나인가? 의료법 제53조에서는 (1)의 의미로 쓰였고, 이를 근거로 만들어진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제2조에서는 (1)과 (2)의 의미가 혼재한다. 그러나 많은 안내자료(특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안내하는 자료)에서는 (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국내 연구진 발표 논문에서도 (2)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한번 해 보겠다. 신의료기술이란, 신의료기술평가를 통해서 신의료기술로 판정된 신의료기술이다. 단지 우리나라에서만...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960-70년대에 국외에서 '의료기술평가', 그리고 이보다 앞서 '기술평가'라는 개념이 먼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다소 독특하게 신의료기술평가라는 신조어로 바뀌면서 보건의료시스템(특히 건강보험 요양급여)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한 제도의 명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나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신의료기술'의 정의를 찾아 헤매는 답 없는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의료기술평가(nHTA)는 HTA의 매우 특별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new' HTA라고 볼 수도 있다. 왜 특별할까?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의료기관에서 이를 사용하고 환자에게 돈을 받지 못하므로. 이를 임의로 사용하면 최악의 경우 처벌을 받는, 규제의 회색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 평가제도의 원래 의도는 건강보험 요양급여가 될 만한 수준의 안전성·유효성을 갖춘 'new health technology'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의료기술이 등장하여 임상현장에 들어오는 데에는 걸림돌이 된다.

2002년 8월 보건복지부에서 「신의료기술등의 결정 및 조정기준 개정」을 발표한 일이 있다(링크). 여기에서 사용한 신의료기술이라는 용어는 아직 보험급여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의료기술(미결정 행위 등)를 의미한다. 의료법에 근거하여 현재 NECA가 주관하는 신의료기술평가 제도에서 일컫는 신의료기술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에 대하여 임철희 변호사는 대한내과학회지 제97권 제2호에 발표한 논문 "신의료기술평가 전의 신의료기술은 비급여대상진료이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2007년 도입된 의료법의 "신의료기술"이라는 용어는 2002년 1월 1일 도입되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국민건강보험법령상의 "신의료기술"이란 용어와 전혀 관계없었음을 지적해 둔다.

기술 관련 용어는 전부 영어권에서 먼저 그 개념이 정립되고 이를 제대로 국문으로 번역해야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면 국외의 보편적인 사용례를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 글은 앞으로 좀 더 조사를 통해서 살을 찌워 나갈 예정이다. 계속 분량이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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