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5일 목요일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혁신이라는 낱말

혁신(革新)은 '낡은 것을 바꾸거나 고쳐서 아주 새롭게 함'을 뜻하는 낱말이다. 영단어로는 innovation인데, 가끔 breakthrough(돌파구)를 혁신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FDA에서 운영하는 Breakthrough Devices Program(혁신적 의료기기 프로그램)이 그러하다. 어떤 뉴스에서는 이를 획기적 의료기기 프로그램으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Emerging technology(신흥 기술)도 이러한 부류의 기술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근본적으로 생물학자이고, 세부적으로는 분자생물학을 전공하였다. 직장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미생물 유전체학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이다. 예기치 않게 보건의료 관련 법·제도를 공부하게 되면서 혁신적인 의료기술이 어떻게 의료시장에 자리를 잡고 그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지불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혁신의료기기에 관해서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용어에 대해 떠올리는 의미와, 법령에서 정의한 것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의료기기산업 육성 및 혁신의료기기 지원법 」 제1조제3호에서 혁신의료기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혁신의료기기"란 「의료기기법」 제2조제1항에 따른 의료기기 중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 로봇기술 등 기술집약도가 높고 혁신 속도가 빠른 분야의 첨단 기술의 적용이나 사용방법의 개선 등을 통하여 기존의 의료기기나 치료법에 비하여 안전성·유효성을 현저히 개선하였거나 개선할 것으로 예상되는 의료기기로서 제21조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으로부터 지정을 받은 의료기기를 뜻한다.

법을 근거로 식약처장으로부터 지정을 받은 의료기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법에 따라 혁신의료기기와 그렇지 않은 것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따라서 혁신성을 갖춘 의료기기 전반을 지칭하려면 다른 용어를 써야만 한다. 뒤에서 설명할 신의료기술도 마찬가지이다. 법령에서 어떤 의미를 제한하여 사용하는 신의료기술과, 새롭게 개발된 의료기술을 뜻하는 신의료기술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좋은 의미의 단어를 법령에서 다 갖다 써버려서 난처한 상황을 만들 것이 아니라, 미국의 510(K), PMA(premarket approval)와 같이 약호를 잘 만들어서 새로 만든 용어의 뒤에 붙인다면 법령에서 정의한 의미를 정확히 사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정된 혁신의료기기에 관한 사항은 고시가 아니라 공고 형태로 일반에 공개된다(2023년 5월 19일자 공고). 소프트웨어의 형태를 띤 것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혁신의료기술은 무엇인가? 혁신의료기기를 사용하는 의료기술(의사의 행위에 중점을 둔 표현)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신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의료기술을 의료기관에서 사용하고 환자에게 돈을 받으려면(이에 더하여 광고를 하려면)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새로 도입된(수입 또는 국내 개발) 의료기기에 대한 식약처 허가를 받고 이것의 활용 행위를 적법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의료기술은 먼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기존 요양급여목록에 등재된 행위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판정한다. 기존 것과 같으면 의료기관에서 기존 수가대로 쓰면 되고, 기존 것과 다르면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에서 신의료기술평가라는 것을 받아서 신청 기술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한다. 판단 근거는 신청자가 제출한 자료가 아니라, NECA에서 전세계의 논문을 탐색하여 만들어낸다. 충분한 논문이 쌓일 수준의 기술이라면 신의료기술이 아니라 이미 '헌' 의료기술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민건강보험은 효과가 입증되고 안전한 의료를 전국민 대상으로 베풀고 그 비용을 부담하는 취지의 제도이므로, 단지 가능성만을 가지고서 보험 대상으로 삼아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안전성은 확보되었지만 잠재성이 있는 의료기술을 의료현장에서 먼저 정해진 기간 동안 비급여 또는 선별급여로 사용하면서 근거 축적의 기회를 주고, 사용 기간이 끝나면 신의료기술평가를 받게 하는 중간적(혹은 예외적) 제도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혁신의료기술이다. 근거법령은 「의료법」과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이 중심이 된다. 혁신의료기술을 신청하려면 안전성은 이미 확보되어 있어야 하고, 잠재성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혁신성과 잠재성은 서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여기에서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게 된다.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으면 병원을 대상으로 판매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환자에게 쓰이고 비용을 받으려면 혁신의료기술평가 트랙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료기기 지정에서 말하는 혁신과, 신의료기술평가의 별도 트랙에서 말하는 혁신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 헷갈리는 것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혁신의료기술은 혁신의료기기를 사용하는 의료기술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점이다.

작년부터 혁신의료기기 통합 심사·평가 제도라는 것이 생겨나서 혁신의료기기 지정과 이의 활용을 위한 혁신의료기술 평가 과정을 빠르게 도와주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혁신이라는 낱말이 정확하지 않게, 그리고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혼란을 초래한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미 혁신의 사전적인 의미에 대해서 논하였다. 혁신은 가능성의 단계를 넘는 일이어야 한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이미 우리 주변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데, 1950년대에 연구실로부터 그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에는 그 누구도 이를 혁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뒤 세상을 뒤집어 놓을 잠재성을 가진 기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몇 명 있었을 것 같다.

무릎을 탁! 치면서 읽었던 지난 3월의 히트뉴스 기사("언어의 향연? '혁신적 의료기기'는 최선이었나")의 일부를 약간 풀어서 인용해 본다. 부제는 '무수한 혁신들, 그래서 혁신이 평범해졌다'이다.

혁신적 의료기기(3월 2일에 정부가 발표한 바이오헬스 신산업 규제혁신 방안에 등장한 용어) 지원 목적은 융복합 기술 발전으로 개발되는 의료기기를 통한 의료 질 개선과 의료비 절감이다. 이같은 면에서 기존 혁신 의료기기와 혁신 의료기술을 아우르고, 나아가 확장하는 혁신적 의료기기라는 용어는 재정적 한계라는 점과 부딪혀 시장진출 대기실만 넓히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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