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쯤 전이었든가, Victorinox 241441 Maverick GS Dual Time 손목시계를 차고 출근을 하였다(2017년 Ashford에서 구입함. 당시에 쓴 글은 여기 있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시간이 맞지 않는 상태로 멈추어 있고 날짜도 11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의 사건을 촉발한 것은 아래 사진에서 왼쪽 시계이다.
오늘은 차 수리를 맡기기 위해 연차 휴가를 냈다. 아침에 서둘러 고양시 일산서구로 가서 2008년식 토스카를 몰고 마두동에 있는 카센터에 들렀다. 차 상태를 확인한 뒤 일단 차량 정기점검을 먼저 한 다음 수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사설 검사소(블루핸즈 성도모터스)로 차를 몰고 가서 순식간에 합격 판정을 받고(오, 다행이다!) 다시 카센터로 가서 엔진 수리를 맡겼다. 엔진 오일과 미션 오일이 심하게 흘러내린 흔적이 많아서 꽤 많은 부분을 수리해야 한다. 카센터에서 국립암센터까지 걸어 나와서 1200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까지 온 뒤 점심을 먹은 다음, 이번에는 토레스를 몰고 구기동에 있는 쌍용자동차 서비스프라자로 이동하여 타이어 공기압을 조정하고 에러 코드를 지운 뒤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시계 배터리를 갈러 가면 되겠구나.
시계를 찾아서 주머니에 넣고 시내버스에 올라 종로 3가로 향했다. 적당한 시계 수리점에 가서 시계를 맡겼다. 혹시 뒷뚜껑 안에 날짜가 써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2022년이라고 한다. 어라? 그럴 리가 없는데. 빅토리녹스 시계 배터리를 작년에 갈지는 않았는데.
배터리를 교체하고 뒷뚜껑을 닫은 수리점 주인은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시계를 나에게 넘겼다. 아니, 대충 맞추면 되지 않겠어요... 시계를 넘겨받은 나는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바늘이 저절로 빙빙 돌더니 12시 정각에 가서 딱 멈추었다.
아이고! 빅토리녹스가 아니고 론진 V.H.P.(L3.716.4.76.6)였다. 2020년 여름에 구입하여 소중하게 사용하다가 작년 말에 정식 CS 센터에서 배터리를 갈았었다. 그러니 뒷뚜껑에 2022년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엉뚱한 시계를 들고 와서 괜히 멀쩡한 배터리를 갈았던 것이었다.
대단히 고맙게도 수리점 주인께서는 배터리를 원상복귀해 놓고 비용을 받지 않은 채 돌려주었다. 론진 V.H.P.는 자체 교정 기능이 있어서 용두를 돌릴 일이 별로 없다(사용 설명서를 제발 철저하게 읽자!). 일단 구입처로 가서 서비스를 맡기기로 했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을까? 아침부터 너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옷장 시계 보관함에서 엉뚱한 것을 갖고 나온 것이다.
터덜터덜 광화문까지 걸어왔다. 제품 보증서는 대전 집에 두고 왔기에 작년에 배터리 교체를 위해 주고받은 서류를 지참해야만 한다. 용두를 몇 번 돌린 것으로 고장이 날 것 같지는 않지만, 정식 CS 센터가 아닌 곳에서 시계를 열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아무래도 처리하기가 번거로워진다.
빅토리녹스 '매버릭' 시계까지 지참하여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향했다. 시계가 멈춘 경위를 설명하고 가방을 뒤졌는데, 아뿔싸! 서류를 두고 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구입처를 통해서 작년에 배터리 교체를 했던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그 매장에서 구입한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무브먼트를 교채하고 폴리싱 등을 하면 32만원까지 들 것이라고 하였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을 통째로 교환하는 것에 해당한다. 무브먼트라는 것이 부품 단위의 수리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오토매틱 시계의 무브먼트를 전부 분해해서 오버홀을 하듯이 말이다. 부디 큰 비용이 청구되지 않기를 빌면서 백화점을 나왔다. 설명서를 다시 숙독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매버릭의 배터리를 교체하는 일이 남았다. 이것은 남대문 시장에서 적당히 시계방을 찾아서 갈 심산이었다. 다시 종로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그런데 종로와는 달리 대로변에는 금은방을 제외하면 눈에 뜨이는 시계방이 없었고, 골목 입구에 노점이 몇 개가 보였다. 이런 곳에서 배터리를 갈아도 될까? 예전에 대전 중앙로의 노점에서 시계 배터리를 갈다가 뒷뚜껑을 닫지 못해서 근처의 시계방으로 SOS를 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매버릭은 먼지 그득한 거리의 좌판에서 배터리를 간다고 걱정을 할 수준의 시계도 아니니 남대문에서 모든 일을 끝내기로 했다.
적당한 노점을 골라 배터리 교체를 부탁하였다. 당연히 신용카드는 받지 않는다. 뒷뚜껑을 열더니 기존에 채워져 있던 배터리는 별로 좋은 제품도 아니고 이 시계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응? 그럴 리가? 대전에서 이 시계를 손보았던 곳은 꽤 기술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뒷뚜껑을 닫기 전에 세심하게 먼지를 제거하고, 오링에도 기름을 잘 발라서 재조립하는 등 꽤 성의 있게 작업을 했었다. 물론 교체 비용은 다은 곳보다 비쌌다.
배터리를 갈아 끼운 뒤 미세한 볼트 두 개를 다시 제자리에 찾아 끼우는 과정에서 노점상 아저씨는 꽤 고생을 하였다. 시계 수리공이 흔히 쓰는 그런 확대경도 아닌 일반 돋보기를 쓰고 부품을 다루는데, 저러다가 핀셋 끝에서 툭 튀어 달아나서 길바닥에 떨어지면 영영 못 찾지 않을까? 앗, 무브먼트 전체를 덮는 하얀 링 모양의 플라스틱 커버 부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워 올린 것 같았다.
한참을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 작은 나사를 손가락 끝에 쥐고 길 건너편 노점으로 향하신다. 아이고오... 혹시 거기에서 몰래 순간접착제로 붙이는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그렇게 하여 배터리 교체는 끝났다. 나사 고정에 하도 고생을 하셔서 천 원을 더 얹어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점 진열장을 기념 촬영하였다. '잠수부 시계(dive watch)'는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
교체 후 기념 촬영. |
내가 엉뚱한 시계를 들고 나가서 확인도 안하고 종로의 수리점에서 넘긴 것부터 큰 잘못이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현장 상황이 모든 일을 그르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시계 수리점의 상황을 보자. 허리 높이쯤 되는 진열장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작업 의뢰의 시작 아니겠는가? 만약 그랬더라면, 내가 엉뚱한 시계를 갖고 왔음을 금방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처음 들렀던 종로의 수리점은 갔던 곳은 작업대가 고객을 향하고 있고 작업대와 고객 사이에는 투명 창으로 막힌 구조였다. 수리점 주인은 시계를 투명 창 위로 넘겨 달라고 했다. 시계는 내 주머니에서 곧바로 창을 넘어서 넘어가면서 내 눈으로 최종 확인을 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아무 비용알 받지 않고 시계를 원상복구하여 돌려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배치와 동선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디자인'하지 않은 작업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큰 교훈을 깨달았다. 물론 남대문 골목길의 시계 판매 및 수리 노점에 대해서는 이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가장 낮은 가격에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그에 걸맞는 위험을 동반한다.
론진 매장에서 전화가 올 때, 오늘 지불한 멍청비용이 정확히 얼마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2023년 5월 4일 업데이트
이틀 전, 론진 손목시계의 점검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시계를 찾아왔다. 단순히 유격이 생긴 것을 조정한 것이라서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세척 서비스는 덤으로 받았다.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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