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8일 수요일

세상은 넓고 공부할 것은 많으며 들을 음악도 많다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영광의 깃발(원제: Glory)>이라는 1989년도 미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남북전쟁에서 흑인들로만 구성된 부대(제54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와 그 지휘관인 실제 인물 로버트 굴드 쇼(Robert Gould Shaw, 1837-1863)의 이야기이다. 노예 신분을 갓 벗어난 흑인들이 - 노예 제도를 허용하지 않던 북부에 살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남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상태였을 수도 있음 - 군대에 자원해서 실제 전투에 가담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와그너 요새 공격에서 비록 대패하였지만, 이들의 용맹은 더 많은 흑인이 남북전쟁에 참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전 부대원이 가로로 길게 늘어서서 전혀 엄폐도 하지 않은 채 적진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는, 매우 위험하고 비능률적인 전투 대형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이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1·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남북전쟁 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하나의 미국을 만들어 나가는 값진 전쟁으로 미국인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로버트 굴드 쇼와 매사추세츠 54연대 기념 부조. 출처: 미국 National Park Service.

남북전쟁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게티즈버그 전투(1863년)을 재연하는 행사는 지금도 인기가 있는 것 같다. 행사 참가자는 북군이든 남군이든 원하는 역할을 맡을 수가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6·25 전쟁의 특정 전투를 재현하는 행사를 갖는다면? 결국 이 전쟁을 통해 어느 쪽으로든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의 역할을 맡고 싶은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재연 행사가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역사를 미화하는 일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미 남북전쟁 재연행사 "역사 보존" vs "백인중심 추종" 논란(2019년 6월 25일 한경 기사 링크)

앞으로 보름 남짓이면 6·25 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지만, 아직도 이 전쟁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서 완벽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심지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관한 결론이 당시 국내에 잘못 보도되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국내 신문사의 보도는 완전한 오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단순한 오보인지, 혹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잘못된 보도로 말미암아 국내에는 맹렬한 반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분단의 고착과 나아가서는 동족 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까지도 이르게 된 것이다.

동족 상잔이라는 면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한반도의 6·25 전쟁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전자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성장통이었고, 후자는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자 그로 인한 서로간의 적대감을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한 상태로 갖고 있어야 하는가? 전쟁이 끝난 뒤 흐른 시간이 달라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6·25 전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직도 쉽지 않다. 내전인가? 강대국 사이의 대리전인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자주적으로 준비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은 없는가? 2014년 프레시안에 실렸던 기사 '6·25 전쟁'도, '한국전쟁'도 틀렸다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으나 링크 접속이 현재 원활하지 않아서 유감이다.

국가 사이의 갈등이 가장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역설적으로 전쟁은 새 질서를 만들기도 하고 기술의 극적인 발전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전쟁은 둘도 없는 비즈니스 기회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전쟁을 장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폭력이라는 인간의 내재적인 속성을 잘 다스려서 이를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승화해야 한다.

두 번째 주제인 음악 이야기로 넘어가자.

음악을 꽤 좋아하면서도 '이러한 거물 음악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유튜브를 통해 미처 몰랐던 곡을 들으며 감동에 빠지다가도, 내가 참으로 체계 없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자괴감 비슷한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칼라 블레이(Carla Bley)라는 1936년생 재즈 뮤지션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틀 전. 그녀는 2018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발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Carla Bley(사진 출처 링크)

"니 칼라 블레이 들어봤나"...90년대 음악애호가들의 단골멘트(매일경제 2021년 1월 9일 기사 링크)

(1987년 앨범 'Sextet'에 담긴 'Lawns'라는 곡은) 이후 이 곡은 음악 좀 듣는다는 뮤지션들이 라디오 음악 방송에 나와서 '이 곡 잘 모르셨죠'하는 느낌으로 소개하는 대표곡이 됐다.

다음 유튜브 동영상은 Carla Bley와 Steve Swallow의 <Lawns> 연주이다. 그렇다! 난 이틀 전까지 이 곡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존 콜트레인은 알면서 칼라 블레이를 모르면 무식한 건가? 아직도 찾아 들을 새로운 음악이 많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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