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 일요일

"단색화(Dansaekhwa)를 사세요"

이미 위키백과에도 오른 단색화(Dansaekhwa)라는 용어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화랑가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전시 관련 간행물에서 바로 며칠 전에 이에 대한 기사를 본 것이다. 분명히 우리말인데 왜 이를 영어단어로는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인가? 재벌(Jaebeol)이나 화병(Hwa-Byeong)처럼 한국 사회·문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낱말이 서구에 신조어로 소개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색화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한 가지 색으로만 그린 그림'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을 이룬 단색조의 미니멀리즘계 추상회화 작품들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미술관과 화랑(갤러리)을 한 달에 두어번 다니는 정도의 사람이 단색화라는 말을 모르면 부끄러운 일인가? 한국 추상미술의 매우 중요한 사조라는데?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그저 감상만 하는 사람이었지 비평하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재산 증식을 위해 미술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과거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줄리안 오피의 판화 작품(아주 작은 소품이었다)을 두 개 구입한 일은 있지만.

지난 주말, 인사동 화랑가를 둘러보다가 평소에 잘 가지 않던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판매가 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한 화랑을 들어가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 그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들은 벽에 걸지 못하고 겹쳐서 세워두기까지 한 곳이었는데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 많았다.

"단색화를 사세요"

천천히 걸린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이가 지긋한 화랑 주인께서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해 보라면서 꺼낸 말이 이것이었다. 화랑 입구에 놓인 명함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대표라는 직함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그 어르신이 화랑의 실질적인 소유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우리 부부를 그림 재테크의 길로 너무나 전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K Auction을 다니면서 어떤 그림이 비싸게 팔리는지 반 년 정도 공부를 하면 감이 잡힌다고 한다. 그러면 조금씩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하여 값이 오르면 팔기를 반복하면 된다고. 판화는 유일한 것이 아니니 값이 나가지 않으며, 구체적인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런 사람의 것을 지금 사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서울에 작은 집 한 채 사고 싶다고요? 부인의 그런 꿈도 못 이루어 주겠어요? 나는 돈 한 푼 없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장사를 해서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생각만 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못해요. 실천을 해야지. 저 친구(공식적인 화랑 대표)도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해서 10억을 벌었어요. "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는 비즈니스적인 마음을 갖고 실천하며 살지 못함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상가건물의 지하 점포가 전부 자기 것이고, 자녀들에게 비싼 집을 하나씩 다 물려주고도 아직도 집에 수백 건의 미술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성공한 화랑 주인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화랑을 찾은 젊은(?) 부부가 너무나 소심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분은 화랑을 찾는 수많은 손님들에게 똑같은 멘트를 날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로운 '고객'들이 화랑가에 유입이 되면 어쨌든 사업적으로 이득이 될 터이니까.

"난 그림을 좋아하진 않아요."

아아, 안타깝다. 기왕이면 그림 자체를 좋아하는 것에서 이 일이 비롯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이 남긴 글처럼 말이다.
知則爲眞愛 지즉위진애
愛則爲眞看 애즉위진간
看則畜之而非徒畜也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곧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인용문 링크)
단색화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알게 된 그 주에 화랑 주인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단색화가 2010년대 중후반 이후 해외 미술품 경매에서 매우 높은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미술의 자부심을 논하는 사람도 있고, 단지 거래 가격을 높이기 위한 화랑가의 기획이라는 불편한 시각도 있다. 심지어 위키백과에 단색화 열풍이라는 항목이 있을 정도니까. 이에 대하여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2016년에 발간된 월간 [미술세계]에 실린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웹사이트에는 전문이 실려있지 않으므로 조만간 도서관이나 미술관 자료실, 혹은 대학로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가서 종이잡지를 보아야 되겠다.




화랑을 나와서 원래 목적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향했다. 무료 관람(오후 6시~9시) 요일이 금, 토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박서보 작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미술관 전시 프로그램 링크; 기사). 구글 검색을 통해 얻은 짧은 지식에 의하면 그는 단색화의 거장이고 '미술시장에서 그의 이름 석자는 바코드와 같은 고유명사'라고 한다. 가만, 이름은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던가.

출처: 뉴시스

우리 부부가 앞으로 미술품 경매장을 다니는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주말에 겪은 일은 기왕이면 공부를 해 가면서 미술품을 보는 노력을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림 읽기'라고나 할까? 물론 모든 작가가 자기 작품을 보고서 공부를 하라는 뜻으로 활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스거 욘(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 링크)이 뭐라고 했더라? 작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대중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 이상의 것이 결코 아니라고 했던가? 다시 아스거 욘의 [삼면 축구(재현작)]을 찾아서 그 벽면에 적힌 글을 정확히 베껴와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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