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일요일

관심은 자본, 혐오는 가장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

"가장 미친 놈이 모든 것을 갖는다"···'관종경제' 혐오를 부른다

경향신문에 오늘 올라온 기사이다.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매우 보편적인 본능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던 시절에는 배우자의 관심을 끌어서 생식적인 면에서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포식자나 천적의 관심을 끄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을 희생해서 무리의 나머지를 살리는 고결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디어가 시대가 되어서 관심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그러나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바야흐로 인터넷의 시대(특히 스마트 기기와 소셜 미디어)가 되면서 관심을 통해서 일반인 누구든지 '관심 상품'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굳건히 떠받치는 플랫폼 기업이 바로 그 일등 공신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잘 먹히는 관심 대상은 선정성과 혐오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뉴스 기사나 커뮤니티 사이트의 댓글을 보면 왜 이렇게 사람들이 거칠고 편가르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에 [혐]으로 시작하는 글들이 너무나 많다. 클릭을 하면 혐오스런 이미지나 동영상이 나오니 주의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나는 이런 사람들이 극도로 싫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글이기도 하다. 이런 꼴이 너무 보기 싫어서 크롬 브라우저에 Block Site를 몇몇 사이트를 차단한 다음 스마트폰과 PC를 동기화시켜 버렸다.

뉴스 일부를 인용해 본다.
관심은 희소성을 지닌 재화다...관심이 어느 한 곳에 주어지면 다른 곳에는 주어질 수 없다. 실제로 관심을 받는 이들은 뛰어난 외모와 같은 '매력자본'이 있거나 운좋게 시장을 선점한 소수에 불과하다.
부족한 관심을 끌려니 혐오를 끌어다 쓰고, 플랫폼 기업은 이로 말미암아 생거나는 클릭을 가지고 수익을 창출한다.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혐오 콘텐츠를 만들고, 대중은 이에 조금씩 면역을 갖는다. 따라서 제공자는 더 심한 혐오를 끌어낸다. 진지함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혐오는 또한 잘만 이용하면 정치적으로 큰 이득을 창출할 수 있다. 타도해야 할 대상에게 혐오의 프레임을 잘 씌워서 선동하면 다음번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 이유는 언제나 '국민이 원해서'가 된다.

관심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는지에 우리는 또한 관심을 갖는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 대상에 '동기화'되지 않으면 왠지 시대 조류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감기가 채 30분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실시간 검색에에 누구나 목을 맨다. 심지어 네이버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연령대·지역·업종 등으로 세분하여 놓았다.

'다른 사람의 관심'에 관심을 갖게 되면 관심은 더욱 한 곳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이는 관심으로 돈을 벌기 위한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이득이 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의 관심 분야가 다양해야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경향신문의 기사를 하나 더 링크한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씨의 인터뷰 기사이다.

"혐오는 핫한 '화폐'···지금도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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