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안나는 키('dead keys')를 수리하려고 분해를 했다가 실리콘 멤브레인(contact strip, rubber contact 등으로 불림)을 제대로 끼우지 못해서 그냥 방치해 둔 건반이 있다. Fatar Studiologic SL-990이라는 해머 액션의 88건 마스터 키보드이다. 족히 7-8년은 손을 대지 않고 둔 것 같다. 소리가 안나는 키에 네임펜으로 표시를 해 두었었는데 이제는 알콜로도 지워지질 않는다. 네일 리무버로 지워봐야 되겠다.
오랜만에 다시 분해를 해 볼까? 재조립을 미처 못한 부품을 키보드 안의 빈 공간에 그냥 넣어 두었었다. 전원 어댑터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에어캡에 정성스레 싸여서 부품과 같이 숨어있었다. 워낙 심플한 MIDI controller keyboard라서 내부에는 빈 공간이 많다. 핵심 부품만을 꺼내어 연결하여 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종이 클립과 연필이 가장 유용한 수리 도구였다. 일부를 펼친 종이 클립은 멤브레인을 기판에 원래대로 끼우는데 최적의 도구이다. 과거에 이 요령을 몰라서 좌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MIDI 케이블은 Alesis NanoPiano에 연결하였다. 이건 고장날 일이라고는 없는 피아노 음원이다.
전자 키보드의 일부 키가 작동하지 않는 현상은 매우 흔한 고장이다. 회로기판과 실리콘 멤브레인이 서로 접촉하는 양쪽 면에 존재하는 탄소 접점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보통은 지우개나 알콜(91% 이소프로판올 추천)로 양쪽의 접점을 닦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반적인 전기접점 부활제(BW-100; WD-40은 절대 아님!!)은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래 사진을 보라. 기판에서 분리되어 뒤집힌 상태의 실리콘 멤브레인이 위에 살짝 보인다. 가장자리에 돌기 모양으로 튀어나온 것을 나중에 조립할 때에 기판의 구멍에 끼워야 한다. 종이 클립이 이런 용도로 제격인 것이다. 회로기판쪽의 검정색 접점은 아마도 도전성 카본 페이스트를 스크린 프린팅하여 발라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접점을 아무리 잘 닦아도 여전히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탄소 접점의 표면에 산화가 일어나서 그렇다는데, 이것이 알콜이나 지우개로 제거가 될까? 며칠 전 유튜브에서 연필로 탄소 접점을 칠해서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흉내를 내 보았다. 정말 된다! 하지만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도성 탄소 가루를 붙들어두는 접착제와 같은 성분이 없기 때문이다. 5B 연필을 쓰라느니, 연필심을 갈아서 문구용 풀에 개면 전도성 페이스트/페인트가 된다느니(혹은 마르면 전기가 통하지 않으므로 쓸 수 없다느니) 등등 여러가지 정보가 있다.
How to fix a MIDI keyboard with a pencil
집에서 전도성 페인트를 만드는 방법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링크). 하지만 이렇게 불완전한 가내수공업을 하느니 아래에서 소개하는 것을 쓰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탄소 접점의 보수를 위한 목적으로 conductive carbon paste/paint/ink라는 제품(예:
CaiKote 44)이 있다고 한다. 리모콘이나 키보드 등을 수선하는데 적합하도록 작용 용량으로 포장된 제품이다. 우리나라에도 DIYer를 위해 이런 제품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전도성 페인트/페이스트 등의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공장 규모에서나 쓸만한 대용량 포장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그것도 이런 소비재의 수리용으로 팔리는 것은 아니다.
CaiKote 44는 기판쪽이 아니고 rubber contact쪽에 매우 얇게 발라야 한다.
접점 세척 도구와 카본 페이스트 등을 함께 담은 rubber keyboard repair kit라는 것도 외국에서는 꽤 팔리는 모양이다. 심지어 실리콘 러버쪽의 닳은 접점을 떼어내고 새로 붙일 수 있는 교체용 카본 전도성 패드(혹은 'pill'이라고도 함. 알약 모양이므로)도 있다. 일반 전자제품의 키보드/키패드용과 전자 키보드용 수리 키트가 엄격히 구별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도저도 안되면 rubber key contact를 교체해 버리면 된다. Fatar 키보드용 contact는 12 키, 즉 한 옥타브용이 5달러 정도에 팔린다(
링크). 심지어 회로 기판을 통째로 교체해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도 있는데 대신 비용이 많이 든다. 88 건반용 기판은 무려 $155이다.
일단은 '연필 신공'으로 임시 수리를 해 본 다음, rubber contact를 구입하여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해 보자.
좀 더 생각을!
접촉 불량의 원인은 회로 기판쪽일까 혹은 rubber contact쪽일까? 기판쪽의 카본 접점과 rubber쪽의 접점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rubber쪽에는 버튼 형태의 말랑말랑한 검은색 전도체(conductive pad or conductive pill)가 붙어있는데, 이는 기판쪽의 전도성 '잉크'와는 분명 다르다(
참고). 어쩌면 패드를 이루는 전도성 물질이 지속적인 접촉에 의해 소모되어 그런지도 모른다. 연필로 기판쪽을 칠하는 것은 이를 일시적으로 보충해 주는 효과를 줄 것이다. 기판쪽의 접점은 검정색 상태를 유지한 상태라면 양호한 것이 아닐까?
Conductive pill의 마모 정도를 눈으로 알기는 어렵다. 가장 정확한 것은 저항치를 멀티 테스터로 측정해 보는 것이다. 카본 pill의 경우 통상 100 옴 이내여야 한다. 오늘의 실험 결론은 연필로 칠을 해 두어도 효과가 오래 가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불량한 키의 기판쪽 접접과 contact pad 각각에 대해 저항을 측정해 보자. 어느쪽이 더 높은지를 알게되면 전체적인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다음 링크의 글을 읽어보니 rubber contact를 새것으로 갈지 못할 바에는 conductive pad를 교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인다.
Fixing Yamaha PSR-18 synthesizer key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