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을 위한 안내용 로봇을 처음 본 것이 올해였다. 휴머노이드가 아니라 카메라와 화면 및 스피커가 달린 몸체가 바퀴로 움직이는 그런 형태의 것이었다. 얼마 전 유성호텔 커피숍에서는 음료수를 나르는 로봇을 접하기도 했었다. 작은 바퀴로 움직이다 보니 고르지 않은 바닥을 지나면서 로봇의 윗부분으로 갈 수록 진동이 더욱 증폭되어 쟁반에 담긴 커피가 흐르거나 쓰러지지는 않을지 약간은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었다.
일요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유성에 있는 음식점에 가게 되었다. 코로나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마다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보던 키오스크가 소형화되어 식당의 각 테이블에 설치되어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돈을 먼저 내게 만든다. 사실 나는 돈을 미리 내고 손님이 음식을 직접 가져다 먹고 치우는 시스템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러한 서비스 비용이 가격에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식당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물건이 있다. 바로 음식을 나르는 로봇이었다. 호텔에서 보았던 로봇보다는 장애물 회피 움직임 등 모든 면에서 나은 움직임을 보였다. 음식뿐만 아니라 종업원을 불러서 가져다 달라고 흔히 요청하는 앞접시와 일회용 앞치마 등도 담겨 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로봇이 있다고 하여 종업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과 같은 것을 실은 로봇이 테이블 옆에 와서 멈추었지만, 화면에 표시된 테이블 번호가 우리가 앉은 자리의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음식을 내리지 못했다. 오! 벌써 이런 세상이 되었나? 이러한 로봇으로 인해서 식당은 서비스 속도와 질이 높아지고 인건비도 줄이게 되었을까?
신기함을 느끼기에 앞서서 각 테이블마다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을 설치하고 서빙용 로봇을 갖추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로봇으로부터 음식을 내려놓은 뒤 동작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스크린에 터치해 주어야 했다. 중량 센서가 있어서 그릇을 내려놓았음을 로봇이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식을 내리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약간은 불편하였다. 만약 거동이 불편하거나 어린이가 와서 음식을 내리다가 그릇을 엎기라도 한다면? 그러다가 뜨거운 음식이나 깨진 그릇에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 소재는?
바로 어제 넷플릭스에서 보았던 호아킨 피닉스와 스칼렛 요한슨(목소리로만 출연) 주연의 2013년도 영화 <그녀(Her)>가 생각났다. 혹시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글 아랫쪽으로 건너뛰시기를 바란다.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는 OS에게 마음을 터 놓고, 심지어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공교롭게도 남자 주인공은 손으로 쓴 것만 같은 편지를 대신 써 주는 작가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듬뿍 담아 사람들 사이의 빈 틈을 매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정작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는 실패했고, 소개 받은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도 좀처럼 솔직한 마음을 담아 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OS를 점점 친구나 연인처럼 여기게 되고, 길거리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실제 촬영은 현대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서인지 상하이에서 이루어졌다고 함)은 저마다 이어셋을 꽂고 무엇인가를 중얼댄다. 아래의 동영상은 '사만다'가 가의 인간 연인을 위해 직접 만든 노래 "The Moon Song"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 과정은 인간 커플이 서로에게 더 이상 흥미와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관계가 깨어지는 것과 많이 닮았다. 사만다는 이미 작고한 철학자의 저작물을 전부 읽고 그를 되살려내어 즐겁게 대화하면서 이를 오히려 테오도르에게 소개한다. 인간 커플과 테오도르-사만다의 더블 데이트도 이루어진다. 어느 날 일순간 OS가 접속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패닉에 다다른 테오도르는 단말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 접속이 되는 곳을 찾고자 한다. 이어서 다시 돌아온 사만다의 고백이 이어진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었지만, 사만다는 더 이상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되면서 그들과도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갖게 되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책에 비유한다면 그 단어 사이의 공간이 너무나 길다고 토로한다.
약간의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만 영화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왜 <She>가 아니고 <Her>가 제목인지는 영어 대사를 다시 집중하여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어찌하여 인간은 AI에 감정적인 면까지 의존하게 되었나? 기계는 사람이 하기 힘들거나 지루한 작업을 대신 하는 고마운 존재라고 일단은 아주 단순하게 그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다. 식당에 등장한 서빙용 로봇이 그러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일단 생각해 보자. 점주는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손님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종업원의 고용을 줄여서 인건비를 현저하게 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업원이 직접 테이블로 와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 주는 접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그렇게 무가치한 일일까? 서로 대화와 눈빛을 통해서 요구 조건을 전달하고, 감사 또는 불만을 전하는 그 자연스러운 일이 과연 로봇으로 대체해도 되는 일일까? 어쩌면 음식을 주문받고 나르는 모든 일은 너무나 힘들고 보람이 없는 일이기에, 결국은 로봇이 다 감당해야 하는 일인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을 무가치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로만 생각한다면, 그 사회는 건전하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세상 어디에나 '빌런(villain)'이 넘치고, 이를 고발하는 글이 인터넷에 넘쳐나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를 증폭한다. 주차장에서, 병원에서, 관공서에서, 아파트 바로 윗집에서, 직장에서, 학부모 모임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사람이 직접 대면을 하여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이제는 대면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 큰 문제다. 전 세계를 휩쓰는 코로나 '역병'도 사람들을 잠재적인 병원체 전달자로 여기고 가까이 하지 않게 만드는 문화를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비대면 시대의 빈 틈에서 소위 AI라는 것이 시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로봇이나 컴퓨터가 한 일이 사람이 직접 한 일과 구별하기 어려울 때 인간은 그 성과를 놀라워한다. 튜링 테스트도 인공지능의 그러한 능력을 평가하는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접촉을 더욱 원한다. 내가 카카오톡으로 상담을 한 상대방이 챗봇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유튜브에서 본 정치인의 연설이 실제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는 내가 대접을 잘 못받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햄버거를 하나 먹으려고 패스트푸드점에 가서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사람이 주문을 받아? AI 키오스크를 데려다 오라고!'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키오스크 수준이 아직 불완전하니, 더욱 개선되면 과연 나아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흠... 어쩌면 세상이 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비극적인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제출해야 하는 설에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들이밀면 예의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AI는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일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AI가 만든 정보나 인물(현실의 인물을 거의 동일하게 구현한)은 대중에게 잘못되거나 조작된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너무 좋다. 인구가 현재의 수십분의 일 수준으로 줄었을 때라면 AI가 구현한 가상 인물이 설 자리가 많아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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